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89화 (418/686)

12권 14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4)

장기린에게 있어 육모담이라는 이름은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화산파의 대제자.

재능은 있으나 주변에서 너무 칭찬만 해 주니 오만함에 빠진 인물.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듯, 그 오만과 과도한 열정으로 언제나 장기린에게 싸울 듯이 덤벼들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게 벌써 이십 년 전인가.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군.’

장기린은 추억에 젖어들었다.

휘연이 중태에 빠지고 장기린이 분노에 빠졌던 때였다.

오로지 텐챠이와 북천맹을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시절.

지다화라 불리던 모용세가의 처자와 각 무림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만났던 기억이다.

‘시간이 꽤나 지났는데, 그때의 오만했던 성정은 고쳐졌을까?’

악연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장기린은 조금 호기심이 생겨났다.

“지금 그가 객잔에 와 있나?”

“예. 형님. 저기……. 없다고 할 걸 그랬나요?”

“아냐.”

장기린은 강운찬이 눈치가 참 빠른 친구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가 육모담을 안 좋아하는 기색을 운찬은 대번에 알아챈 것이다.

“괜찮다. 한번 만나 보는 건 나쁘지 않겠지.”

장기린은 깎고 있던 감자를 다시 잘박한 물속에 던져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당신, 많이 변했군……!”

육모담이 장기린과 마주치자마자 내뱉은 말이다.

떨리는 입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뜬 눈이 그의 감정을 짐작케 한다.

“허.”

장기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은 안 변한다더니.

이십 년이 지나도 얼굴을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대뜸 지적처럼 말을 내뱉는 것은 과거와 똑같았다.

“그런가. 당신은 하나도 안 변했군.”

“나는……. 나도, 많이 변했다.”

육모담은 거칠어 보이는 자신의 뺨을 두꺼운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 살기는 어떻게 없앴지? 짐승같이 날이 서 있던 눈빛은 또 어쨌고? 이제는 정말……”

“평범해 보인다고?”

장기린은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닐 테지?”

“……그건 아니지.”

“과거의 인연을 찾기에 나와 보았으나, 자네의 두 눈은 과거를 보지 않고 있군. 미래에 대한 집착은 조급함을 낳는 법이야.”

장기린은 묵묵히 육모담을 볼 뿐이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존재감이 사위를 짓눌렀다.

막강한 무력.

천하를 바라보는 무공에 이제는 하늘의 뜻을 엿보는 그릇까지 갖췄다.

그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을 뿐인데도 이 정도다.

진심으로 전투를 하려 할 때 얼마나 막강한 기세를 뿜을지.

육모담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본론을 말하게. 우리의 대화는 그다음에 가능할 것 같군.”

육모담은 잠시 말을 잃고 장기린에게 압도되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지만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으음……!”

천천히 숨을 가다듬은 육모담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변했군. 정말로 달라졌어……! 그렇다면 오히려 말을 하기 쉽겠군.”

이십 년의 시간 동안 장기린이 반선(半仙)이 되었다면, 육모담은 지옥의 아귀(餓鬼)가 되었다.

이리처럼 섬뜩한 눈빛.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 사나운 말투로 육모담은 두 개의 이름을 꺼냈다.

“이태산과 태성천. 그 두 사람이 이곳으로 왔다고 들었는데.”

장기린은 미간을 좁혔다.

예상 못했던 이름이 두 개나 튀어나온 탓이다.

‘이미 다 알고 왔군.’

두 사람이 조서인과 함께 은자촌에 온 것을 알고 있지 않다면 저런 질문은 나올 수 없다.

육모담의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자들이 집혼기라는 걸 가지고 있다. 우린 그게 필요해.”

장기린은 한숨을 내뱉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집혼기……. 집혼기라……. 그게 뭔지는 알고 있나?”

“무인을 한 단계 강하게 만들어 주는 물건.”

육모담의 눈에서 귀기가 번뜩였다.

“궁기와 도철. 그 이름을 알고 있나?”

“들어 본 적 있다.”

