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9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9)
“천벌을 받을……!”
시종일관 명경지수의 마음을 유지하던 제갈륜이 결국 평정을 잃고 말았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후촌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은 이미 듣지 않았던가?
미리 알고 있었던 일이고 못 볼 꼴을 볼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도 했었지만……. 그래도 두 눈으로 직접 보자 느껴지는 감정은 상상했던 것과 천지 차이였다.
입고 있는 노란색 비단 옷이 화사한 탓일까? 창백한 피부색이 너무나 눈에 밟힌다.
한창 도홧빛으로 발갛게 피어올라 생기가 넘칠 나이의 아이가, 저렇게 차갑게 식은 채 무참하게 엎어져 있는 꼴이라니!
“대체 누구냐. 순진무구한 아이를 죽이는 이런 광자가 어찌 멀쩡히 이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가?”
제갈륜은 떨리는 심정으로 아이의 시신에 다가갔다.
수적들의 집단에 있으면서 온갖 꼴을 봐 왔지만, 어린아이의 무참한 시신이라는 건 아무리 봐도 적응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방풍에게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하던 말들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제갈륜은 요동치는 심정으로 아이의 사인을 분석했다.
“목이…… 부러졌습니다.”
제갈륜은 고장 난 인형처럼 머리가 축 늘어진 아이를 애써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이의 뒷덜미를 잡고…… 이리저리 격하게 움직인 모양입니다. 상처가 많아요. 대부분 옷자락에 긁히고 쓸린 흔적입니다.”
방풍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가 입을 연 건 시간이 반각이나 지난 뒤였다.
“교어채가 가난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후촌에서 저렇게 통째로 비단 옷을 입을 수 있는 아이는 드물지.”
“아……!”
“조범이 왜 그리 처절하게 싸웠는지 알겠군.”
행간의 의미를 파악한 제갈륜의 눈빛이 흔들렸다.
확실히 연륜은 무시할 것이 못 된다.
방풍은 제갈륜조차 놓치고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사안을 알아낸 것이다.
“그래서 교어채에 들어 올 수 있었군요! 그래요. 그럼 말이 됩니다. 수채의 포구에 정박하도록 두고, 안으로 들여보내 길 안내까지 한 것도, 중간부터 교어채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미친 듯이 공격한 것까지. 왜 단 한 명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웠는지도……! 다 설명이 됩니다.”
“채주의 아이를 인질로 잡고 들어왔는데, 한 손으로 뒷덜미를 잡고 날뛰다가 죽여 버리면……. 나라도 대가리를 쪼개 놓고 싶을 테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두 사람은 한마음, 한뜻으로 아마 조범의 아들이었을 소년의 시신을 똑바로 눕혀 주었다.
“이러고도 우리가 악한 놈들인가? 우리가 나쁜 놈이야? 천하에 처 죽일 놈들이 가면을 쓴 채 위선을 떨고 있구나!”
방풍은 숨을 씨근거리며 살벌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두 사람은 암울한 심정으로 작은 배에 올라탔다.
흉수는 조범의 아이를 죽인 뒤 후촌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얼마나 더 심한 참상이 벌어졌을지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잠깐.”
제갈륜이 배를 묶어 두었던 줄을 푸는 사이, 가만히 주변을 경계하던 방풍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왜 그러십…….”
“쉿!”
제갈륜은 방풍의 반응을 보고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그는 배를 묶어 둔 줄부터 마저 다 풀어 버렸다.
제갈륜은 강물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굽이굽이 휘어진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 자연스럽게 교어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퇴로는 확보되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불안감이 가시지를 않았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방풍의 몸이 점점 더 낮춰졌다.
그는 오른손을 뒤로 뻗어 등에 차고 있던 쌍날 전부의 손잡이를 가볍게 거머쥐었다.
“네놈은 누구냐?”
방풍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그의 성명병기인 화부는 어느새 등에서 뽑아 정면을 겨누었다.
“나?”
킥― 하고 웃는 목소리가 기괴하다.
새로 나타난 사내는 키가 매우 큰 사람이었다. 방풍도 작은 키가 아니건만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다만 덩치가 큰 건 아니라서 허리는 가늘고, 양손이 무릎에 닿을 것처럼 팔이 길었다.
거기에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으니, 이야기 속에서나 듣던 귀신처럼 섬뜩했다.
