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93화 (422/686)

12권 18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8)

“혼자서 이런 꼴을 만들다니. 주화입마에 든 무림 십대고수라도 온 거냐?”

방풍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단순히 수적들의 근거지니까 약하다?

만약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무림 강호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무식한 자라는 말을 들어 마땅할 것이다.

교어채는 한 지역의 패자로 이름을 떨칠 만한 전력을 충분히 갖춘 곳이었다. 적어도 장강 아래에서 팔파일방이 아닌 무림 문파들 중에 교어채와 싸워서 무사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교어채에는 삼백 명이 넘는 호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만만치 않은 사내들이지요.”

“당연하지. 교어채에는 장강용왕이 장강 일통을 하기 전부터 장강에서 활개 치던 놈들이 수두룩해. 삼십육 채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걸?”

“맞습니다. 교어채의 채주인 조범과 그 밑의 교어단도 강하지요. 갖고 있는 중형 전선 열 척이면 명나라 관군들이 조사를 나와도 며칠은 버텼을 것인데……!”

“우라질, 수전이면 나았겠지. 그런데 내륙에서 기습을 당했으니 이 지경이 된 거야. 젠장, 멍청한 조범 놈아. 도대체 그놈들을 뭘 믿고 교어채에 발을 들이게 내버려 둔 거냐? 엉?”

방풍은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선박의 홋줄을 거는 기둥을 발로 한 번 걷어차기까지 했다.

사방이 물이었다. 장강의 파도가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어채는 호리병 형태로 절벽에 둘러싸인 천혜의 지형에 만들어진 성채였다.

그 자체로 하나의 섬이며, 장강에서 배를 타고 들어오지 않으면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구조다.

두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어째서 흉수인 백검회가 교어채에 배를 대고 상륙하게 가만히 놔뒀느냔 말이다.

강에서 작살이라도 쏴서 배를 좌초시켜 버렸으면 애초에 오지도 못했을 텐데!

“폐허가 됐구나. 아주 폐허가 됐어.”

방풍은 혀를 끌끌 찼다.

배를 대는 포구는 크게 부서지지 않았지만, 교어채 자체가 불에 타 버린 탓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원래 교어채에 정박되어 있었던 선박들에도 다 불을 질러서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새까만 잿가루와 박살 난 나무파편들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파도에 이리저리 출렁이는 나무 파편들 사이에서 혹시 시체라도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서 방풍은 눈살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주변을 살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거라. 우리가 먼저 조사하고 오마.”

방풍은 그들을 태우고 온 십여 명의 수적들에게 배에서 기다리도록 지시했다.

“혹시 큰 소리가 들리면 절반은 상황을 살피면서 전투 준비를 하고, 절반은 배의 홋줄을 풀고 출항할 준비를 해. 올라타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거다. 알겠냐?”

“예!”

녹림수로맹 본채에 있던 사내들은 만 단위의 사내들 중에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다.

그들은 방풍의 지시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허리에 찬 칼에 한 손을 올린 채 주변을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철저하시군요.”

“조심해야지. 목숨이 걸린 일인데. 와룡아. 소심하다고 놀리지는 마라. 그럴 만해서 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감탄한 겁니다.”

“부표파자께서 굳이 너한테 나를 딸려 보냈어.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거다. 언제 어디서 괴물 같은 놈이 튀어나올지 몰라.”

방풍은 혹시 모를 기척을 느끼려는 것처럼 주변을 살폈다.

“지금 녹림수로맹의 모든 인원을 이용해서 전국을 뒤지는 중입니다. 꼬리가 곧 밟히겠지요.”

“그래야지. 그래야 녹림수로맹의 무서움을 보여 주지.”

제갈륜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방 형, 어쩌면 우리가 반대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뭘?”

“교어채를 몰살시키고 후촌을 친 게 아니라, 후촌을 볼모로 잡고 교어채를 습격했을지도 모르지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요.”

“……!”

방풍의 얼굴이 또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비겁하게 인질을 잡아 놓고 들어왔다고? 백검회라며? 그놈들 정파 무공 쓰지 않았냐?”

“무공이 정파의 것이라고 싸움도 정파답게 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이런 개호로 잡놈들!”

“진정하십시오, 방 형. 아직 모릅니다. 그저 추측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지는 직접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아냐. 그렇다면 앞뒤가 맞아. 그렇다면 왜 교어채에 순순히 발을 들이도록 내버려 뒀는지 이해가 되지. 네 추측이 맞을 것 같다, 와룡아.”

