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7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7)
“뭐야?”
백경은 뱃심에서 우러나오는 중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자라 대가리 같은 새끼야.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어디가 습격당했다고!”
그가 성질을 부리자 커다란 건물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전령으로 들어온 사내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럼에도 사안이 워낙 중대한 터라 꿋꿋이 대답했다.
“교, 교어채. 그리고 청호채……입니다.”
“이 새끼. 거짓말이면 뒤져, 넌.”
“지, 진짜입니다! 교어채와 청호채가 둘 다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인근 수채와 산채에서 보내온 서신들입니다!”
백경은 전령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미는 죽간과 서찰들을 사납게 잡아챘다.
“교어채의 목책이 부서짐. 불길이 치솟음. 봉화가 오름. 십여 척의 소선이 교어채를 빠져나왔으나 탈출하기 전에 몰살…….”
몇 개를 읽던 백경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코에서 콧김 대신에 불이 뿜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백경은 이미 읽은 죽간과 서찰들은 탁자 위에 내던졌다.
나머지 전서들도 눈앞에 가지고와서 정신없이 읽었다.
“불탐…… 몰살……. 후촌(後村)도 몰살……?”
후촌이라는 건 녹림수로삼십육채에만 있는 은어였다.
녹림수로맹에 소속된 수채와 산채들은 일반적인 도적 떼와는 다르다.
그들은 정명한 정파라고 할 수 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이상의 악행은 저지르면 안 되는 엄정한 규율이 있는 무림 문파 같은 곳이다.
장강용왕 추묵환이 그렇게 바꿔 놨다.
그는 녹림수로맹의 형태를 다 갖춰 둔 뒤 맹에 소속되어 있던 모든 사내들을 모아 두고 말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진 것을 다 빼앗지도 말라고.
그저 통행세만 정확히 받아도 살 수 있으니 사람답게 살라고 말이다.
그 덕분에 수채와 산채의 사람들에게는 가족들도 생겼다. 사람답게 살기 시작한 덕분이다.
수채와 산채의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
그곳이 바로 후촌이다.
“어떤 개 후레자식들이 후촌까지 건드냐? 누구냐? 정파야? 그리고 이 전서를 쓴 새끼는 누구야? 이딴 걸 쓰는 동안 도망치는 애들을 한 명이라도 더 안 도와주고 뭐했냐는 말이야!”
콰득!
흥분한 백경의 손에 잡혀 있던 죽간이 우그러지면서 결결이 찢어졌다.
전령은 큰 충격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백경이 무시무시한 탓도 있었지만, 후촌의 몰살이라는 말이 그에게도 큰 충격을 준 탓이다.
“세상에……!”
아무리 산적이나 수적이 미워도 그렇지, 저항하지 않는 여인네나 아이들까지 죽이려는 미친놈들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전령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청호채…… 불탐. 목책이 무너짐. 도주한 자들은 몰살. 후촌도…… 몰살.”
백경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찰들을 내던졌다.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집무실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사람의 머리통만 한 종(鐘)이 하나 놓여 있었다. 백경은 그 종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 자그마한 망치로 거세게 두드렸다.
데엥―! 데엥―! 데엥―!
시끄러운 종소리가 잔잔했던 파도 소리를 지우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경종이 울렸다! 다들 모여라!”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 지더니 건장한 사내들이 몰려들었다.
수로맹에는 뜀박질보다 노 젓는 게 더 편한 자들도 있다.
집무실에서 보이는 포구 근처로 자그마한 소선들이 일제히 몰려든다.
“이 게으른 새끼들아! 왜 이리 느려 터졌어!”
백경이 소리를 지르자 모여든 사내들 중 두 사람이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여기 수로맹의 와룡이 왔습니다, 어르신.”
나이는 서른 중반.
상처가 잔뜩 난 가죽 옷을 입고 있는 사내였다. 사냥꾼 같은 복색이지만, 풀어 놓은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녹림수로삼십육채의 와룡이라 불리는 제갈륜이 바로 그다.
“여기, 녹림의 불 도끼[火斧] 방풍도 왔소. 대체 무슨 일이오?”
중년을 넘은 나이.
백경과 연배가 그리 크게 차이나진 않을 것 같은 사내가 등 뒤에 차고 있는 커다란 쌍날 전부(戰斧)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인사했다.