“나느은, 도적놈들 잡아 죽이는 협객이지.”
콧노래를 부를 것처럼 흥에 겨운 모습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제갈륜은 눈을 번쩍 떴다.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제갈륜뿐만이 아닌 듯했다.
방풍 또한 분기탱천하여 버럭 소리쳤다.
“이놈! 네놈이구나! 어째서 교어채를 몰살시켰느냐! 이 어린아이는 또 왜 죽였고!”
“왜냐고? 도적놈들 죽이는데 이유가 필요해?”
흰가면의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기울였다.
“애는 도적의 가족이니까 죽였소. 어…… 음. 그냥? 잘 자라 봤자 또 도적이 될 거 아냐? 살려 둘 이유가 있어?”
중언부언. 예의를 갖췄다가, 어린아이처럼 말했다가.
종잡을 수 없는 사내다.
“이노옴……!”
“킥― 너희도 도적이지?”
스릉―.
가면의 사내가 검을 뽑자, 시리도록 차가운 예기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검에서 떨어진 것은 예기만이 아니었다. 칼날을 타고 시커먼 액체가 후드득 떨어졌다.
뚝…… 뚝…….
방울져 떨어진 액체가 바닥에 몽글몽글 맺혔다.
그 모습을 본 방풍의 안색이 다시 한 번 확 바뀌었다.
“네놈. 어디서 왔느냐?”
“나? 너네 오길 기다리다가 배 타고 왔지.”
방풍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포구에 있던 내 부하들은?”
“아, 걔네? 다 죽였지.”
“…….”
“별로 어렵진 않았어. 아, 그래도 끈질기긴 했다.”
가면의 사내는 투덜거리면서 그가 입고 있던 검은색 바지를 손바닥으로 툭툭 털어냈다.
겉으로만 봐선 잘 모를 정도의 손자국이 그의 바지에 남아 있었다.
그것도 몇 개나 말이다.
“이노옴―!”
방풍은 선수를 쳐서 공격을 날렸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양팔의 두꺼운 근육이 제각각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댄다.
화부라는 별호가 그렇게나 잘 어울릴 수 없다.
한번 공격을 시작하자 마치 불꽃같은 기세를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손목을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커다란 쌍날 도끼가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거칠게 아래로 내리찍었다.
콰앙!
가면의 사내는 춤추듯이 발을 놀려 공격을 피했다.
“킥, 그런 단순한 공격은…… 억?”
공격은 피했을지 몰라도, 화부의 일격으로 박살 난 바닥의 파편까지는 막아 내지 못했다.
가면의 사내가 소맷자락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혹시나 파편이 눈에 들어갈까 걱정돼서 취한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꾸욱―.
그 순간 방풍은 양손으로 도끼를 한계까지 강하게 움켜쥐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어깨의 근육이 그가 입고 있던 무복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쿵.
비스듬히 몸을 꺾으면서 오른발로 내딛은 진각이 둔중하게 땅을 울렸다.
바닥에 꽂혀 있던 도끼를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올려치는 공격이다.
투로는 단순했으나, 거기에 방풍의 막강한 힘이 실리면 그 단순한 투로는 패도(覇道)로 변한다.
“켁?”
가면의 사내는 반 박자 늦게 공격에 반응했다.
수로채 사내들의 피가 묻은 검으로 도끼를 막으려 했으나, 도끼와 닿는 순간 그는 몸이 반으로 접히면서 가벼운 돌멩이처럼 뒤로 튕겨져 나갔다.
쾅!
교어채 채주의 집무실 벽을 뚫고 들어가.
콰드득! 터엉!
집무실 내부의 온갖 집기들을 박살 내는 듯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불에 타서 약해져 있던 건물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기우뚱 흔들렸다.
대들보에서 떨어지는 검은색 잿가루가 심상치 않았다.
“세상에!”
지켜보던 제갈륜이 탄성을 발했다.
‘화부의 폭렬부공(爆裂斧功)! 장강용왕과 백 초식을 겨뤘다더니. 허명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시작부터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처음 보기에 더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칫.”
하지만 방풍의 마음에는 들지 않은 모양.
그는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도끼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내려들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키아악!”
먼지가 풀풀 피어오르는 건물 속에서 기성을 지르며 뛰쳐나오는 가면의 사내는 마치 괴조(怪鳥) 같았다.
