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6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6)
“만부부당이라는 말이 그보다 잘 어울리는 자는 없다. 단순히 무공만 뛰어나도 위협적일 텐데 그자는 만전의 경험까지 갖췄지. 싸우면 필패다. 전투를 원한다면 백검회의 전멸을 각오해야 해.”
“허어. 그래 봤자 화전촌에 있는 작은 객잔 하나 아닌가? 설마 그러려고?”
“내가 농담하는 것 같나?”
육모담은 다른 백검회의 무인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청광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자네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군. 정말 그 정도인가?”
“그럴 만한 존재다. 괜히 별명이 무쌍귀인 게 아니야.”
“천하에 짝이 없는 괴물이라…….”
“심지어 이번에 보니 예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천방지축 살기를 뿜어내던 야인이 이제는 사람의 도리를 얻어 무신이 되었어.”
“허어.”
“자네가 이해하기 쉽게 말해 줄까? 무림오존의 아래가 아니다, 그자는.”
“……!”
청광은 육모담의 말을 다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백검회 일검의 말을 무시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아까워. 조직을 이끌어 가는 데 돈은 조금이라도 많을수록 좋거든.”
“돈은 또 벌면 된다. 하지만 목숨은 하나뿐이야. 저자를 상대할 때는 티끌만 한 은원도 남겨서는 안 돼. 이 정도로 끝났다면 오히려 싸게 먹힌 거라 생각해라.”
“알았네, 알았어. 포기하지. 더는 엮이지 않겠어.”
“꼭 그렇게 해라.”
청광은 항복했다는 표시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풍운객잔과 은자촌이 있는 방향을 보며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그에게선 위험한 눈빛이 번뜩였다.
“어쨌거나. 우리가 바라던 것은 얻었나? 그들이 순순히 주던가?”
“줬지……. 너무나 순순히.”
“허어, 신기하군. 그래서 몇 개를 얻었는가?”
“두 개.”
“두 개?”
청광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하늘이 돕는구나! 진인사대천명이라더니! 우리를 하늘이 돕고 있어! 하핫! 잘 되었구나! 잘 되었어!”
청광이 박수까지 치면서 박장대소를 하니, 주변에서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던 백검회의 무인들도 안심하며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청광은 무인들의 그런 반응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게 무공보다 더 귀중한 청광의 능력이다
그는 필요할 때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내비침으로써 수하들의 사기를 드높일 줄을 알았다.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왕진이 모든 기술과 힘을 끌어모아 만든 보물을 두 개나 얻다니!”
“…….”
“자네도 고생했네. 자네가 그토록 두렵다고 한 자의 본거지로 직접 들어가서 그만한 귀물을 받아 왔으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상상이 되는군. 수고했네.”
청광은 육모담의 이마에서 피가 굳어 가는 상처를 힐끗 바라봤지만, 그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남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육모담 또한 그 점을 굳이 공치사를 하기 위해 꺼내지 않았다.
“알아주니 고맙군. 위로가 된다.”
“당연한 일일세. 자, 그럼 이제 물어야겠군. 그 집혼기 두 개는 어떻게 쓰겠나?”
“하나는 내가, 하나는 자네의 결정에 맡기도록 하지.”
“나의 결정이라…….”
청광은 미리 이럴 경우를 생각했었는지 그리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청계 사제에게 주도록 하겠네. 나를 따라와 준 사형제들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재를 지닌 친구일세. 그야말로 문일지십의 인재이지. 분명히 우릴 실망시키지 않을 걸세.”
“자네가 직접 쓰지 않고?”
“나와는 맞지 않아. 집혼기를 제대로 쓰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난 관리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싸움터를 전전할 여력이 없네.”
하나의 집단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단순히 강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돈 문제며, 식사 문제며, 수하들의 신변 문제, 온갖 세력들과 얽혀 있는 수 싸움까지.
그 모든 것을 잘 관리해서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면 그야말로 일각의 시간도 아깝다.
맞는 말이다.
트집을 잡을 건더기조차 없는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육모담은 거기서 약간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청광은 육모담 못지않게 강해지기 위한 열정이 가득한 사내인 까닭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들이 신수비처에서 찾은 사람의 말에 따르면, 집혼기를 통해 강해진 사람에게는 큰 약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집혼기에 가둬진 혼백들의 영향으로 성정이 폭급해진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특정한 주술적 수단으로 힘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이제 천하에 단 세 사람뿐.
