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2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2)
우우웅―!
벌 떼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황금색 기운이 소호의 칼을 뒤덮으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수평 일격.
좌중단에서 우측 끝까지 잘라 내는 일도양단의 참격이 순식간에 백연의 가슴 높이에 긴 선을 그렸다.
스걱―.
바람이 두 갈래로 쪼개진다.
마치 커다란 파도가 오기 전에 바닷물이 바다 쪽으로 쓸려가듯, 소호의 주변에 있던 공기가 소호의 칼날로 모조리 빨려들어 가는 듯했다.
‘튕겨 나라!’
소호의 칼끝에서 시작된 막강한 힘의 흐름이 한 마리의 용처럼 정면으로 뿜어졌다.
쿠웅―.
소호의 하체는 굳건했다.
왼발을 앞으로 뻗어 강하게 디딘 채, 오른발은 뒤쪽에서 반동을 버텨 낸다.
소호는 강기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곳은 서로 무(武)를 겨루는 자리이지, 목숨을 노리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으로 막았다! 이제 물러서면…… 어?’
우우웅―.
“……!”
한데 이변이 일어났다.
백연이 소호의 도기(刀氣)를 가볍게 받아 낸 것이다.
‘무슨?’
소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화선지를 물에 적신 것 같았다.
쇳덩이도 가를 것처럼 날카롭게 솟구치던 예기(銳氣)가 백연의 검과 만난 순간 찰나의 꿈처럼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
휘리리릭―.
백연은 그저 소호의 칼과 검끝이 닿는 순간 크게 검을 한 번 휘돌렸을 뿐이다.
그런데 소호가 기껏 모아서 압출해 낸 기파가 물에 젖은 해파리처럼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버렸다.
‘그걸 흩어내?’
소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껏 소호의 공격을 이렇게나 쉽게 받아 낸 상대가 있었던가?
없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 장기린과의 대결 이후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가면철왕 철우보다 한 수 위로 보였다.
어쩌면 도철의 ‘용생’도 백연은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올의 막강한 신력으로도, 백연의 방어는 뚫기 힘들게 분명했다.
키이잉-
백연의 검끝이 기묘한 파동을 낳으며 부드럽게 회전했다.
백연은 ‘완성된 무인’이 어떤 존재인지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검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검을 잡은 손과 팔, 몸통에서 다리로 이어져 발끝까지. 백연은 온몸으로 태극의 묘리를 살려 부드럽게 회전했다.
군더더기가 단 하나도 없다.
백연이 지닌 모든 피와 살이 오로지 지금 저 무공을 펼쳐 내기 위해 한뜻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치르릉―.
나무로 만들어진 송문고검이 기분 좋은 듯한 울음을 토해 냈다.
쩌엉!
백연이 몸을 반회전시키며 검을 휘두르자 소호가 내뿜었던 강력한 참격은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화로워.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가 있지?’
백연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전부 소호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무공의 향연이다.
질 수는 없다.
소호의 박도가 날카로운 기세를 품고 몇 번이고 허공을 그었으나, 백연은 마치 거대한 호수처럼 차분하게 모든 공격을 받아들였다.
‘태극권, 태극검, 그리고 저건……. 아마, 태극혜검. 무당 무공의 정수.’
백연은 그 자신이 무당 무공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태극의 묘리를 온몸으로 펼쳐 보였다.
‘이 사람은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털끝도 건드릴 수 없겠구나.’
깨달음은 잠시.
소호의 몸은 생각을 하기에 앞서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휘리리릭―.
소호는 그대로 몸을 튕겨 올려 공중에서 양손으로 박도를 거머쥐었다.
번뜩이는 눈빛.
눈이 부실 만큼 강렬하게 피어오르는 전륜법광이 소호의 박도를 감싸고 단단하게 뭉친다.
“강기!”
경악하는 명진 도장의 외침을 뒤로하고, 소호는 전력을 다해 박도를 아래로 내리그었다.
번쩍!
번개처럼 번쩍이는 참격이 천지를 양단하듯 내리찍었다.
터어엉!
백연은 이번만큼은 가벼이 흩어 내지 못했다.
소호가 그러하듯, 백연도 전력을 다했다.
태극혜검을 펼치는 목검에 선명한 청람색 강기가 넝쿨처럼 감겨 오른다.
위이이잉―.
백연의 검은 태극혜검의 모든 변화, 무수한 검결을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뿜어내고 있었다.
사량발천근, 후발제인.
그렇게 하나하나 알아보는 게 무의미할 만큼 검술 안에 온갖 무학의 깨달음이 담겨 있었다.
