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90화 (419/686)

12권 15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5)

“오매검협……?”

이태산은 육모담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는 사람인가?”

장기린이 되묻자 이태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멀리서 본 적이 있습니다. 무산학관 개관식 때였는데, 그때는 무산학관이 구파일방과 사이가 틀어지기 전이어서……. 그런데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이야.”

무산학관이라는 새로운 학관의 개관 소식에 구파일방이 모두 참여했었던 때가 있었다.

황실의 허가를 받아 지어진 대대적인 무림 학관이며, 그때는 무산학관에서 구파일방에 대대적으로 초대장도 보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구파일방이 바로 그다음 해에 왕진과 흑시군들에 의해 고난을 겪게 되다니 사람 일은 앞날을 알 수 없다.

“오매검협이라니!”

철곤과 권법을 쓰는 이태산보다는 검술을 쓰는 태성천의 반응이 더욱 격렬했다.

“살아 있었습니까? 그 일……이 있고 나서 세간에선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놀랍군요!”

육모담은 명실상부 구파일방에서 손꼽히는 검사였다.

검의 길을 가는 검사로서, 화산파의 대제자였던 사람을 모른다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화산혈사 때는 그 누구보다도 큰 활약을 보여 명성을 떨치지 않았던가.

“반갑소. 육모담……이오.”

육모담은 신기해하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난감해 보였다.

구파일방의 필두로 손꼽히던 화산파가 멸문지화나 다름없는 화를 당한 게 왕진 때문.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들은 그런 왕진이 세운 학관에서 교육받고, 흑시군에 들어가기까지 했던 사람들이다.

마음 편히 살갑게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으음…….”

육모담은 장기린의 눈치를 힐끗 살핀 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오늘 두 공자……를 찾은 이유가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호의적으로 되묻는 태성천에게 육모담은 굳은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정중하게 부탁드리겠소. 왕진에게 받은 집혼기를 내게 넘겨주셨으면 하오.”

“집혼기를……?”

태성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뿐인가?

이태산은 미간을 좁히며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육모담을 살폈다.

“집혼기는 왜 찾으시는 겁니까?”

“…….”

“육 대협?”

육모담은 잠시 망설였으나, 장기린의 말대로 그는 ‘정중한 부탁’으로 집혼기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친걸음이라는 듯 솔직하게 대답했다.

“왕진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오.”

“……!”

“화산파는 내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오. 그런데 왕진과 흑시군에게 그곳을 잃었소. 무인이라면 가족의 복수는 해야 하는 게 아니겠소?”

씹어뱉듯 말하는 목소리에 짙은 회한과 원망이 담겨 있었다.

태성천은 난감한 듯 안색을 찌푸렸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집혼기는 그리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육모담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안타깝고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실 사례감 태감에게 받은 물건을 함부로 줄 수 있겠는가?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이던 그가 안 된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가져가십시오.”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 하나가 육모담에게로 내밀어졌다.

“태산?”

태성천이 깜짝 놀라 돌아보는데, 이태산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정말……이오?”

육모담조차 놀라서 이태산에게 되묻는다. 이렇게 쉽게 넘겨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육 대협께서는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저희는 왕진 태감에게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태산!”

“사실이잖나. 인정해야 해. 그 괴물을 잡으라고 우리를 보내다니. 그건 죽으라는 소리였다.”

“깊은…… 뜻이 있었을지도 몰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진중하게 쳐다보는 이태산의 눈빛을 버티지 못하고 태성천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만약 정말로 우리의 힘만으로 도올을 잡으라고 한 거였다면 더 많은 안배를 해 두었겠지. 왕진 태감이 어디 그리 어설프게 일을 처리하던 사람인가? 아니야. 우린 도올의 힘을 깎기 위해 보내진 화살받이였다.”

현무방의 방장 시절부터 무산학관의 규율을 담당하던 이태산의 식견은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관절이 부서지고 뒤틀려서 지금은 제대로 힘도 주지 못하는 다리다.