옆에 서 있는 제갈륜과 비교하면 키는 평범한 편이었는데, 온 몸에 잔뜩 붙은 근육들이 그를 짱돌처럼 단단하고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손등과 팔등에서 꿈틀거리는 힘줄과 잔뜩 성이 난 근육들은 그가 단 하루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였다.
“문제가 생겼다.”
백경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녹림수로맹의 지력(智力)과 무력(武力)을 상징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사내들이 모두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우리 수채와 산채가 습격당했다.”
“아…….”
제갈륜과 방풍.
두 사람은 서로를 힐끗 바라봤다. 난감함 기색이 역력했다.
“크흠, 저기, 어르신. 경종이 울릴 때 이미 그럴 거라 생각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외람된 말씀이지만 우리가 습격당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이번엔 어디입니까?”
“뻔하지! 정파 놈들이겠지!”
방풍이 버럭 소리쳤다.
“괜히 어디서 강호 무림을 책으로 주워들은 무림 초출들이 매번 쳐들어오잖소? 이름도 못 들어 본 작은 문파 출신의 잡놈들도 정파 출신이기만 하면 늘 우리만 조지려 들어.”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다 협약을 맺었는데 말이죠. 저희가 관가와 사이좋게 지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요. 에휴, 평소에 들어가는 돈도 얼마나 많은지. 무림맹이랑도 다 이야기가 되어 있는데 꼭 어설픈 자들이 뭣도 모르고…….”
제갈륜의 말이 길어지려는 것을 백경이 손을 들어 올려 막았다.
“교어채, 청호채. 다 몰살당했다. 둘 다 후촌까지 싹 다 불탔어.”
“예? 후촌까지……?”
“후촌까지. 그것도 동시에.”
백경은 지금도 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숨을 씨근거렸다.
“생존자는……?”
“없단다. 그래도 직접 가서 알아봐야지.”
침묵이 감돌았다.
후촌이라는 곳은 수적이든 산적이든, 사람이면 누구나 건드려선 안 되는 장소였다.
그렇다.
사람이라면.
정말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한들, 여인과 아이까지 죽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쳐 죽일 놈의 호로 새끼들!”
녹림의 불 도끼, 방풍의 입에서 거친 쌍욕이 튀어나왔다.
“어떤 놈들이오? 내가 가서 머리를 쪼개 놓겠소!”
방풍은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겠다는 듯 잔뜩 흥분했다.
그는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내다.
그가 이번 일의 원흉을 만나면, 정말로 머리를 쪼개 놓기 위해 불꽃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진 전부를 풍차처럼 휘두를 게 분명했다.
“쳐 죽일 놈의 자식들!”
“가만둬선 안 된다!”
“세상에. 후촌까지 건드려?”
화가 난 건 방풍뿐만이 아니다.
백경 앞에 모여 있던 모든 사내들이 분기탱천하여 제각각 소리쳤다.
“잠깐 진정들 하십시오!”
제갈륜이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치자 사내들이 애써 입을 닫고 숨만 씨근거렸다.
“교어채는 장강 이남에 있고, 청호채는 하북에 있습니다. 이 두 곳이 한꺼번에 습격당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수법도 같다면, 이건 우릴 적대하는 조직의 계획적인 습격이군요.”
제갈륜에게서는 처음의 장난스럽던 어조가 사라졌다. 그는 살기마저 느껴지는 차가운 목소리로 추측을 더해 나갔다.
“만약에 전서가 전해진 시점이 동시라는 의미라면, 청호채가 먼저 습격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서보다 빠를 리는 없으니 최소한 두 곳에서 습격한 것은 확실하겠지요. 어느 쪽이든 우리의 상대는 집단입니다. 즉시 조사해야 합니다.”
백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엔 조금 가벼워 보이는 친구라도, 정말로 중요한 일을 마주하면 상상 그 이상을 늘 보여 준 사람이 제갈륜이었다.
적어도 장강에서는 와룡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백경은 품속에 갖고 있던 총표파자의 신물, 수룡옥패(水龍玉牌)를 제갈륜에게 건네주었다.
“어르신?”
“우리 녹림수로삼십육채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서 추적해라. 산맥과 장강 전체를 움직여. 안 그래도 하나같이 못난 놈들이라 가족도 변변치 않은데, 우리가 복수 안 해 주면 누가 해 주겠냐.”