처음에 ‘단’을 펼칠 때보다는 격렬한 소음이 터졌지만, 결국 소호의 ‘참’도 부드럽게 흩어졌다.
그뿐인가?
소호가 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어도 흘리기만 하던 백연이 이번엔 역공을 했다.
태극혜검.
그 무수한 검결의 파도가 해일처럼 쏟아져 내린다.
퍼엉! 파앙!
소호의 눈이 빛났다.
그는 백연의 모든 움직임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양손은 멈추지 않고 온갖 무공을 뿜어냈다.
오른손으로는 텐챠이의 천랑도를.
왼손으로는 태극권과 소림의 반선수를 섞어 가며 날아드는 검격들을 흘려냈다.
강한 힘이 부딪치는 곳에서 강렬한 폭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터엉! 텅!
파스스―.
소호의 소맷자락이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터져 나가며 천 조각을 흩뿌렸다.
쒜에에에엑!
가볍게 내리치는데, 들리는 파공음은 거대한 쇠뇌가 쏘아지는 것처럼 시끄럽기 그지없다.
꽈앙!
가볍게 다가온 검끝을 박도로 쳐 내는 순간 소호의 몸이 훅― 하고 뒤로 떠밀렸다.
겉보기엔 검결의 움직임이 부드러운데, 막상 닿아 보면 괴력도 이런 괴력이 없다.
강(强)과 유(柔)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 음양이 하나가 되었다.
태극혜검에 요구되는 무학의 진리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다.
‘이 사람, 정말로 강하다!’
소호는 백연의 옷자락을 확인했다.
소호의 소맷자락은 막강한 기파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고 터져 나가는데, 백연이 입은 평범한 삼베옷은 실오라기 한 올도 상한 것 없이 멀쩡했다.
‘무형기의 완성. 전신에 융통무애하게 진기가 흐른다는 게 저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구나!’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터엉!
백연은 뒤로 떠밀리는 소호에게 구름처럼 다가와, 왼손으로 소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찌이익―.
붙잡힌 소맷자락 쪽으로 소호의 몸이 급격히 딸려간다.
백연이 검의 호수구 부분을 소호의 가슴에 대고 강하게 진각을 밟는 순간, 소호의 몸 안으로 강력한 충격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피부를 넘어 내부에 타격을 주는 기술.
침투경.
무당파 면장의 수법이다.
“쿠억!”
소호는 가슴에 닿은 목검을 거칠게 손바닥으로 쳐 낸 뒤, 뒷발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몸을 돌려 충격을 최대한 해소시켰다.
그리고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왼발을 뻗는 등각(登脚)으로 백연의 턱을 노렸다.
뻐억!
백연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검 손잡이로 소호의 발을 쳐 냈다.
찌이익―.
그 와중에 백연에게 붙잡혔던 소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파라라락―.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소호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극혜검은 무궁(無窮)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서 벗어나지 못할 그물을 만들어 냈다.
‘무림맹주님. 나는 공격에 능하지 않으니 먼저 들어와 달라고? 하! 거짓말!’
소호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소맷자락을 잡고 가슴을 격타하는 수법.
소호의 공격을 막아 내던 대처법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백연은 만전(萬戰)을 겪었다.
수많은 싸움을 끝내고, 무림맹주의 자리에 앉은 진정한 강자다.
사람 좋은 얼굴에 속았다.
그런 사람이 공격에는 약하다?
방어만 잘하는 검사다?
웃기는 소리다.
애초에 믿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대충은 알겠어.’
소호는 아지랑이 같은 몸놀림으로 백연에게서 벗어날 듯 뒤로 물러서다가, 갑자기 백연의 좌측 사각지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파라라락―.
소맷자락이 바람에 떨렸다.
기이잉―.
주변의 풍경에서 색깔이 사라져 간다.
상승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세계 속에서, 소호는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똑같이 상승의 영역에 들어온 백연의 눈동자가 천천히, 소호의 움직임을 좇아 좌측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더 빨라.’
소호는 처음에 백연이 선보였던 태극혜검의 기수식을 그대로 똑같이 따라했다.
자연스러운 자연체의 형태에서, 왼손은 살짝 앞으로 내민 자세.
검 대신 든 박도는 자연스럽게 칼끝을 바닥으로 늘어뜨렸다.
“……!”
소호의 자세를 알아본 백연의 눈빛이 흔들리는 모습이 정면에서 보였다.
상승의 영역은 끝났다.
