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88화 (417/686)

12권 13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3)

패배를 하다니.

물론 아쉬운 마음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백연보다 무공 수위가 낮으니 지는 것이 당연했다. 서로 죽일 각오로 싸운다면 또 다른 결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상대는 강했다.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백연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단하구나. 놀랐어.”

스윽―.

목검을 내리는 백연의 얼굴에선 복잡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이에요.”

소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간에선 일해검은 먼저 나서서 싸울 줄을 모른다던데, 그게 크게 잘못된 사실이라는 걸 오늘 깨달았습니다.”

소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했다.

포권을 취하는 손에 아직 떨림이 남았다.

혈도에 남은 충격이 이제야 조금씩 풀리고 있는 것이다.

‘화 누나의 남편은 대단한 사람이었어.’

직접 무공 수련을 하면서 발로 밟아 만든 이 연무장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땅바닥에는 남아 있는 수많은 발자국들은, 어딜 봐도 매일같이 이어진 단련의 흔적이다.

백연은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르고도 끝없이 수련을 계속하는 무인이라는 뜻이다.

그런 무인이, 소호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완성된 무공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단언컨대 은자촌을 나와서 본 무인들 중 최고의 실력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나야말로 세간에 떠도는 천무공자에 대한 칭송이 한 치도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겠구나.”

백연은 마주 포권을 취하여 소호의 예를 받아 주었다.

그러고는 마음을 정한 듯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공자는 강하다. 재능 넘치는 무인이 시작한 일이니 천무련도 더욱 커질 테지. 그러니 내가 각 파의 장문인들께도 말해 두마. 천무련이라는 곳을 잠시 두고 보자고.”

“그 말씀은……?”

“하지만 하나의 단체를 이끄는 것은 너 혼자만이 강하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다. 좋은 참모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백연은 섭주해에게 한 번 눈길을 준 뒤 명진에게 물었다.

“명진. 어떻게 생각해? 나는 천무련이 우리와 뜻이 같다면…… 힘을 합쳐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섣불리 대답할 부분은 아니군요. 하지만 맹주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명진 도장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백연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렇다는군. 그렇다면 무림맹주의 자격으로 말하도록 하지. 천무공자 장소호.”

백연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던가?

무림맹주의 이름을 내세운 백연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예. 맹주님.”

“천무련보다는 천무공자 한 사람만을 보고 말하도록 하지. 우리 무림맹과 뜻을 함께하여 무림 강호가 왕진 태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힘써 주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호는 빙긋 웃으며 그리 대답했고, 백연은 무림맹주로서의 위엄을 버린 후 다시 친근한 농민 같은 분위기로 돌아왔다.

“좋아. 그러면 천천히 차나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할까?”

“예. 좋습니다.”

소호는 정자를 향해 걸어가는 백연을 뒤따라갔다.

백연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 아이는 폐관이 끝나면 천무련으로 보내야겠어. 자세한 건 두 사람이 서로 친해진 뒤에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예? 천무련으로 보내신다고요?”

“그래. 어차피 서로 알아야 할 사이니까. 폐관을 막 마친 친구가 뭘 알겠어?”

“으음, 어떤 친구일지 궁금하네요. 이름이 뭐죠?”

“미안하지만 말해 줄 수가 없다, 소호야.”

“예?”

“비밀이야. 미리 알면 재미가 없겠지?”

백연은 조용히 웃을 뿐 다시 한 번 물어봐도 알려 주지 않았다.

소호는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이름을 모르면 나중에 만났을 때 어떻게 알아봐요?”

“그 친구가 때가 되면 말하겠지?”

“도찰원(都察院: 명나라 감찰기관) 같은 거예요? 저희가 일 잘 하나 감시하려고?”

“허헛, 그거 좋네.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해 봐. 종종 암행어사를 보낼 테니.”

화기애애하게 웃는 사이로 시국을 좌지우지할 만한 중요한 내용이 오갔다.

“그래서, 무림맹은 언제 봉기할 생각이에요?”

“때가 되면. 달이 차면 기울 듯이 왕진 태감이 힘으로 평정한 무림 천하는 오래가지 못할 거다.”

“그래도 제가 보기엔 그 달이 지기까진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허허,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네가 나타난 게 무림의 홍복(洪福)일지도 모르겠어.”

“아뇨, 오늘 보니까. 맹주님이 나섰으면 도철이든 도올이든 다 쓰러뜨릴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야 무림맹이 황실에 반기를 든 거겠지.”

“그런가요?”

“화산의 매화신검께서 도철보다 약해서 돌아가신 게 아니듯. 지금은 때가 아닐 뿐이야.”

다 식어서 차가워진 차를 마시면서도, 그들의 대화는 그칠 줄을 몰랐다.

“화 누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내고 있단다. 지금은 나도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다만.”

“왜 화 누나는 여기서 안 지내요?”

“나를 대신해서 가문에서 할 일이 많거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명진 도장과 섭주해가 차를 다시 한 번 끓여 온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곳에 무림맹주와 천무공자는 없었다.

백연과 소호.

풍운객잔을 계기로 이어진 인연이 꽃을 피우는 순간이었다.

***

“떠났네요.”

백연과 명진은 무림맹 현판 앞에 나란히 서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마차는 덜컹거리는 산길을 묵묵히 내려가고 있었다.

백연은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하면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크흠!”

명진은 헛기침을 하여 백연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고 가라고 권했는데 거절해서 걱정입니다. 저 속도라면 근처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어두워질 텐데…….”

“…….”

“사숙?”