펄쩍 뛰어올라 긴 팔로 검술을 전개하는 모습이 마치 날갯짓을 하는 듯했다.
우아하면서 강맹한 검격.
신학검(神鶴劍)이다.
다리가 길고 날개가 큰 학이 뱀을 제압하듯, 가면의 사내는 긴 팔을 채찍처럼 날려 검끝으로 방풍을 살짝살짝 눌러 찌르는 동작을 취했다.
따다당―!
신학검의 은근한 검격이 방풍을 몰아붙였다.
다섯 번의 검격이 날아오면 방풍은 네 번 정도는 완벽히 막아 냈고, 한 번의 검격은 제대로 막지 못하고 스치며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 그는 방풍이 말한 대로 검을 유연하게 놀리는 천풍검법까지 섞어서 썼다.
“이놈!”
후우웅―――.
“킥―!”
반대로 방풍의 강맹한 도끼질은 가면의 사내가 펄쩍 뒤로 물러나자 허무하게 허공만을 갈랐다.
가면의 사내가 비웃음을 날렸다.
새하얗던 가면에 검정이 묻고 금이 간 것이 유일한 성과다.
도끼를 정통에 맞아 살짝 휘어진 검도, 가면의 사내가 불그스름한 검기를 두르니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상성이 안 좋다!’
상황을 지켜보던 제갈륜은 직감했다.
싸움은 끝날 때까지 모르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긴 거리를 제압하며 살짝살짝 작은 상처를 남기는 가면의 사내와, 거리는 짧지만 일격필살의 도끼질을 해 대는 방풍은 상성이 좋지 않아 보였다.
‘방 형의 무공 실력과 경륜에 기대야 하는가?’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하지 않던가.
다섯 번에 한 번 작은 상처를 허용하던 방풍이, 싸움이 길어질수록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이놈! 끝장을 보자!”
방풍이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떴다.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 핏줄이 그의 턱까지 울퉁불퉁하게 올라왔다.
고오오오―.
쌍날 도끼를 타고 은은한 자주색 기운이 맺히더니 끝내 단단한 강철처럼 유형화되었다.
별처럼 빛나는 북두천강의 기운.
절정의 경지를 초월한 초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강기(罡氣)였다.
이글거리는 불꽃 문양이 새겨진 쌍날 도끼는 진정한 의미로 불타오르는 화부가 되었다.
“그거 말이오? 나도 쓸 수 있어!”
늙어졌다가 어려졌다가, 목소리조차 왔다 갔다 하는 광인이 양손으로 검을 잡자, 피처럼 시뻘건 강기가 확― 하고 솟구쳐서 본래의 검보다 한 뼘이나 길어졌다.
완연한 초절정의 경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방풍은 놀라지 않았지만 그 얼굴은 더없이 침중했다.
“완숙되지 않은 무공이지만, 내공과 힘 하나는 천하를 논하는구나. 내 이름은 방풍이다. 네놈 이름이 뭐냐.”
“방풍? 방풍……. 어디서 들었는데? 녹림의 불 도끼였나? 맞지? 내 이름은 청계요. 청성에서 무공을 익혔…… 이렇게 말하는 거 맞나?”
스스로를 소개하면서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이다.
진정한 광인의 모습.
방풍은 거두절미하고 집중해서 모은 강기로 그가 쓸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가했다.
청계는 킥킥 웃으면서 극성의 신학검을 펼쳤다.
콰아아앙――!
배를 대던 부두가 터지듯이 폭발하고, 청계의 강기가 온갖 파편들을 잘라 내고 바스러뜨렸다.
삼 초식 만에 결판이 났다.
날아든 파편을 딛고 부운약표를 펼친 청계가 검으로 방풍의 오른쪽 가슴을 꿰뚫은 것이다.
“방 형!”
제갈륜의 비명 같은 외침 덕분인가.
방풍은 그의 가슴이 뚫리는 순간 피를 토해 내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도끼에서 왼손을 떼어내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청계의 손을 붙잡았다.
서걱―.
치솟는 강기에 왼손 중지와 약지가 잘려 나갔다.
그럼에도 그는 청계의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도 몇 개 남지 않았건만, 청계를 붙드는 힘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잡았다. 이 새끼야.”
방풍의 눈빛이 번뜩였다.
오른손 한손으로 잡은 쌍날 도끼가 폭발하듯 청계의 왼쪽 어깨를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