“나는 그 둘의 이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다.”

“왜 그렇지?”

“그들이 나의 위대한 태사부님을 죽였으니까. 무인으로서는 매화신검의 발끝도 못 쫓아갈 버러지 같은 것들이 고작 둘이서 그분을 쓰러뜨렸다. 나는 거기에 뭔가 비밀이 있을 거라고 이미 알고 있었지. 그 버러지들이 감히 매화신검을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 비결이 집혼기라는 건가?”

“그렇다. 그 사실 하나를 알아내기 위 우리 백검회의 동지가 스무 명이나 죽었어.”

으득―.

육모담은 이를 악물었다.

“신수……비처라는 곳이었지. 다행히 누군가가 이미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덕분에 우리가 잠입하기는 수월했다. 천무공자라고 불리는 무림의 신성인데. 혹시 알고 있나?”

“……알고 있다.”

또다시 튀어나온 의외의 이름이다.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장기린은 난감해져서 그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 여기까지 소식이 날아들 정도로 유명해졌군. 아무튼 천무공자 덕분에 우린 수월하게 신수비처에 잠입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우린……. 지옥을 보았다.”

육모담은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는 듯이 눈에 살기를 띄었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을 가두고, 가축처럼 집혼기에 먹이는…….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냐. 왕진은 그런 놈이다. 인륜을 저버리고 천도를 저버린 놈이야!”

육모담은 너무 흥분해서 가빠졌던 호흡을 애써 가라앉혔다.

“천무공자와의 싸움으로 피바다가 된 그곳에서……. 우린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 왕진의 사흉이 강한 이유는 집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렇다면 우리도 집혼기를 가지고 강해질 것이다. 그러면 왕진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육모담.”

“뭐지?”

“힘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집혼기를 갖게 되더라도, 단지 그걸 갖고 있다고 해서 무작정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역시 집혼기에 대해 잘 알고 있군?”

“…….”

“상관없다. 네가 집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우리도 안다. 피로 물든 길이겠지만……. 백검회에는 그걸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도 없지.”

육모담은 왼손을 검집 위에 살짝 올렸다.

“우리는 그 집혼기가 꼭 필요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왕진을 타도할 수 있다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육모담…….”

장기린은 광기까지 느껴질 정도의 그의 집착이 마치 불꽃처럼 느껴졌다.

뜨거운 불꽃이다.

활활 타오르다 못해, 자신의 피와 살까지 태워 버릴 불꽃이었다.

‘내가 만약 가족을 잃는다면? 은자촌을 잃는다면? 나도 이런 복수귀가 될 것인가?’

실제로 비슷한 경험도 해 보았기에 장기린은 육모담의 집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허나 그렇기에 더더욱, 그를 응원할 수는 없었다.

“너는 실수를 하고 있다.”

“어떤 실수를 말함이지?”

육모담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심산유곡에 들어가 화산의 무공을 닦으라고? 유득청산재, 불파몰시소(留得靑山在, 不怕沒柴燒: 청산이 존재하는 한 땔감은 걱정할 필요 없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 내가 그런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아나?”

“기다릴 수 없다는 건가? 집혼기를 갖게 되면 네 삶은 비틀어질 거다.”

“이미 내 삶은 지옥이야.”

장기린은 광기가 이글거리는 육모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나아가 풍운객잔의 주렴을 젖혔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이들을 데리고 왔나?”

풍운객잔의 입구엔 백여 명의 인물들이 새하얀 가면을 쓴 채 대열을 형성하고 있었다.

기괴한 모습이다.

마치 이매망량(魑魅魍魎)들이 모여든 것 같았다.

한 명, 한 명에게서 잘 절제된 살기가 흘러나온다. 그들 모두가 눈에 살기를 띄고 있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달려온 자들.

다 같이 똑같은 목표로 극한까지 자신을 단련해 온 무인들이었다.

수많은 군인들을 지휘해 본 적이 있는 장기린이기에 알 수 있었다.

저들의 신(神)은 육모담이다.