현무방의 방장으로 시작해서 철탑패웅(鐵塔覇雄)이라는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건만.

이런 다리로 어찌 패웅같이 사나운 동작을 취할 수 있을까.

이런 다리로 어떻게 육중한 철곤을 휘두를 수 있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포기할 것이다.

내 무운(武運)은 여기까지였다며, 손에서 무기를 내려놓을 만한 상황이었다.

“나는 이 마을을 보면서 깨달았다. 우린 너무 조급했어. 대체 무엇을 위해 그동안 달려왔지?”

이태산은 어딘가 도를 깨달은 사람처럼 허허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다시 한 번 집혼기를 내밀자, 육모담은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들었다.

“이게…… 집혼기…….”

이태산의 손에서 육모담의 손으로 집혼기가 넘어가는 순간, 이태산은 찌릿한 아픔을 느끼고 몸을 휘청거렸다.

“태산?”

이태산은 부축하려는 태성천의 손을 거절했다.

쿵―.

이태산은 마치 진각을 밟듯이 땅을 강하게 밟으며 균형을 잡았다. 집혼기를 건네줌으로써 생기는 탈력감을 견디는 것이다.

“으음.”

그는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했음에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집혼기의 기운을 잃었으니 약해졌는가?

아니다.

이태산은 그 전보다 더욱 강직하고 곧은 눈빛으로 육모담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잃고도 저 높은 산꼭대기를 바라보는 무인이다.

오히려 모든 것을 버렸기에,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정강(正剛)한 사내가 이곳에 있다.

“육 대협, 한 가지 묻겠습니다. 백검회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어떻게…… 알았소?”

“지금까지 왕진 태감에게 원한을 드러낸 집단은 백검회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청성과 화산의 무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습니다. 대체 어디서 그런 무공들을 얻었나 궁금했는데, 만약 육 대협이 살아 있다면 많은 의문이 해결됩니다.”

“그 생각이 맞을 것이오.”

육모담은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백검회의 일검이오.”

“아……!”

백개의 검이 있다고 해서 백검회.

그중 첫 번째 검이 화산의 오매검협 육모담이었다는 소리다.

많은 의문이 풀렸다는 듯 이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가……!”

옆에서 태성천은 경악에 경악을 거듭하다가 입을 꾹 다문 채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는 이내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육 대협, 이것도 가져가십시오.”

태성천은 목에 걸고 있던 자신의 집혼기도 육모담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이 친구가 미련을 버렸듯, 저도 마음을 비우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저희를 찾아 제일 처음 이곳까지 온 사람이 흑시군이 아니라 육 대협이라는 건…….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군요.”

“정말로 괜찮겠소?”

“팔 병신이 된 검객보다는 백검회가 더 잘 쓸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태산과 저는 그 집혼기가 있음에도 사흉에게는 대적하기 어려웠습니다.”

태성천은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가져가라는 듯 왼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고맙소. 사양하지 않겠소.”

육모담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태성천으로부터 다른 한 개의 집혼기도 건네받았다.

“아……!”

태성천 또한 육모담에게 집혼기를 넘겨준 뒤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재빨리 균형을 잡은 덕분에 태성천은 많이 흔들리지 않았다.

“두 분 공자의 도움을 잊지 않겠소. 나는…… 꼭 왕진에게 복수를 할 것이오.”

포권을 취하여 예를 표한 육모담의 머리는 한참 동안이나 올라오질 못했다.

마주 예를 표하던 이태산과 태성천이 난감해할 때쯤에야 육모담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고맙소.”

온갖 격정에 휩싸인 육모담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

“소면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지?”

장기린은 권유했으나 육모담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권유해 주어서 고맙소. 갈 길이 바빠서. 지금 마음으로는 산해진미를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오.”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던 집혼기를 갖게 되었으니 단 한 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풍운객잔의 주렴 밖을 힐끔거리는 그는 마치 물가에 어린아이를 둔 부모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래. 그럼 작별이군.”