백경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분노를 애써 누르고 있었다.
“어르신…….”
“방풍, 자네도 이 친구랑 항상 함께 있으면서 많이 도와주게. 사태가 심상치 않아.”
장강용왕 추묵환이 은거를 하면서 백경에게 녹림수로맹을 맡긴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맹의 사내들에게 이토록 공감하고,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지금은 서역으로 여정을 떠난 추룡을 제외하면, 분명히 녹림수로맹에서 가장 의리가 깊은 사내는 백경임에 분명했다.
크게 감명받은 제갈륜과 방풍이 동시에 주먹을 감싸 쥐고 포권을 취했다.
뒤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녹림수로맹의 사내들도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꼭 그렇게 하겠소! 우리 맹의 와룡을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이 방풍의 도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어르신.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일각의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재빨리 떠나려 했으나, 백경이 그런 두 사람을 다시 불렀다.
“륜.”
“예. 어르신.”
“삼산현은…….”
백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일단은 조사부터 해 다오.”
“……예. 알겠습니다.”
제갈륜의 눈에 기광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갔다.
녹림수로맹이 전력을 다해 움직이기 시작한 사건.
무림 강호가 요동치기 시작하는 자그마한 시작점이었다.
***
교어채가 있는 곳은 장강 이남의 땅들 중에서도 가장 거칠고 황량한 산맥이 끝없이 이어지는 삭막한 지역이었다. 산길이 너무나 험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게 더 안전하고 빠르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배가 많이 지나다녔으며, 배가 많을수록 거둬들이는 세금도 많은 수채의 입장에서는 천혜의 요지이기도 했다.
절벽 사이로 펼쳐진 장강의 지류 중 한 곳이었다.
늘 공기가 습하고, 흐릿한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떠도는 고요한 지역이다.
허름한 장포를 걸쳐 신분과 외모를 숨긴 제갈륜과 방풍은 교어채의 인근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움직였다.
“백검회라는 곳에서 수적 놈들을 다 없애 버렸답니다! 이제는 강을 건너갈 때 돈을 안 내도 된다지요?”
“아이구, 잘된 일이지요. 우릴 괴롭히던 도적놈들 없애 줬는데. 응? 어떻게 괴롭혔냐고요? 그야……. 저기…… 지나갈 때마다 돈을 내야 하니까 우릴 괴롭힌 거 아니에요?”
“백검회가 뭔지도 몰랐는데, 대단한 곳인가 봐요. 세상에 관에서도 못 잡고 가만히 놔두던 도적 떼를 잡아 버리네?”
민심을 확인한 제갈륜과 방풍의 안색은 어두웠다.
방풍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도착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사람들 참! 다들 왜 이렇게 한 치 앞을 못 봐? 무식한 사람들 같으니. 우리가 없으면 거기서 돈 걷는 놈이 없을 것 같은가! 옛날처럼 녹림마왕 같은 놈들이 뭉쳐 있으면 돈은커녕 물건이랑 애들까지 뺏어갈 건데!”
제갈륜은 숨을 씨근거리는 방풍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화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차악(次惡)이라는 것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구관이 명관이라고. 게으른 현령이 가면, 잔인한 현령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왜 몰라?”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겠죠. 다들 삶이 팍팍한데 돈을 뺏어 가는 놈이 하나라도 줄면 그저 좋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뭐야?”
방풍은 담담한 안색의 제갈륜을 보자 역정이 나서 더 큰 소리로 소리쳤다.
“아주 이해력이 넘치시네. 성군(聖君) 나셨어. 네놈은 도적 아니냐? 왜 나만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 나만 성질 더러운 놈이야?”
“저도 화납니다. 저도 도적이고요. 그저 이해는 가서 하는 말입니다. 그보다 잠시 조용히 해 주시겠습니까?”
“뭐?”
“쉿!”
제갈륜은 진지한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살폈다.
“방 형.”
“뭐? 왜?”
“이것 좀 보십쇼. 재밌습니다. 교어채 입구까지 온 건 백 명이 넘는데, 이 안으로는 한 명만 들어갔습니다.”
“엉?”
방풍은 제갈륜이 보고 있던 흔적을 살핀 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족적을 보니 사실이다. 안으로는 한 명만 들어갔어.”
“예. 그러니까, 교어채 몰살은…….”
“혼자서 했다?”
방풍의 미간이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