훅― 하고 다시 느려지는 세계.
흑백뿐만이 아니라, 온갖 총천연색 색감이 다시 돌아왔다.
“태극혜검!”
명진 도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친다.
소호는 백연이 펼쳤던 전(前) 삼식(三式)의 태극혜검을 백연과 맞물리듯 펼쳐 냈다.
이미 태극검과 태극권에 익숙하기에 펼쳐 내는 것 자체는 쉬웠다.
맺고 끊는 진기의 흐름.
힘의 강약 조절은 백연이 펼치던 것을 그대로 흉내 냈다.
따다다당!
순식간에 똑같은 태극혜검을 펼치는 검끼리 맞부딪쳤다.
‘여기서 삼 푼의 힘을 빼고, 손목을 돌리고, 다음 초식에선 삼 푼의 힘을 더! 정확하게 처음과 동일하게!’
소호는 그동안 지켜본 백연의 움직임을 그대로 똑같이 따라했다.
휘리릭!
백연과 소호가 마치 동경(銅鏡)을 보고 움직이는 것처럼 똑같이 움직였다.
발놀림.
몸의 회전각도.
손목의 움직임.
모든 것이 동일했다.
따앙! 따다당!
검과 칼이 맞물리면서 물레방아가 돌 듯 두 사람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마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서로 똑같은 보법, 똑같은 검술을 동시에 사용하니 힘의 흐름이 부딪치지 않고 커다란 원만 그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호는 승부수를 띄웠다.
소호가 파악한 태극혜검의 약점은 단 하나다.
더욱 빠르고 강한 힘.
유능제강의 묘리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내리는 것만이 승리의 지름길일 것이다.
우우우웅―!
“……!”
소호의 몸에서 전륜법광이 강하게 피어올랐다.
태극혜검의 검로를 따라 움직이면서, 그 위에는 집혼기의 힘까지 끌어 올려 소호가 담을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담았다.
콰아앙!
가볍게 움직인 소호의 박도가 육중한 파괴력을 전달했다.
처음으로 백연의 검이 휘청― 뒤로 흔들렸다.
백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표정도 전에 없이 굳은 얼굴이다. 그의 움직임이 다급해 보였다.
태극혜검의 검로를 따르되, 청람색 강기가 더욱더 강한 빛을 발한다.
“챠핫!”
소호가 강렬한 기합성을 토해 냈다.
남아 있는 모든 내공을 이 일격에 쏟아부었다.
최고의 일격.
이걸로 승부를 봐야 했다.
무림맹주 백연을, 새로운 무림의 신성(新星) 천무공자 소호가 쓰러뜨리는 것이다!
콰직!
“엇?”
가슴이 벅차오르는 꿈같은 순간.
소호가 들고 있던 박도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충격에 정신이 멍해지는 광경이다.
나무로 만든 박도의 손잡이에 금이 가더니, 마치 빙판이 쪼개지듯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며 박도가 허공에서 산산조각 났다.
“아아……!”
소호는 탄식밖에 토해 낼 수 없었다.
설마 무기가 내공을 버티지 못할 줄이야!
어째서 미리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소호는 자책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어느새 혼자 빈손이 되고 말았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충격을 받은 것은 무기만이 아닌 듯, 손목까지 혈도가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무당의 무공과 소림의 진기는 안 맞는구나!’
또 다른 깨달음이다.
소호는 자신이 각종 절학들을 너무 막무가내로 사용했음을 깨달았다.
쉬이이익―.
검과 칼이 맞부딪쳤어야 할 일격인데 느닷없이 한 쪽의 병기가 사라져 버린 셈이니, 힘의 균형은 걷잡을 수 없이 한쪽으로 쏠려 버렸다.
콰아아아아―!
청람색 강기에 휩싸인 백연의 검이 소호의 명문혈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이대로 명문혈을 얻어맞고 큰 내상을 입을 모습이 소호의 눈에 선했다.
“흐읍!”
백연은 당황하여 호흡을 끊으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다급하게 손목을 옆으로 비틀고, 발을 뒤로 끌어 몸의 균형을 깨뜨렸다.
우우웅―.
찰나의 순간, 고된 일이었으나 백연은 강기를 완벽하게 수습해 냈다.
그야말로 융통무애한 진기를 온몸에 두른 고수다운 면모다.
백연의 검끝이 소호의 명문혈을 살짝 툭― 하고 건드렸다.
충격은 없었다.
그래도 소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뼈아픈 타격이었다.
“아……!”
소호는 탄식했다.
“제가 졌네요.”
소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