제갈륜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고, 함께 들어간 방풍은 코를 저릿하게 만드는 진한 피 냄새에 거칠게 미간을 좁혔다.

“이 냄새……!”

“마음 단단히 먹어 주십시오, 방 형. 냉정하게 살펴야 합니다. 섣불리 흥분해서 일을 망치면 안 됩니다.”

“알았다, 알았다고.”

방풍은 알겠다고 말은 했으나, 흥분과 분노는 감추지 못했다.

통나무를 잘라서 세워 둔 벽을 통과하자, 그 안에 수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보였다.

제갈륜과 방풍은 그들이 잔혹한 살육의 현장에 와 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커다란 태풍이 목책 안의 모든 이들을 휩쓸어 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멀쩡한 것이 없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곳이 싸움터였으며, 모든 곳에 시신이 있었다.

반은 까맣게 타서 재가 되고, 나머지 절반도 난도질되어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여기서는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당했습니다. 기습이었나 보군요. 길을 안내하던 사내들의 등을 검으로 찔렸습니다. 여기도, 여기도……. 세 명이 기습으로 일순간에 당했고, 그다음에…… 여기가 전환점이었습니다. 상황을 알아챈 사람들이 다 같이 덤볐어요.”

제갈륜이 주변에 남은 흔적들을 근거로 추측을 하면 방풍이 그에 맞는지 직접 확인을 한 뒤 수긍해 주었다.

무공에 있어서는 방풍이 제갈륜보다 몇 수나 더 위다.

그는 시신의 흔적을 살피더니 흉수가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까지 알아맞혔다.

“이거 청성 무공이다.”

“예?”

“예전에 적하라는 도호의 말코 놈이랑 싸워 본 적 있어서 알아. 끊임없이 흐르는 듯한 발놀림은 부운약표에 비류보. 산뜻하게 검끝을 놀려서 누르듯이 찌르는 거, 이거 천풍검법이다.”

“청성……. 분명, 백검회에서 청성파와 화산파의 무공을 섞어 쓴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섞어 써? 그런 어설픈 수준이 아니다. 이건 본파 장로 수준이야. 이걸 봐라.”

방풍은 바닥에서 손바닥만 한 사슬 조각을 들어 올렸다.

쇠를 정교하게 엮어서 만든 사슬 조각들은 예리한 단면으로 잘려 있었다.

“여기 잘려 나간 부분 보이지?”

“예.”

“사슬은 각각 잘려 나가는 각도가 달라서 검으로 끊기는 어려운 재질이다. 그런데 단번에 끊었어. 강한 힘으로 일격에 모조리 끊어 버린 거다.”

“배 위에서 고수들을 상대할 때 쓰는 철 투망을 종잇장처럼……!”

“여기 조각난 것 좀 봐라. 사슬들이 일격에 찢기듯이 터졌다. 이거 청운적하검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것과 위력이 달라. 보통 놈이 아니군. 이놈, 강기를 쓸 수 있는 놈이다.”

“강기라니. 십대고수의 능력에 근접한 겁니까?”

“글쎄, 그건 직접 만나 봐야 알겠지. 그런데 백대 고수 안에는 확실히 들 놈이야. 분명히 십대 고수도 노려볼 만해 보인다.”

방풍의 눈빛은 침중했다.

그 자신이 무림에선 십대고수와 비교되는 방풍이 하는 말이기에, 더욱더 무겁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그런 자가 백검회에 있던가요?”

“모르지. 정체도 별호도 꽁꽁 숨기는 놈들이니까. 그놈들 검 앞에 번호를 붙여서 실력을 나눈다던데, 이 정도면 일검 아니겠냐?”

“또는 백검회주 본인이거나.”

“그렇지. 그 정도는 되겠다.”

방풍은 혀를 찼다.

“교어채는 바보가 아니었어. 역시나,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놈들 봐라. 서로 팔짱을 낀 채 죽었지?”

“아……! 그러고 보니.”

“이거, 몸으로 막아 보려 한 거다. 자기는 죽을지언정 잠시라도 움직임을 막아서 단박에 끝내려고 했어. 이때 뒤에 있던 저놈들이 철망을 던졌겠지.”

“하지만 실패했군요…….”

“그래. 그리고 이것 봐라. 거북이 등껍질 방패를 들고 몸으로 밀어붙인 놈들, 멀리서 화살을 퍼부은 놈들, 그물을 던지고 작살까지 쏴 본 놈들…….”

방풍은 다 타 버린 까만 시신들 사이, 사이에 놓인 작은 단서들을 하나로 조립해서 이어 주었다.

