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85화 (414/686)

12권 10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0)

소호는 그런 백연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빙긋 웃었다.

사실을 숨겨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그는 다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자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왔습니다. 삼산현에 있는 작은 화전촌이에요.”

“역시.”

백연의 눈빛에 확신이 담겼다.

“자네의 아버님은 내가 생각하는 그분이신가?”

“아마 맞을 것 같네요. 화 누나는 어릴 적에 저를 많이 괴롭혔어요. 엄청.”

소호는 그때만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맨날 장난 많이 친다고 혼나고, 동생들 돌보라고 등짝도 때리고……. 어머니 일 도우라고 잔소리하고.”

백연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핫! 우리 부인께서 성정이 강직하긴 하지. 그랬군. 그런 거였어.”

백연은 짐작하던 것을 확신하게 되어 흡족해 보였고, 섭주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당황한 건 명진 도장뿐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얼굴로 소호와 백연을 번갈아 응시했다.

“사숙, 이게 무슨 소립니까? 천무공자랑 아는 사이였습니까?”

“복잡한 이야기다. 명진. 여기 있는 천무공자와 나는 지금 처음 보는 사이지만, 사실은 관계가 깊은 모양이야.”

“예?”

“부인의 의자매의 아들인 것 같거든.”

“……!”

“저 친구의 아버지도 내가 예전에 신세를 크게 졌던 분이고.”

백연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뭔가가 떠오른 듯 반갑게 주먹으로 손바닥을 때렸다.

“그래. 그게 너였구나, 소호. 너는 모르겠지만, 난 어릴 적에 너를 만난 적이 있다.”

“예?”

이번엔 소호가 깜짝 놀랐다.

“대체 언제?”

소호는 은자촌에 왔다 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백연은 소호의 기억 속에 없었다.

“너는 모르겠지. 아직 젖을 뗀 지 얼마 안 된 어린아이였으니까. 풍운객잔을 새로 짓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이제 보니 알겠군. 어머니의 얼굴에 아버지의 코와 입, 그리고 체형을 물려받았구나.”

“아……!”

“그 뒤로도 가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일로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갈 수가 없었지. 그래서 너를 이제야 보는구나.”

소호는 그제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뵌 적은 없었지만, 가끔 대화 속에 무림맹주님이 나오기는 했어요. 화 누나의 남편은 착해 빠지…… 크흠! 선량해서, 사기당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허허,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이 내 부인의 말투군.”

백연은 즐겁게 소리 내어 웃은 뒤, 어안이 벙벙하게 굳어 있는 명진 도장을 향해 손짓을 했다.

“명진, 부탁 하나만 하지. 차 한 잔만 내어 줘. 먼 친척 같은 이 친구와 대화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은데.”

“……예. 다녀오지요.”

명진 도장은 백연과 진지한 시선을 잠시 교환한 뒤 순순히 몸을 돌렸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섭주해는 눈치 빠르게 명진 도장의 뒤를 쫓아갔다.

두 사람이 언덕 중턱에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백연은 시원하게 바람이 부는 정자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앉거라. 우린 서로 이야기 할 게 많지?”

소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백연의 건너편에 털썩 앉았다.

“왠지 제가 대답할 게 많을 것 같네요.”

“그래.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되어서 반갑지만, 사안이 중대한 만큼 우린 안부보다는 대화를 먼저 나눠야 할 것 같구나.”

백연은 무릎 위로 걷어붙였던 바지를 다시 내리면서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어야겠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네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아뇨. 여쭤본 적이 없어요.”

“그렇구나. 그럼 정말로 너 혼자 하는 일이구나. 이거 놀라운 걸.”

백연은 진중한 얼굴로 자신의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소호는 당황했다.

여기서 자신이 한 일을 아버지가 알고 있냐는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제가 결정하고 행하는 일입니다. 아버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에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하지만 사실이 밝혀졌을 때, 네 아버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소호는 말문이 막혔다.

“제가 무슨 행동을 하든 아버지의 뜻으로 느껴질 거라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겠지.”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지만, 열세 살 이후로 제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요.”

“그럴 테지. 그분 성격이라면.”

백연은 허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속정이 깊지만, 절대로 간섭은 하지 않으니까. 네가 길에서 칼을 맞아 죽더라도, 그 복수만을 행할 뿐 네가 길에 못 나가게 하지는 않으시는 분이잖나?”

백연은 소호의 생각보다 장기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마치 미리 생각해 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평가에, 소호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렇다고 한들, 그게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 주진 않는단다.”

“예?”

“명가의 후예들은 좋은 것들을 타고나지.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예절과 가풍을 배우면서 자라난단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가문의 이름을 짊어져야 하는 거야. 똑같은 실수를 해도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셈이기 때문에 더욱 큰 지탄을 받지.”

“아…….”

“사실 예전에 풍운객잔에도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단다. 사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세상은 그가 명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더 심하게 손가락질을 했고, 마침내 가문에서도 내쳐질 뻔했던 사람이었지.”

그 순간, 소호의 머릿속에서 남궁휴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백연은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이해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혜택을 받는 만큼 손해도 보는 법이다. 네가 그 마을, 그리고 뛰어난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배운 것들은 감히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야.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거라.”

“억울한 건…… 아니에요.”

“그러니?”

백연은 허허 웃었다.

