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84화 (413/686)

12권 9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9)

“대체 그 끝이 어딜까 궁금하네. 자라면 자랄수록 신기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 마을은.”

소호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점점 다가오는 정자를 향해 빙긋 웃었다.

섭주해는 그런 소호의 모습을 묘한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호는 섭주해의 시선을 느꼈을 테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신이 난 듯 콧노래만 부를 뿐이다.

“천무공자?”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도착했을 때, 정갈한 도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그들을 맞이했다.

어깨에 새겨진 흑과 백의 태극 문양과 허리에 찬 송문고검이 그의 출신이 무당파라는 것을 드러냈다.

삼십 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그는 눈가와 얼굴만 봐서는 꽤나 젊어 보였는데, 양 갈래로 난 턱수염과 어딘가 지쳐 보이는 분위기가 그를 겉모습보다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었다.

“예, 도사님. 제가 장소호입니다.”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 먼저 포권을 취했다.

무당파의 도사는 소호의 내면을 살피듯이 지그시 눈을 마주쳤다.

“무당파의 명진이오. 천무공자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명진 도장.

무림 정세에 그리 밝지 않은 소호라도, 명진 도장의 이름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무당파의 대제자. 차세대 장문인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

소호는 두 번째로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섭주해를 힐끔 바라보았다.

섭주해도 알고 있었냐는 뜻의 눈짓이었는데, 그도 몰랐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허명에 불과합니다.”

“겸손하시구려. 직접 만나 보니 천무공자의 명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잘 알겠소.”

명진 도장은 어떤 점에서 감탄했는지는 몰라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소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명진 도장. 저는 섭주해라고 합니다. 아직 별호는 없습니다.”

“호오.”

명진 도장은 섭주해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감탄을 토해 냈다.

“그대가 천무공자의 지낭이라는 청년인 모양이오?”

“예?”

소호는 섭주해가 그리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주해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나요?”

“그렇소. 아직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지만, 천무공자를 돕는 뛰어난 책사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소. 신들린 것 같은 비도술이 매우 탁월한 친구라던데.”

“아……!”

“허허, 어찌 됐든 이리도 뛰어난 청년들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지는구려. 이제 맹주를 보러 가시겠소?”

“아,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뒷짐을 진 채 허허롭게 걸어가는 명진 도장에게서는 중년이 아니라 노년의 도인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주해는 왜 그리 놀랐지?’

소호가 의아해져서 주해를 툭툭 건드리니, 섭주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는, 제 이름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했어요. 하오문도 저에 대해 제대로 모를 정도로요. 그런데 제가 비도를 쓰는 것까지 알고 있다……? 역시 무당파. 아니, 무림맹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요?”

섭주해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 뭔가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거나, 평가를 상향해야 한다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언덕 위의 정자는 멀리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아늑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벚나무가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었다.

“현판이 멋지네……!”

소호가 소박한 정자와 안 어울리는 용사비등한 무림맹 현판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명진 도장은 정자에 올라 뒤쪽에 무성하게 자라난 풀밭을 향해 소리쳤다.

“사숙! 손님이 왔습니다! 나와 보세요!”

풀밭이 부스럭거리면서 흔들리더니, 짚을 엮어 만든 밀짚모자가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아……!”

소호는 눈을 빛냈다.

재미있는 상대였다.

명진 도장도 무당파 대제자 다운 빈틈없는 무형기를 보여 주었지만, 지금 저 풀숲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람은 한 차원 더 높은 무형기를 지니고 있었다.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무인은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싼 자연기와 소통한다.

내부에 쌓은 단전의 진기뿐만 아니라, 주변의 자연기와도 호흡을 주고받으며 감각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절정을 넘어선 무인은 사각지대에서 기습을 해도 반응할 수 있다.

앞, 옆, 그리고 등 뒤의 사각지대까지.

무형기가 닿는 곳까지가 모두 그 무인의 공격 범위이자 수비 범위이다.

절정의 무인이 마치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반응하여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무형기’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단해. 동그랗게 깎아 둔 쇳덩이 같아. 어떻게 저런 무형기가 있을 수 있지?’

소호는 풀밭 위로 커다란 원형의 방패가 하나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껏 보아 온 무인들의 무형기는 대부분 장작을 태워 만든 모닥불과 같았다.

중심에 가까울수록 강하고, 멀어질수록 약해지는 것이다.

불꽃의 크기에 따라 범위의 넓고 좁음이 있을 뿐. 그 밖의 다른 모양은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달라. 신기해. 분명히 강한 무형기인데, 딱 잘라서 일정한 범위까지만 뿜어내고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단단한 거야.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저 범위 안에 들어가면 어떤 공격이든 반응할 수 있을까?’

처음엔 감탄.

그다음은 호기심이다.

소호는 시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강해 보이는 무형기다.

뒤집고 두드려서 어떻게 하면 방어를 뚫을 수 있을지 연구하고 싶지 않은가.

“사숙. 손님이 온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오늘도 그런 모습이시라니!”

명진 도장은 풀밭을 헤치며 나타난 그의 ‘사숙’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서 지긋지긋해하는 티가 났다.

풀밭을 헤치고 나타난 사내는 선한 인상이었다.

허름한 천 옷을 입고, 바짓단은 무릎까지 올린 뒤 허벅지에서 묶어 두었다. 소매도 마찬가지다. 그는 긴 소매를 어깨까지 끌어 올려 양팔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방금까지도 밭일을 하고 있었는지 양손과 앞섶은 흙투성이다.

코밑과 하관 전체에 덥수룩하게 수염이 나있지만, 눈가와 이마는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그런 소리 마, 명진. 있는 그대로를 보여 줘야지.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을 보여 줘서야 그게 제대로 된 만남이겠어?”

