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86화 (415/686)

12권 11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1)

비슷한 일.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소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슷한 일을 준비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큰 위기 속에서 협력을 하기로 뜻을 모았단다. 그래서 각 문파가 전력을 다해 공동 전인을 만들기로 했지.”

“……!”

“본래 재능이 넘치는 후기지수가 소림의 대환단, 무당의 태청단은 물론이고 온갖 영약을 먹고 고금 절학들을 익히면서 강해졌단다. 흥미롭지 않니?”

백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무림맹의 모든 이들이 그 친구가 폐관을 깨고 나타나 정도의 힘을 한데 모을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소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제가 나타난 거군요?”

“그래. 정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혼자의 힘으로 천무련을 세운 채 말이다. 나는 모르겠다. 소호야. 본래라면 무림맹의 맹주로서 너를 말려야 할 것이다. 천무련도 해체하라고 해야 할 테지.”

“제가 있음으로 해서 정도 문파들의 결집력이 약해지니까?”

“그래.”

“그래서, 그렇게 하실 건가요?”

백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호는 당황스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백연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진중한 얼굴로 깊게 고민하고 있는 백연의 얼굴을 보면 그런 마음은 들지 않는다.

두 사람이 침묵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명진 도장은 섭주해와 함께 찻잔과 찻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사숙.”

명진 도장이 연한 황색의 찻물을 백연에게 부어 주자, 섭주해가 그대로 찻주전자를 받아 소호에게도 따라 주었다.

그 과정에서 명진 도장과 섭주해가 서로 미소를 주고받는다.

그 짧은 새에 많이 친해진 듯 친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무림맹…… 공동 전인……. 그리고, 천무련.’

소호는 생각을 거듭했고,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툭.

소호는 찻물을 입에만 살짝 대서 입술을 적신 뒤,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맹주님, 저는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천무련의 깃발을 올리기 위해 여기 있는 주해처럼 저와 뜻을 함께하는 많은 이들이 도와주었어요.”

고민은 잠시.

한 번 마음을 정하자 편안한 안정이 찾아왔다.

소호는 꾸며낼 필요가 없었다.

계략이나 모략은 소호와 맞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고 그에 따른 장애물들을 돌파해 나가면 그만이다.

“아직 폐관에서 나오지도 않았고, 나온다 해도 능력이 증명된 것도 아닌 이를 위해 제가 지금껏 이룬 것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가볍게 시작한 일이 아니에요.”

“그런가.”

“저는 제 길을 갈 것입니다. 오히려 맹주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호는 백연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꼿꼿이 세운 허리.

곧은 자세에서 흔들리지 않는 소나무처럼 강한 기상이 피어올랐다.

“맹주령을 저에게 주세요.”

명진 도장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섭주해마저 급하게 호흡을 삼키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무림맹주의 맹주령은 그런 식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었다.

팔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들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 승계가 이뤄질 수 있는 신물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 모두들 더욱 놀란 얼굴이었다.

소호는 모두의 시선을 충분히 주목시킨 뒤, 차분하게 뒷말을 이어서 했다.

“지금 달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언젠가……. 제가 그걸 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천무련을 키워 보겠습니다.”

소호가 이제껏 해 오던 생각이 이 순간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진중한 말투,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으로 불타는 마음을 두 눈으로 표현했다.

“허헛.”

백연은 찻물을 충분히 입에 머금고 있다가 천천히 삼켰다.

“맹주령을 원한다……?”

그는 가부(可否)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을 지적했다.

“너는 이제 막 약관이 된 청년이다, 소호.”

“예.”

“왕진 태감은 잔인한 사람이지. 지금까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소호 너를 가만히 내버려 두더구나. 혹시 왕진 태감과 친분이 있니?”

“……안면은 있어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왕진의 뜻대로 움직인 거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다만, 일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모인 이상 지금부터는 다를 것이야. 왕진은 그런 것까지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이 아니니까. 설령 그가 가만히 두고 본다 해도, 다른 고관대작들이 너를 보며 불안해할 것이다.”

군벌로서 처벌받는 것.

실제로 소호와 섭주해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백연은 소호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지략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언제나 문제가 생기면 직접 나서서 찾아보고 모든 일들을 검으로 받아 냈지.”

순박한 얼굴.

화도 제대로 낼 줄 모를 것 같은 곧고 맑은 성정 뒤에는 이런 면이 있었던가.

백연은 무인답게 다부진 얼굴로 조용히 웃었다.

“천무공자의 실력을 견식할 기회를 주겠니?”

“……얼마든지요.”

소호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그렇다.

두 사람은 무인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검을 한 번 나누는 것이 더욱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터.

두 사람은 텃밭 뒤에 마련되어 있는 땅이 단단한 평지로 이동했다.

‘발자국이 많다.’

소호는 그 땅이 단단한 것은 누군가가 매일같이 강한 힘으로 이곳을 짓밟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일부러 연무장을 만들기 위해 만든 곳이 아니다.

매일같이 단련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범했던 땅이 연무장이 된 것에 다름없다.

조악한 형태의 연무장이지만, 이곳은 무림맹주인 백연이 직접 몸으로 만든 무(武)의 증명이었다.

‘병기도 준비되어 있어.’

연무장 한편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십팔반 병기가 꽂혀 있는 진열대도 놓여 있었다.

백연은 그곳에서 무당파의 것과 꼭 닮은 송문고검 형태의 목검을 들었다.

“소호, 너는 어떤 무기를 사용할 것이지?”