소호는 마치 어린아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맥이란 건 이래서 무섭다.

서로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마치 삼촌과 조카 사이가 된 듯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소호야. 네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일 거다. 실력과 업적으로 아버지를 넘어서는 것.”

“……!”

“그렇게 되면 그 어떤 호사가들도 너를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행동하는 아이라고 말하지 않을 거다.”

“그런……가요?”

“내가 처가인 구양세가의 영향을 받는다든가, 무당파의 속가 제자로서 무당파의 명령을 받는다는 소문이 남아 있었다면…… 나는 지금 무림맹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말에 소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장기린.

무쌍귀, 붉은 악귀.

자라면 자랄수록, 나이가 들어 세상을 알아 가면 갈수록 대단하게 느껴지는 사람.

그게 바로 아버지건만, 눈앞에 있는 무림맹주는 불만이 있다면 그런 아버지를 넘어서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는……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렇구나. 괜찮다. 원래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를 넘어서며 성장하는 법이지.”

백연은 자신도 자식이 있었다면 좋겠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그렇다면 더욱 문제구나. 사실 나는 천무련이라는 곳을 세우고 있는 젊은 청년을 말리려고 오늘의 자리를 만든 거란다.”

백연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정면으로 소호를 마주 보았다.

덥수룩한 수염 위.

마치 소처럼 동그란 눈이 소호를 지그시 응시한다.

소는 순박하다.

하지만 고집스럽기도 했다.

‘천무련주를 말린다? 왜지?’

소호는 의문이 들었지만 섣불리 묻지 않았다.

“왕진 태감이 화산 혈사를 일으키면서 무림 강호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뒤에 세운 것이 무산학관이다. 구파일방. 지금은 팔파일방이라 불리는 문파의 절학들이 절반 이상 무산학관으로 흘러들어 갔지. 그야말로 무림인들의 피로 세운 학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백연은 안타까운 혈사를 이야기함에도 목소리가 차분했다.

“원래는 강호 무림의 무림인들은 그 무산학관을 싫어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증스러워했지. 그런데 그 무산학관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거야.”

소호는 직감했다.

무산학관에서 가장 유명해진 이.

천무공자인 자신의 이야기였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백호방의 작은 호랑이라는 이름이 천무공자라는 별호로 불리기 시작했고,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찾는 호사가들이 천하제일의 재능이라 떠들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 일들은 매년 있어 왔거든. 천하제일의 무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문이 무성하게 떠돈단다. 그 사람이 크게 지거나, 죽기 전까지는 말이야.”

백연은 자신도 그런 소문이 돌던 사람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걸 보면 무산학관이 머리는 잘 썼어. 왕진의 뜻인지, 아니면 가면철왕의 뜻인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사람들은 화산 혈사의 잔혹함을 잊고 재밌는 일에 빠져들었다. 미래의 천하제일인일지도 모르는 무학 영재들의 무림 대회라니. 어찌 재밌지 않을 수 있겠나.”

백연은 그 점에 대해 인정한다면서 웃었다.

“나라도 보고 싶어졌다. 궁금하더구나. 어떤 이가 팔파일방의 피의 열매를 먹고 자라날 것인가? 실제로 무산학관 출신이 무인들은 황실에 대거 등용되었고…… 흑시군에 그 힘을 보태겠다며 군관이 되고 있으니. 그 유명한 친구도 흑시군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지.”

소호는 그 순간 흑시군에 들어간 선배들을 떠올렸다.

이태산, 태성천.

그리고 백설지.

“그런데 희한한 이야기가 들리더구나. 무산학관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년이 졸업을 하고나서 이상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왕진이 숨겨 두었던 비처들을 차례대로 돌면서 쑥대밭으로 만들고, 하북의 골칫거리였던 사흉 중의 도올을 죽였으며, 안휘성에서는 사흉 중에 가장 악명을 떨친 도철을 쓰러뜨리고 그 땅과 흑시군 중의 일부를 빼앗았다……. 놀라웠다. 정녕 놀라운 소식이었어.”

백연의 태도는 묘했다.

기쁜 듯이 말하지만, 눈빛은 준엄했고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었다.

자연히 소호도 긴장하게 되었다.

백연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질책인가? 분노인가?

아니면 자책인가?

백연의 심정을 짐작할 수 없으니,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천무공자에 대해 좀 더 알아보려 했는데, 최근에는 그보다 한발 더 앞선 이야기가 들려왔지. 천무공자가 천무련이라는 곳을 세웠으며, 새로운 무림 강호를 만들겠다는 선언을 전국 방방곡곡에 띄웠다더구나. 그곳에 몰려든 사람들의 숫자가 일천이 넘는다지? 놀라웠다. 천무공자는 나는 물론이고 무림맹의 지자(智者)들의 예상보다 몇 수나 더 빨리 성장하고 있었어. 장강의 앞 물결이 뒷물결에 물러난다지만.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었지.”

“그러니까…….”

소호는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다가 되물었다.

“저희가 너무 잘 해냈다는 거죠?”

“그래. 바로 맞췄다.”

백연은 칭찬이지만 칭찬이 아닌 말투로 소호의 업적을 인정했다.

“잘 해내고 있는데, 왜 저를 말리려고 하셨어요?”

“화산 혈사가 있은 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힘을 합쳐서 비슷한 일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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