신수비처에서 찾은 사내와 육모담, 그리고 청광뿐이다.
육모담은 청광의 안색을 힐끔 살핀 뒤 의심의 마음을 버렸다.
청광과 함께 뜻을 맞춰 백검회를 만든 지 어느새 오 년이 넘어갔다.
그럴 리가 없다.
청광이 딴생각을 할 리는 없었다.
“그렇군. 청계라. 재능이 있는 친구였지.”
“그래. 그 친구가 분위기는 좀 어두워도 능력 있는 친굴세. 잘 해낼 거야.”
“그래야지.”
무뚝뚝한 육모담에게 청광은 황급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네 ‘집혼’은 어디에서 어떻게 할 건가? 생각해 둔 건 있나?”
“생각해 봤는데.”
육모담은 잠시 묵묵히 고민하다가 말했다.
“산적들의 산채와 낭인들의 흑점(黑店)을 위주로 모아 볼까 싶군.”
“오오, 좋은 생각이로군!”
청광은 맞장구를 치며 기뻐했다.
“민초들을 괴롭히는 산적 떼와 인육을 취급하는 낭인 놈들을 없애는 일이라……. 좋아. 아주 좋네. 심지어 잘만 이용하면 우리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육모담은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모른다. 나는 집혼에 집중할 테니 나머지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하핫, 걱정 말게. 내가 다 알아서 하도록 하지. 다들 들어라!”
모든 백검회의 무인들이 일제히 청광을 쳐다봤다.
“이번 일의 성공으로 우리는 더욱 강해질 수 있는 발판을 얻었다! 앞으로 우리의 일검은 무신(武神)이 되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다!”
투웅―.
백검회의 무인들이 일제히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강렬한 눈빛들.
진심으로 청광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광신도들의 시선이 육모담에게로 집중되었다.
“하여간 대단하군.”
그들의 시선에 보답하듯,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면서 육모담이 나직하게 말했다.
“장단을 잘 맞춰 주게. 원래 조직을 이끄는 건 힘든 일이야.”
“난 그런 건 모른다. 무공만 수련할 뿐이야.”
“그렇게만 해 주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청광은 육모담의 손을 함께 붙잡아 머리 위로 들어 올렸고, 백검회 무인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백검회의 움직임이 방향을 크게 트는 순간이었다.
***
쿠웅!
은자촌에서 보이는 세 개의 산 중에 하나에서 둔중한 소음이 들려왔다.
풍운객잔의 뒤뜰.
깊은 우물이 하나 있고, 바닥에는 작은 조약돌들이 잔뜩 깔려 있는 바닥에서 감자를 깎던 세 사람이 일제히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봤다.
“영산이군.”
우물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사내.
장기린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아서 마찬가지로 조악한 나무칼을 들고 감자를 깎던 두 청년도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인인가?”
“열심히 하는군. 어떻게 하면 저런 소리가 나는 거지?”
“강기지경에 오르지는 못했으니, 일시적으로 힘을 모아 폭발시키는 종류의 무공이겠지.”
이태산과 태성천이었다.
한 사람은 오른쪽 다리를, 다른 한 사람은 오른팔을 완전히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면서도 장기린을 도와 감자를 깎겠다고 나와 있는 것이다.
“폭혈공 같은?”
“뭐? 그런 사도마공을 사용할 리가 있나? 성천, 너는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뭐 어때, 정파고 사파고가 뭐가 중요해? 강하면 그뿐이지.”
이태산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너는 무산학관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사파의 무인이 되었겠군.”
“무산학관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뭐, 가문의 뜻에 따라 무관시험을 봤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누구든 간에 가장 먼저 만난 강한 사부를 따라 갔겠지.”
“그 사부가 악명 높은 마두라도?”
“검술이 강하면 사부가 누구든 무슨 상관인가? 힘은 어떻게 쓰냐가 중요한 거야. 무공에는 선도 악도 없어. 그건 일단 강해진 다음에 고민할 문제야.”
“익히는 과정에서 사악한 무공도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집혼기를 육 대협께 준 거잖아?”
“그래. 우린 실수했었다.”
