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96화 (425/686)

12권 21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21)

소호가 부축해 주자, 제갈륜은 감정이 격해져서 울먹거릴 것 같은 심정을 꾹 눌러 참았다.

“그 상처를 입고도 도망 갔는가……! 아아, 하늘도 무심하시구나.”

제갈륜은 탄식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소호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장 대협, 대협의 도움은 제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녹림수로맹에도 꼭 이야기하겠습니다.”

“작은 일에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우선 제갈 군사께서 몸을 추스르는 게 먼저일 듯합니다.”

소호는 곁으로 다가온 방 조장에게 말했다.

“돌아가죠. 우선 이분들을 치료하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예.”

목선의 돛이 방향을 바꾸고, 장강의 거센 물살을 헤치며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소호는 죽은 땅이 되어 버린 교어채를 돌아보았다. 드넓은 목책과 위협적인 사람들투성이였던 수적들의 본거지.

소호는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습니다. 후한 말에 나온 말이지요. 적이 될 수 있는 세력이 다른 세력과 싸우면 우리에게는 이득이 된다는 뜻입니다. 비겁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래요. 현실은 낭만적이지 못하죠.”

섭주해는 탁자 위에 놓인 대륙전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우린 백검회와 잘 지내는 게 좋아요, 소호 형.”

“백검회?”

소호는 신음을 흘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쪽 사람들이랑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잖아. 날 납치하기도 했었고.”

“후훗, 그랬죠?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꽤나 지났네요. 무산제전에 참가하지 말라고 납치하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귀엽네요.”

“그때는 재밌긴 했어.”

소호와 섭주해는 추억을 떠올리며 서로 웃음 지었다.

학관에서도 난리가 나고, 진구 삼촌까지 나섰던 큰일이었지만, 섭주해와 소호에게는 재밌는 추억이었다.

“위군도 왕진 태감한테 복수하겠다면서 백검회에 들어갔으니, 사실 우리랑 목표는 일치하겠네. 그렇지만…….”

“마음에는 들지 않죠?”

“맞아.”

섭주해는 소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틀리면 스스로 분신해서 자결하는 집단을 소호 형이 좋아할 리가 없죠.”

“그런 건 백검회주한테만 좋은 일이라고. 도대체 누구를 위한 짓이야, 그게?”

“…….”

“나는 임무 도중에 봤던 그 자결하는 모습이 잊혀지질 않아. 지금도 생생해. 그때 몸이 활활 타는 냄새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절박하니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겠죠.”

“으음…….”

“우린 거기에 동조할 필요는 없지만, 적대시할 필요도 없어요. 제 요점은 그겁니다.”

소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버려 두자는 거지? 괜히 건드리지 말고.”

“네.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로는 백검회는 위험을 자초하는 성향이 아니에요. 항상 은밀하게 암중 세력으로 활동하더군요.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먼저 우리한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뭐.”

“그런데 만약 싸우게 된다면.”

“응?”

“잊지 마세요. 우리가 백검회와 싸워서 전력이 소모되면 웃는 것은 왕진 태감이에요.”

섭주해는 진지했다.

소호는 알았다고 대답했고,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 되는 듯 보였다.

“아참, 소호 형,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요.”

“어떤 일인데?”

“방익지 조장과 호흡도 맞춰 볼 겸 장강에 한번 다녀오는 게 어때요?”

“장강?”

소호는 호기심을 느꼈다.

강호행을 많이 해 보지 못했기에, 배를 타고 장강에 나간다는 것이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다.

“우린 안휘성에 자리를 잡았어요. 도철의 자리에서 사람을 키우기 시작했으니 이제 점점 돈이 들어가는 일이 많아질 거예요.”

“아……. 돈…….”

소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돈 많잖아? 염상 목인규의 돈이 한 성을 먹여 살릴 정도라고 하지 않았어?”

“돈은 멈춰 있어서는 안 돼요. 소호 형. 곳간에 가득 찬 재물은 언젠가는 다 쓰거나 썩기 마련입니다. 계속해서 베풀고, 또 거둬 와야죠.”

“으음…….”

“장사란 그런 거잖아요? 소호 형도 객잔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죠?”

“알지. 매일 재료를 가져오고, 돈을 받고 팔아야 하는 거잖아?”

“바로 그거죠. 그러니까 우리도 계속 우리의 이름과 무력을 팔고 돈을 벌어 와야 해요.”

소호는 섭주해의 설명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천무련이라는 곳을 계속해서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잘 돌아갈 수 있게 움직여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뭘 해야 해?”

“천무련에서 남경까지 가는 물길에 교어채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과 이야기를 잘 해서 우리 천무련의 배가 무사히 지나다닐 수 있도록 계약을 하려 해요.”

“오호?”

소호는 흥미가 생겼다.

“수적들이구나. 녹림수로맹 소속이야?”

“예. 예전에는 추묵환 할아버지 밑에 있던 수채였죠.”

“그렇구나. 신기하다. 그럼 가서 뭐라고 해? 그냥 계약하겠다고만 하면 돼?”

“자세한 건 방익지 조장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소호 형은……. 옆에서 지켜 주기만 하면 돼요.”

“나는 힘만 보태 주면 되는 거구나?”

“네. 그 외에는 쓸모가 없어요, 소호 형은.”

소호가 깜짝 놀라 두 눈을 끔뻑거렸다.

“우와, 너무 독설 아니야?”

“형은 무공 바보니까. 무공에만 집중하시면 돼요. 다행히 그쪽에서는 제일 뛰어난 바보잖아요?”

“우와아. 뭐지? 뭔가 감정이 많이 쌓였는데? 데리고 놀러가질 않아서 그런가?”