한참을 고민하던 백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명진. 소호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뛰어난 청년입니다. 지금껏 보아 온 어떠한 후기지수들보다도 뛰어나군요. 조금, 무서울 정도로.”

“무서울 정도로…….”

백연은 명진의 말을 입으로 되뇐 후 헛웃음을 지었다.

“정확한 표현이구나.”

“태극혜검을 운용할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요. 그거,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그런 것 같더군.”

백연은 허공에서 손목을 비스듬히 바깥쪽으로 비틀었다.

“내가 쓰는 태극혜검은 사부님께 배웠던 것과는 조금 달라. 최근의 깨달음을 가미해서 힘의 흐름을 조금 바꾸었지. 그런데 소호는 그것마저 똑같이 따라했어. 손목에서 삼 푼의 힘을 뺄 때는 정말 놀랍더군. 미리 배웠던 무공이 아니라, 내 움직임을 보고 따라했다는 증거이지.”

“역시……!”

명진은 감탄했으나, 낯빛은 어두웠다.

“예. 저 나이에 사숙과 맞상대를 할 수 있는 무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

“사숙?”

백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 친구, 최선을 다한 게 아니야.”

“예?”

명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여력이 있었다는 뜻입니까?”

“숨겨진 힘이 있더군. 무공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만약 그렇다면…….”

명진은 목이 갈라지는 듯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그야말로 무(武)에 있어서는 문일지십의 인재로군요. 헌데 왜 일까요? 저는 조금…….”

“불안하다?”

명진이 허를 찔린 듯이 일순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조금 불안했습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아직 앞길이 창창한 청년에게 할 말은 아니었군요.”

차분하게 도호를 외는 명진은 스스로 불온했던 마음을 깨닫고 반성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중도(中道)와 조화를 생각하는 도사다운 자세다.

백연은 명진의 그런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너는 무당의 도사야. 명진.”

“예?”

“명진의 걱정은 당연한 거야. 나도 그런 감정을 똑같이 느꼈으니까.”

“사숙도 그리 느꼈단 말입니까……?”

“벌써 이십 년 전 일이군. 명진은 무림맹의 일원으로서 북천맹의 싸움에 나갔던 적이 있었지?”

명진은 깜짝 놀란 듯한 반응이었다.

설마 그때의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오래전의 일이군요. 분명히 그리했지요.”

“소림, 화산의 기재들과 모용세가의 지다화와 함께 여행을 했었잖아? 그때도 그랬었지. 그들은 모두 무림맹의 이름으로 북천맹을 치기 위해 준비된 젊은 인재들이었어. 그렇지?”

“그랬……지요.”

명진은 과거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부족하고 미욱했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린 듯 보였다.

“많이 부족했습니다. 정저지와(井底之蛙)가 따로 없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지요.”

“그랬어?”

“후에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누구나 어릴 때는 실수를 하지. 다만 지금은 그 실수를 깨닫고 단점을 고쳤으니 명진은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야.”

“무량수불.”

백연은 명진이 쑥스러워하면서도 당황하는 것을 보며 잔잔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만, 그때도 무림맹은 북천맹을 우습게 보는 오판을 했고, 결국 무림맹의 젊은이들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인물들이 북천의 난을 제압했어.”

“무량수불.”

조금 전과는 정반대의 감정이 담긴 도호가 흘러나왔다.

“무쌍귀……. 그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사숙.”

“그래. 그분을 말함이야.”

천하에 짝이 없는 무쌍한 무인. 장기린.

무림 강호에서는 잊혀 가는 이름이지만, 그래도 북천의 난을 기억하는 많은 무림 명숙들은 절대로 그 이름을 잊을 수 없었다.

워낙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무림 강호의 질서를 헤집어 놓고,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 준 북천맹의 괴수들을 파죽지세로 돌파해 가던 불세출의 신성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사숙께선, 작금의 상황을 그때와 같다고 보시는 겁니까?”

“맞아.”

백연은 저 멀리, 아직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은 마차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라지만, 왠지 그때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우리는 적들을 과소평가했고 준비는 미흡했으며, 정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른 사람일지도 몰라.”

백연의 두 눈엔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북천의 난을 겪고, 그 후에도 온갖 고난과 전투를 겪어 온 백연이다.

명진은 그 말에 크게 반박하지 못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의 침묵 속에서, 무림맹을 방문했던 소호의 마차는 그렇게 천무련으로 돌아갔다.

***

삼산현 은자촌.

한 사내가 풍운객잔의 주렴을 젖히며 들어왔다.

그의 겉모습은 특이했다.

천이 다 찢어지고 헤진 남루한 복색을 하고 있었으나, 떡 벌어진 어깨와 굵은 팔다리는 그런 복색으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가죽 검집과 잔뜩 독이 오른 살기 가득한 눈빛 또한 비범했다.

숨기려 할수록 눈에 띄는 금은보화의 광채처럼, 오히려 그의 타고난 무골(武骨)이 강조되어 보였다.

“손님?”

인기척에 놀라 주방에서 나온 강운찬은 비범한 사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가 객잔에 소면을 먹으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크흠!”

그럼에도 모르는 척 물어야 하는 게 풍운객잔 숙수로서의 사명이다.

“소면을 드릴까요? 차를 드릴까요?”

“이곳에…….”

사내는 쥐어짜듯 갈라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장기린이라는 자가 있나?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손님.”

강운찬은 그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부드럽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육모담.”

비범한 사내.

화산의 최후의 후계자.

육모담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요구했다.

“육모담이 왔다고. 그자에게 전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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