“저는, 박도로 하겠습니다.”

“박도? 칼……. 칼이라…….”

백연은 과거를 떠올리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난 네가 창을 쓸 줄 알았다.”

“창은…… 지겨워서요.”

소호가 먼저 나무로 만들어진 박도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자세를 낮췄다.

백연은 몸을 비스듬히 돌린 채, 목검의 끝으로 소호의 중단을 겨누었다.

“사숙! 정말로 천무공자와 대련하실 겁니까? 이건……. 이건 옳지 않습니다.”

명진 도장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무인끼리 이 이상 더 진솔한 대화가 어디에 있을까? 괜찮으니 거기서 지켜봐, 명진.”

백연은 명진의 우려를 단칼에 잘라 버린 뒤, 소호를 향해 웃어 주었다.

“나는 공격에 그리 능하지 않으니, 먼저 들어와 주겠어?”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사내지만, 백연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였다.

‘이 사람, 천성이 무인이구나.’

소호는 깊게 뿌리를 박은 거목처럼 서 있는 백연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무형기가 단단하고 강력해. 쇳덩이 같아. 많이 흔들어 봐야겠다.’

소호는 박도의 끝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갑니다.”

싸움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러웠다.

소호는 정중동(靜中動)의 이치나, 후발제인(後發制人)의 무공과는 성향이 맞지 않았다.

고요한 가운데에 끊임없는 움직임이라든가, 상대방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후에 제압하는 무공이라니.

소호는 그런 무공은 좋아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상대방의 약점을 명확하게 파악해 그 상극의 무공으로 무자비하게 격파한다.

그게 소호의 방식이다.

파파팟!

땅을 한 번 박찼지만, 세 번이나 몸을 튕긴 소호가 순식간에 백연의 좌측 하단을 향해 짓쳐들었다.

마치 물수제비를 튕기듯 공중에서 상체를 비트는 소호의 움직임은 화려했다.

소호가 아는 무인들의 검술 중 가장 은밀하고 날카로운 검술.

유준의 백귀검.

그중에서도 만월귀살(彎月鬼殺)이다.

스하악―!

왼쪽 무릎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오른발을 쭉 앞으로 뻗으며 몸을 낮췄다가, 튕기듯이 몸을 일으킨다.

소호의 손에 들려 있던 박도가 달도 반으로 쪼갤 것처럼 날카로운 참격을 위로 올려쳤다.

후왁―!

칼날이 나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섬뜩한 일격이 허공을 갈랐다.

공간이 잘려 나가고.

그 빈 공간으로 공기가 빨려들어 가면서 강렬한 바람 소리가 났다.

백연은 매끄러운 보법으로 소호의 참격을 옆으로 피했다.

오른발을 왼쪽 뒤로 빼는 단순한 움직임이었으나, 그 안에도 무당파 제운종의 묘리가 진하게 묻어 있으니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고수의 몸놀림이다.

스윽―.

백연의 검끝이 소호를 향해 다가왔다.

기이했다.

백연은 사실 소호와 거의 동시에 움직임을 시작했다.

소호가 땅을 걷어차며 움직일 때 이미 검끝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고 있었다.

처음엔 너무 느린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소호가 먼저 공격을 가하고 보니 소호의 두 번째 움직임으로는 백연의 공격보다 빠를 수가 없었다.

후발제인이라는 말이 딱 맞다.

느림의 미학.

느린 것이 오히려 빨라진 셈이다.

소호가 시전한 백귀검을 수습하기도 전인데, 백연의 검은 이미 목덜미에 다가와 있었다.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다.

산들거리는 바람처럼 다가와, 알아채고 보니 이미 목숨이 위험했다.

“……!”

소호는 황급히 몸을 뒤로 튕겼다.

파르르―.

그러자 백연의 검 끝에 기묘한 회전력이 가미되었다.

무당파의 무공에 익숙한 소호는 백연의 검에 매일 아침마다 수련하던 태극의 원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끝이 팔(八)자를 그리듯 끊임없이 회전했다.

백연의 검은 소호의 뒤를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놓치지를 않았다.

‘이대론 못 피한다!’

소호는 박도의 날을 비스듬하게 젖혀 태극검의 투로대로 움직였다.

“태극검!”

옆에서 명진 도장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극과 태극의 만남이다.

다만, 백연의 태극검은 분명히 소호의 것과는 달랐다.

따다다당!

검과 도가 만나자, 백연의 검은 순식간에 박도를 나선형으로 타고 넘으며 소호의 손목을 노려왔다.

소호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태극검.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제압하는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묘리뿐만 아니라, 전사경(纏絲勁)까지 실린 ‘진짜 태극검’이었다.

소호는 뒤로 물러서면서 처음으로 무공의 깊이에 대한 부족함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벽을 만난 것 같았다.

거대한 장성(長城) 앞에 선 한낱 사람처럼.

태극검을 전개하는 백연에게는 전후좌우 어디에도 치고 나갈 만한 빈틈이 없었다.

무공의 흐름을 읽는 소호의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대로는 계속해서 밀린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 유함은 강함을 이긴다지만, 유함을 이기는 것 또한 압도적인 강함.’

소호는 박도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역근경 진기에서 흘러나오는 전륜법광이 은은하게 퍼져 나오고, 동시에 붉은색 귀기(鬼氣) 또한 눈빛에 섞여 들었다.

“하압!”

크게 숨을 들이쉰 뒤에 강하게 일격.

“단(斷)!”

나무로 만들어진 박도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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