허허 웃는 모습에서 사람 좋은 인상이 물씬 풍긴다.

어디로 보나 농민 같은 차림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체구와 완벽하게 단련된 양팔에 새겨진 흉터들이 그의 무력을 짐작케 했다.

‘강하다.’

다행히도 소호는 농민 같은 차림새에 현혹되는 성격이 아니었다.

겉모습과 달리 비범한 사람이라면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수없이 봐 온 사람이 바로 소호다.

“그래도 그렇지. 으음, 사숙,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청년들입니다. 무산학관 출신으로 이번에……. 도철을 쓰러뜨린 그 친구들 말입니다.”

“아! 그 일!”

밀짚모자를 쓴 중년의 사내는 정자 위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소호는 먼저 포권을 취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소호라고 합니다.”

소호는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지만, 넘치는 호기심과 투쟁심은 감추지 않고 눈을 빛냈다.

“허허.”

중년의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오히려 즐거워진 듯 밝은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네. 백연일세. 일해검이라는 별호로 불리지.”

무당파의 속가 제자 출신으로 정파의 최정점인 무림맹주 자리까지 올라간 사내.

야심보단 우직한 정의감 하나만으로 올라갔기에 더더욱 명성이 드높은 걸출한 무인이 소호의 눈앞에 있었다.

―싸워라!

소호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듯했다.

“초면에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소호는 두근거림을 참을 수 없었다.

“무엇이 궁금한가?”

“맹주님께서는 무형기를 어떻게 그렇게 단단하게 만드셨는지요? 그렇게 견고한 무형기는 처음 봤습니다.”

“허어.”

“그 정도로 강한 무형기가 있으면 상대방의 기습에도 반응하기 쉽겠죠? 혹시 공방을 나눌 때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더욱 명확하게 초식의 경로를 느낄 수 있나요?”

“……!”

“어떻게 하면 그렇게 무형기를 단련할 수 있겠습니까? 중단전이 견고해 보이는데……. 중단전 위주로 정과 신의 연결을 강화하면……? 아닌가? 상단전을 중심으로 영(靈)을 단련하는 게 더 효율적일까요? 중단전은 그 연결을 도울 뿐이고?”

소호의 눈이 범상치 않게 빛났다.

황금빛과 붉은빛이 뒤섞여 적금색 기운이 강렬하다.

갸웃거리며 기울인 머리.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기색이지만, 그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백연의 전신을 샅샅이 관통하여 살피고 있었다.

무림맹주 백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옆에 있던 명진 도장도 당황한 듯 안색이 붉어졌다.

“자네……?”

같은 정도의 무림을 걷는 선후배로서 기꺼운 마음으로 무공을 이끌어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특수한 경우일 뿐.

같은 계통의 스승을 둔 사형제지간이거나, 최소한 의형제 이상의 친분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무공은 그에 대해 묻는 것만으로도 실례로 여길 만큼 비인부전(非人不傳)의 금기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

무공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면 그 무공에 대한 약점도 알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실전에서 죽을 수도 있는 일인데 가볍게 다룰 수 있겠는가?

연무의 모습을 엿봤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일도 벌어지는 것이 무림이다.

소호가 질문한 것은 그리 가볍게 입에 올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허허, 그게 그리 궁금했던가.”

허나 백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을 붉히며 무례를 지적하려던 명진 도장이 도리어 민망해질 만큼 백연은 소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단도 맞고 상단도 맞지. 돌고 돌아 태극이라. 무당의 무공은 천지만물의 조화(造化)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릇 자체를 키우는 것에 중점을 둔다네. 모든 것이 한 몸이 되어 한 걸음씩 커져 나가는 것만이 옳은 길이지. 곰이 앞발만 크다거나, 호랑이가 이빨만 크다고 해서 두렵겠는가? 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기괴하고 우스울 뿐일세.”

백연의 자연스러운 대답은 소호의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품고 있었다.

‘그렇구나.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을 모두 한꺼번에 키워 나가야 한다? 자연스럽게? 그러면 언젠가는 모든 것이 강해진다?’

작고 사소한 진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잊고 살기에 더욱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그 순간 소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백연이 말한 대로 앞발만 큰 곰과 이빨만 툭 튀어나온 호랑이였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특색이 있겠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전체적으로 몸집 자체를 키운 집체만 한 곰과 호랑이였다. 일부만 키워서는 임기응변일 뿐. 결국은 강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신수비처에서 본 괴물들. 그 혈귀들이 그렇게 비정상적이었지. 그렇구나. 그게 사파와 정파의 차이구나.’

이번엔 무림 강호의 사도와 정도의 차이점에 대한 깨달음도 얻었다.

깨달음을 얻은 소호가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는 사이, 백연은 명진 도장을 향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여우에게는 토끼를 사냥하는 것이 목숨이 걸린 중요한 일이지만, 범에게는 한낱 여흥일 뿐이지. 언제든 옆 산의 멧돼지를 잡으러 떠날 수 있으니 말이야. 천무공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물은 것이니 너는 이번 일을 담아 두지 말거라.”

“사숙……!”

명진 도장은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지만, 백연의 단호한 어투에 놀란 듯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였다.

백연은 눈빛을 갈무리하기 시작하는 소호에게 편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 내가 물어볼 차례군. 소림의 역근경으로 기초를 닦고, 무당의 태극의 이치를 온몸에 담았으며, 발걸음과 눈빛에선 내가 아는 분들의 흔적이 느껴지는군. 자네는 어디에서 왔는가?”

백연의 따스하면서도 심유한 눈빛이 소호의 내면을 꿰뚫어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