육모담이 죽으라는 한 마디만 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는 광자들이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저렇게까지 병력을 키워 놓고, 거기다 나와 싸움도 불사하겠다는 것인가? 기껏 키워 놓은 병력들을 다 잃어도 좋다는 건가?’

장기린은 만약 싸움을 건다면, 엄중히 징벌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육모담을 돌아보았다.

“위협을 한다고 해서 내가 마음을……?”

천하의 장기린이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한 채 굳어졌다.

쿵.

육모담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결연한 얼굴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로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부탁하겠다! 아니, 간절히 부탁드리겠소! 장 공! 부디 우리에게 집혼기를 넘겨주시오!”

쿵. 쿵.

연이어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의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지!”

장기린은 그런 육모담의 어깨를 붙잡고 뜯어말렸다.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이다?

아니다.

장기린은 적어도 연기를 하는 것과 진심을 담은 행동은 구분할 수 있었다.

그게 목숨을 거는 일이라면 더더욱 알 수 있다.

육모담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각오로 바닥에 머리를 내리쳤다.

“막무가내로군. 그런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은가?”

“내 목숨을 원한다면 내 목숨을 주겠소.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마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리다. 그러니 부디, 우리 백검회에! 집혼기를 주시오!”

이마에서 시작된 피가 콧등을 타고 내려와 육모담의 턱과 가슴팍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이런……!”

장기린은 탄식했다.

“집혼기가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소. 허나 그게 있으면 왕진을 물어뜯을 수 있게 되겠지.”

한계에 몰린 자.

백검회를 이끄는 자로서 막다른 길에 몰려 절박한 자가 지금 장기린의 눈앞에 있었다.

“정정하겠다.”

장기린은 침잠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바뀌었군. 그것도 아주 많이.”

깊게 내쉬는 한숨 소리가 장기린의 고뇌를 드러냈다.

“미리 말해 두겠다. 집혼기는 나의 것이 아니다. 풍운객잔에 온 손님 두 사람의 것이며, 난 그걸 빼앗아서 너에게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

“그렇지만.”

장기린은 다시 바닥에 머리를 박으려는 육모담을 말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 친구들에게 정중하게 요청하고, 그들이 그걸 수긍해서 준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지.”

“……!”

육모담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절망이 환희로.

미래에 대한 벅찬 희망으로 바뀌어 간다.

“으음…….”

반면에 장기린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어떻게 할 거지? 지금 만나볼 건가?”

“그, 그렇게 하겠소! 지금 당장 만나 뵙겠소!”

텅.

장기린은 육모담의 이마를 손바닥 장저(掌低)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만으로도 혈도가 눌려 지혈이 된 이마를 육모담이 놀란 얼굴로 매만졌다.

“가지.”

장기린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안채로 들어갔다. 무릎을 꿇고 있던 육모담이 황급히 일어나 그런 장기린의 뒤를 따랐다.

***

“은인을 뵙습니다.”

흑신의 우문환의 의술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두 청년은 장기린을 보자마자 깊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덩치가 큰 무골(武骨)이 이태산이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오른쪽 손이 팔목까지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사람이 태성천이다.

얼마 전에 눈을 뜬 두 사람은 서서히 기력을 회복해 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몸을 움직이려 노력하며, 절뚝거리면서도 빗자루로 마당을 쓸던 와중이었다.

“난 은인이 아니야. 감사를 표하고 싶다면 여기까지 자네들을 데려온 서인이나 의술을 펼친 우 어르신께 해야지.”

“서인과 우 신의께서는 물론 은인이시고, 저희를 이 마을에 받아 주신 장 대인께서도 저희의 은인이십니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은원이 확실한 청년들이었다.

장기린을 대하는 태도에서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가 묻어났다.

“오늘은 자네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자가 있어 찾아왔네.”

“저희를 찾아왔단 말입니까?”

이태산은 의아해하며 장기린의 곁에 서 있는 육모담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육모담을 알아본 이태산의 눈빛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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