“교어채는 최선을 다해 싸웠군요.”

“그래. 멍청하게 도망도 안 치고 전력을 다해 싸웠다. 그리고 이 괴물 같은 놈이 그걸 다 정면에서 파훼했고.”

방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에는 과거의 교어채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고집스럽지만 영리한 조범을 필두로 사납고 완고했던 교어채 친위대. 그리고 그 아래에서 철저하게 수전의 전술을 교육받던 능수능란한 수적들.

그들은 기습을 받고 당황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그리고.

전멸했다.

“이놈, 무공이 기가 막힌다. 어떻게 된 게 공격을 피하고 검으로 찔러 죽이는 게 다 한 방이야. 교어채 놈들 하나같이 일초지적밖에 안 되었어.”

“으음…….”

제갈륜은 처참하게 사지가 잘려 나간 시신부터, 한쪽 팔만 살짝 베인 것 같은데 힘을 잃고 쓰러져 버린 자들의 시신까지 꼼꼼히, 하지만 빠르게 보면서 지나왔다.

“친위대입니다.”

보고만 있어도 처절함이 느껴지는 시신들을 지나자, 비로소 교어채의 중심에 도달했다.

교어채 채주 조범이 있을 건물이 있고, 그 앞을 이전의 다른 사내들과는 달리, 어깨에 갑주를 착용한 사내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이놈들은 더했구만……!”

방풍은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교어채 친위대는 시신으로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새카맣게 탄 채 주저앉은 그 모습에선 절대로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놈들아. 차라리 도망을 치지. 그러면 나중에 여길 재건이라도 할 것을.”

방풍은 혀를 차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차마 그들을 아무렇게나 밀치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길을 트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도망치려 해도 못 갔을 겁니다.”

“왜?”

“밖에 남아 있던 자들이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벗어날 방법이 없었겠지요.”

마침내 교어채의 가장 안쪽에 도달한 두 사람은 양손이 잘린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시신을 발견했다.

바닥에는 손바닥만 한 너비의 대도가 반으로 뚝 부러진 채 떨어져 있었다.

손잡이는 교어의 가죽으로 만들어 매끈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이었다. 대도의 칼날 부분에는 교어의 문양이 동그랗게 말린 채 새겨져 있었다.

“조범…….”

제갈륜과 방풍은 말을 잃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사방에 칠갑한 핏물이, 조범이 얼마나 분투했는지를 보여 준다.

두 사람의 발밑이 끈적끈적하게 느껴졌다. 건물이 불에 탔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 정도의 출혈이라니.

교어채의 채주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몸에 피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고생했네. 고생했어.”

방풍은 조범의 가슴을 내 천(川)자로 가른 흉터를 손으로 만져 본 뒤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교어채 내부의 상황을 모두 확인한 두 사람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띄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확인할 곳은 더더욱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만 했다.

“흉수는 정말로 혼자서 교어채를 도륙했습니다.”

“쳐 죽일 놈이다.”

“그래도 강하긴 하지요?”

“……그래.”

“방 형보다 강합니까?”

제갈륜은 돌려서 묻지 않았다.

직설적으로 물었고, 방풍 역시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흉수 놈이 교어채에 들어왔을 때는 내가 더 강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허면 지금은요?”

“조범의 상처를 보면……. 지금은 모르겠군.”

제갈륜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리가……?”

“내가 전력을 다해 내리치는 화부랑 비슷한 힘으로 섬세한 검술을 쓰는 놈이다. 만년화리의 내단이라도 먹은 건가? 내공이 삼 갑자는 되나? 그게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

장강용왕을 제외하면 녹림수로삼십육채의 정점을 논하는 무력이 바로 녹림의 불 도끼.

화부 방풍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승리를 자신하지 못한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제갈륜의 지모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교어채 채주의 집무실을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건장한 사내 두 명이 간신히 탈 만큼 작은 나룻배가 하나 덩그러니 물 위에 둥둥 떠서 묶여 있다.

그리고 그 뒤.

절벽을 비스듬히 깎은 것 같은 척박한 지형에, 수많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그마한 마을 하나가 보였다.

“아아……!”

제갈륜은 탄식했다.

까맣게 탄 초가집들의 지붕이 문제가 아니다.

작은 물줄기를 하나 사이에 두고도 마을에서 전해지는 짙은 피비린내 때문도 아니다.

나룻배 앞에 엎어져 있는 자그마한 몸체.

다섯 살쯤 되었을까.

기름을 굳혀 만든 인형처럼 창백한 팔다리를 드러낸 채 굳어진 시신이 제갈륜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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