“다음에는 꼭 소면을 먹으러 오도록 하겠소.”

장기린은 잠시 멈칫했다가 답했다.

“그래. 기대하지.”

육모담은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장기린은 그를 말리려 했으나 육모담은 막무가내였다.

쿵.

육모담은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소리쳤다.

“장 공! 이 은혜! 백검회와 나는 절대로 잊지 않겠소! 은혜를 잊지 않고 그대의 우마(牛馬)가 되어 도울 것이오!”

“……과례는 비례라더니.”

장기린은 부담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손을 내저었다.

“난 아무 일도 한 게 없으며, 한 게 있다고 해도 이미 잊었으니 그만하게. 앞으로 자네가 원하던 걸 이루길 바라겠어.”

장기린은 육모담이 밖에 있던 백검회의 무인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가는 모습을 묵묵히 배웅했다.

잠시 후, 객잔 안에서 헐레벌떡 뛰쳐나온 강운찬이 장기린의 곁으로 다가와 소리쳤다.

“형님, 형님!”

“무슨 일이야?”

“마구간에……! 상자가 있어서 열어 봤더니 웬 금화가 수북이……!”

장기린은 탄식했다.

“우마가 되어 돕겠다더니. 그런 의미였나?”

“어떻게 할까요? 형님. 가서 돌려줄까요?”

금화를 돌려주자고 말하면서도 아쉬움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은자촌에 살면서 운찬의 금전감각도 많이 변한 것이다.

‘저 자존심 강한 자가 받을 리가 없지.’

장기린은 이미 개미만큼이나 멀어진 육모담과 백검회의 무리들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운찬.”

“예?”

“제단(祭壇) 같은 거. 만들 줄 아나?”

“제단……이요? 관제묘에 있는 그런 사당 말씀이세요?”

“그보다는 작은. 그저 객잔 옆에 하나 만들 수 있는 정도면 좋아. 명패 같은 거 세워 둘 수 있는 제단이면 족해.”

“예. 그 정도면 대석 형님이랑 같이 만들면 금방이죠.”

“그래. 그럼 부탁하지.”

“그런데 누굴 제단에 모시려고……?”

장기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하늘을 보며 그 뜻을 아울러 짐작해 볼 뿐이었다.

***

“정말로 성공했군.”

풍운객잔과 은자촌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육모담은 길목에 서 있던 사내와 마주쳤다.

화창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검은색 면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는 육모담을 만나자 면포를 걷어내고 본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회주. 여기서 기다렸나?”

쿵.

육모담을 뒤따르던 백여 명의 백검회 무인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했다.

백검회의 절대적인 무력을 상징하는 자가 육모담이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백검회의 정신을 상징하는 자였다.

왕진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을 한 명, 한 명 직접 찾아다니며 백검회로 포섭한 사람.

수많은 암중 계획을 실행하였으나, 동창을 농락하듯 단 한 번도 꼬리를 밟힌 적이 없는 치밀하고 은밀한 자.

“고생했네. 정말로 성공할 줄이야. 나는 그 작은 객잔과 화전촌을 다 불태워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지.”

“그런 짓을 했다간 백검회는 끝이다, 청광.”

백검회의 회주.

한때 청성파의 둘째 제자였던 청광은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금화는?”

“두고 왔다.”

“으음.”

청광은 아깝다는 듯이 탄식하며 자신의 꺼끌꺼끌한 턱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 돈이면 우리 분파를 하나 더 지을 수 있었을 텐데. 정말로 잘한 일인가?”

“물론.”

육모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으나 청광은 납득하지 못했다.

“예전에 무명을 날렸다고 한들 지금은 다 쓰러져 가는 객잔의 주인일 뿐이지 않나? 자네도 있으니 죽이고 빼앗아도 되는 일 아니었나?”

“모르는 소리.”

육모담의 두 눈에 공포에 가까운 경외심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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