소호가 당장 시장통에 놀러 나가자면서 섭주해를 잡아당기고, 섭주해는 파닥거리면서 그런 소호의 손길을 거부했다.

심각했던 대화는 그렇게 장난스러운 두 사람의 농담으로 마무리되었다.

***

물길에 익숙한 사내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중형의 목선을 능숙하게 다뤘다.

바람의 방향에 맞춰 닻을 이리저리 조정하고, 물살을 따라 움직여서 배가 별로 흔들리지도 않게 운행했다.

묵묵히 갑판에 서 있던 소호는 섭주해와의 대화를 떠올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난감하네.”

소호가 난감한 심정을 느끼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죽였어야 했나?”

소호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또다시 머릿속에서 위험한 생각이 들 뻔했다.

사실 소호는 제갈륜의 부탁을 받고 교어채에 도착했을 때 그 백검회의 ‘괴수’를 보았다.

소호가 부두로 나가자 그곳에는 어린아이의 시신 한 구 말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폐허나 다름없이 박살 난 건물들과 집기들, 싸움의 흔적만이 남았을 뿐.

거기에 짙은 피비린내는 덤이었다.

거기에서 소호는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지금 소호가 타고 있는 것과 비슷한 크기의 중형 전선에 피투성이에 중상을 입은 듯한 청년 하나와, 흰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수십 명의 사내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누가 봐도 백검회의 사람들.

소호와 눈이 마주친 그들은 서로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고 그저 서로를 경계하며 점점 멀어졌다.

‘잡으려면 잡을 수 있었겠지. 그 배 위에 뛰어들려면 뛰어들 수도 있었을 거고. 그 피투성이 청년도……. 이길 수는 있겠던데.’

소호는 미간을 좁혔다.

이길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굳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백검회와 척을 질 것인가.

그저 모른 척한 채 녹림수로맹과 백검회. 그 둘 모두와 평화를 지킬 것인가.

그런 이득의 문제였으니 말이다.

‘근데 왜 이렇게 찝찝한 것일까.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하네. 그놈들이 애들도 죽였다는…… 이야기 때문인가?’

소호는 복잡한 마음을 주변에서 잔잔하게 흘러가는 장강의 강물에 다 흘려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찌 생각하면 어차피 도적들……. 아냐,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잊자. 순간의 선택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모르는 척했던 게 최선의 답이야.’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

소호가 선택한 일이니, 그저 결과가 어찌 되든 따라야 할 뿐.

“공자님! 뒤에서 보니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습니다. 갑판에서의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라! 허허, 늘 공자님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공자님은 어째서 부족한 게 없으신 겁니까?”

“방 조장.”

작은 눈의 중년 사내가 웃는 얼굴로 소호의 곁에 다가왔다.

“별말씀을요. 그저 강을 보면서 잠시 마음을 정리했을 뿐이에요.”

“그러셨군요. 마음은 정리되셨습니까?”

“예. 조금 낫네요.”

“다행입니다! 저희는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교어채에 못 들어간 건 아쉽지만, 이미 다 불타고 폐허가 되었다면 교섭의 의미는 없겠죠.”

“……그렇겠죠.”

“다른 변수가 생기면 제가 대응할 테니 공자님께서는 걱정 말고 푹 쉬시면 됩니다. 공자님 같은 천하의 인재가 수적들을 직접 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방익지의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소호를 추켜세워 주는 말투는 여전했다.

소호는 고맙다고 인사한 뒤, 가만히 강물을 지켜보았다.

드넓은 장강의 뿌연 물살은 소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조용히 흘러갈 뿐이었다.

***

“가슴이 검에 뚫리면서 폐부가 상했군. 간장도 상할 뻔했으나 다행히 비껴갔소. 그래도 환자가 강인해서 다행이구려. 당귀와 녹각을 섞은 탕약을 충분히 마시면서 휴식한다면 예전의 강건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남강 포구에 위치한 보광의원(寶光醫院)은 생각보다 제대로 된 곳이었다.

주변에 번화한 거리가 하나도 없음에도, 넓은 부지를 차지한 채 번성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소호는 침상에서 점점 호흡이 안정되어 가는 방풍과 상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쓰러져 있는 제갈륜을 확인한 뒤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의원까지 왔으니 이제 저 두 사람은 상세가 나빠지진 않을 것이다.

‘제갈륜이 깨어나면 방 조장이랑 같이 이야기해서 우리가 필요한 걸 이야기해야겠네. 그러면 일단 내가 할 일은 끝나는 건데…….’

소호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두꺼운 나무 문을 밀어젖혔다.

“가만히 두질 않는구나.”

소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끼이익―.

햇빛에 반사된 검광들이 사방에서 빛났다.

“공자님! 습격인 듯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이 방익지가 막아 보겠습니다!”

방익지를 포함한 천무련 소속의 신입 무인들이 제각각 검을 뽑은 채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궁지에 몰린 작은 짐승 같았다.

잔뜩 긴장하고 겁에 질렸지만 사납게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상대가 안 되겠는데……? 역시 무공의 차이는 크구나. 화산파와 청성의 무공이 뛰어나긴 한가 봐.’

소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을 둘러싼 흰 가면의 사내들이 먼저 흥분해서 손을 쓰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천무련에 오는 사람들을 나름 고르고 골랐음에도 아직은 걸음마 단계.

지독한 수련을 거쳐 낸 백검회와는 수준의 차이가 컸다.

“천무공자.”

가면을 쓴 사내들 중에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흰색의 가면에 검 문양이 새겨져 있는 사내였다.

그는 즐거워 보이는 눈빛으로 소호를 응시했다.

“반갑구려. 나는 백검회를 대표하는 사람이라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