“무공의 선악은 없지. 그렇지만 집혼은 잘못되었어.”
이태산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반박할 수가 없군.”
“그래. 그나마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서 천만다행이지.”
“깨달은 건 맞나?”
“뭐야? 당연하지.”
“건네줄 때 망설이던 것 같던데.”
“그건…… 그냥 손이 흔들린 거야.”
장기린은 툭탁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툭 던지듯이 내뱉었다.
“왜 집혼기를 순순히 내줬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구나.”
“아…….”
이태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태성천은 어색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이태산을 가리켰다.
“왜냐고 물으시면……. 저는 그냥 태산이가 버리길래 같이 버린 거라. 잘 모르겠습니다.”
이태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냉랭한 눈빛으로 태성천을 바라봤다.
“촐랑거리는 검사 아니랄까 봐. 빠져나가는 게 미꾸라지 같구나.”
“왜? 나는 네가 버리길래 버린 건데.”
“줏대도 없는 오징어 같은 놈.”
“뭐야?”
이태산은 태성천을 해산물로 칭한 뒤, 올곧은 눈빛으로 장기린을 마주 봤다.
“대인께서 저희를 마을에 받아 주시고 나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이 객잔, 이 마을, 평범한 곳은 아닐 테지요.”
“그렇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다.
무인이라면 풍운객잔과 은자촌에서는 길가에서 풀 뽑는 노인조차 비범하다는 사실쯤은 당연히 눈치챌 테니 말이다.
“그 오만하다고 소문난 오매검협이 대인께는 쩔쩔맬 정도이니, 얼마나 비범한 분일지 짐작이 갑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모르긴 해도 무림 십대고수보다 못하지 않을 분들이 이렇게나 많이 계신데, 우린 어째서 고작 몇 년을 앞서서 강해지기 위해 천도에 어긋나는 일을 해야 하는가? 집혼의 과정은 잘못되었습니다. 그걸 대가로 강해진다고 한들, 지옥의 아귀처럼 서로 잡아먹으려고 싸운 뒤에는 제가 제 자신이 아니게 되겠지요. 제가 도올처럼 변한다면……?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이태산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결국 집착이었지요. 진작 알았어야 할 것을, 이렇게 다리를 하나 잃고 나서야 알았으니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죽음의 위기를 겪은 뒤에는 사람이 변한다고 했던가.
이태산은 이번 일을 겪으면서 깊은 식견을 갖게 된 게 분명했다.
“그런가.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군.”
“예. 피로 얻은 힘은…… 반드시 피로 망하게 될 테지요.”
“…….”
장기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피로 얻은 힘.
장기린의 힘도 그것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하는 만큼 쉬다가 가거라. 평범하게 살아도 좋고 무공을 수련해도 좋다. 우리 풍운객잔과 은자촌에서는 그 누구도 너희를 강제하지 못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장기린은 공손히 일어나서 포권을 취하는 두 사람에게 손을 내저었다.
“감자는 그만 깎아라. 너희까지 깎으면 마을에서 다 못 먹는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본 뒤 웃음을 터뜨렸다.
***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강의 하류.
강남이라고 할 수 있는 남경 인근에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목재 성채가 존재했다.
거대한 통나무가 사람의 시야가 닿는 지평선 끝까지 꽂혀서 거대한 성벽을 이루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평범한 민초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관과 무림에서는 그 의미가 다른 곳이다.
장강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장강용왕 추묵환이 세운 성채.
녹림십팔채.
장강수로십팔채.
그 둘 모두를 아우르는 녹림수로삼십육채의 성지(聖地)가 바로 이곳이었다.
“백경 형님! 큰일 났습니다!”
백경.
이곳 녹림수로삼십육채에서 흰 고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는 단 한 명뿐이다.
장강용왕 추묵환을 대신해 총표파자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부표파자가 바로 흰 고래, 백경이었다.
“무슨 일이냐!”
턱 주변을 무성하게 덮은 수염이 반은 희고 반은 검은 거구의 사내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온 전령을 향해 사납게 소리쳤다.
그는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한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미리 기별을 한 뒤에 알리러 들어오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이었다.
허나, 전령의 외침을 듣자 백경은 화내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교어채가 불바다가 됐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청호채도 습격당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