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97화 (426/686)

12권 22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22)

그는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가렸지만 그럼에도 그가 주변의 백검회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내라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그가 나선 것 하나만으로도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무표정하고 무감각해 보이던 백검회의 사내들이 눈빛부터 달라졌다. 일제히 검을 내려놓고 백검회주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에선 마치 어미 새가 주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흠.”

백검회주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며 여유롭게 웃을 뿐이다.

‘이런 게 신뢰받는 지도자라는 거구나? 느껴지는 무력은 그다지 뛰어나진 못한데. 어떻게 그리 신뢰받을 수 있는 거지? 비밀이 뭘까?’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의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무력은 특별하지 않다.

절정의 경지를 조금 넘은 수준일까.

세상사 모든 일에 무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백검회처럼 음지에서 숨어서 활약해야 하는 집단에서는 무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소호의 고정관념인 모양이었다.

“백검회를 대표한다면, 그쪽이 백검회주입니까?”

“하핫, 그렇소. 내가 백검회를 이끌고 있소.”

그는 시원하게 긍정했다.

백검회주는 내심을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소호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천무공자. 나는 그대와 깊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가면을 쓰고 검을 들이대는 상대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지당한 지적이군. 그렇지만 여기가 너무 열린 공간이라 그럴 뿐이오. 아직 의원의 사람들은 아무도 우릴 보지 못했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어떻겠소?”

백검회주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또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공자님! 위험합니다!”

방익지 조장은 백검회에게서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소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백검회는 정도 문파에서도 위험하다고 늘 말해 오는 곳 아닙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방익지의 충성심.

백검회와 비교한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소호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보니까 저 중에 저를 막을 만한 상대는 아무도 없네요.”

“예……?”

소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는데 그 반향이 제법 강했다.

방익지를 포함한 천무련의 사내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백검회 사람들 역시 멍한 눈빛이다.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하하핫!”

오직 백검회주만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천무공자의 무공이 천하일절이라더니! 그 성정 또한 호탕하구려. 암! 내가 들은 천무공자의 무공이면 인중여포가 따로 없을 것이오.”

“인중여포라. 과찬이시네요.”

“아니오. 도철과 도올이라는 왕진의 개를 쓰러뜨린 무림의 신성!”

“…….”

“아쉽게도 우리는 일검(一劍)과 함께 오지 않았으니 이 중에 그대를 막을 만한 무인은 없겠지. 하지만 조심하시오. 비록 실력에서 부족함이 있을지언정, 우리가 마음속에 품은 검의 날카로움은 세상 그 어떤 자들보다도 사납소. 본래 마음의 검이 가장 무서운 것 아니겠소?”

에둘러 말하지만, 소호에게 겸손함을 지니라는 뜻의 말이었다.

소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발 물러났다.

“해묵은 원한이 날카로운 검보다 무섭기는 하죠. 자, 그럼 어디서 대화를 나눌까요?”

“잠시 나와 함께 가 주시겠소?”

“그러죠.”

소호는 즉답했고, 백검회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방 조장님, 의원을 잠시 지켜 주세요.”

“공자님. 정말로 괜찮습니까? 저들은 자결도 서슴지 않는 광신도들입니다.”

“괜찮아요.”

방익지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의 백검회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소호는 그 맘을 다 안다는 듯 방익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네요.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이야기를 들어 봐야죠. ……수틀리면 도망쳐 올게요.”

“……예.”

방익지는 영리하게 소호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함께 온 천무련의 무인들에게 손을 흔들어 뭔가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쏴아아아―.

보광의원 주변을 두르고 있는 대숲에선 바람이 항상 빠르게 흘러나갔다.

백검회주와 소호는 나란히 서서 반각가량을 걸어갔다.

대숲 너머는 강이 있었다.

나룻배를 저어야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꽤나 넓은 강인데, 평소에도 배가 자주 다니는 듯 포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풍광이 좋군. 그렇지 않소?”

백검회주는 뒷짐을 진 채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포구에 놓인 단단한 나무 상자 위에 방석 두 개를 손수 깔았다.

“천무공자. 자리가 변변치 않으니 미안하오. 그래도 이곳의 풍광이 좋으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소?”

허리를 살짝 굽히며 한쪽 손으로 정중하게 자리를 권하는 모습에선 명가의 예법이 느껴졌다.

소호는 고개만을 끄덕인 뒤 방석 위에 순순히 앉았다.

보광의원의 모습이 엄지손가락으로 가려질 만큼 작게 보였다.

백검회의 나머지 사내들은 그들로부터 스무 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겠소. 우리에게는 큰 인연이 있다오. 그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소?”

“우리가요?”

소호는 골똘히 생각해 보았으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전혀 모르겠네요.”

“하핫, 그럴 것이오. 그럼 이 말은 어떻소? ……신수비처.”

백검회주는 놀라운 단어를 말하며 본인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왼쪽 턱 아래, 목덜미에 난 긴 칼자국이 유난히 눈에 띈다.

크지도 작지도 않는 눈에 오뚝하니 솟은 코, 얇은 입술을 지닌 깔끔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웃고는 있는데, 어딘가 섬뜩하네.’

가면을 벗으니 오히려 더욱 경계하게 되는 묘한 인상이었다.

“신수비처라. 확실히 거긴 잊을 수가 없죠. 거길 갔었어요?”

“그대가 빠져나간 직후였소.”

백검회주는 그때의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인세의 지옥이 따로 없었소. 모산파의 도사들이 탑돌이를 하면서 왜 그렇게 지전을 태워 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곳이었지. 그리고……. 왕진의 본성을 알려 주는 시설이기도 했소.”

“왕 태감의 본성이 어떻다고 생각했죠?”

“허세. 교만함. 권력욕. 인명 경시.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 목적을 위해서라면 남몰래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잔인함.”

“하핫.”

“왜 웃는 것이오?”

“글쎄요. 왕진 태감만의 성격은 아닌 것 같아서요.”

소호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서늘한 눈빛으로 백검회주를 응시했다.

인명 경시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이라니.

게다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잔인함?

그건 백검회의 특징 아니던가.

“말 속에 뼈가 있군. 날 비난하는 것이오?”

백검회주는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도 않으면서 담담하게 되물었다.

“비난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좋게 들리지는 않네요. 제가 보기엔 백검회도 꽤나 잔인한 곳이라서요.”

“잔인…… 잔인이라…….”

“…….”

“우리 회(會)의 가족들이 임무 중에 자결하는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이로군.”

백검회주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마음이 아프오. 그런 일이 한 번씩 있을 때마다 내 가슴은 찢어지지.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소. 실패하고 붙잡힌다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

“그대라면 어떻게 하겠소? 잡혀서 고문당하고, 최후에는 신수비처 같은 곳에서 괴물의 먹잇감이 되겠소? 아니면 큰 뜻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며 대의를 외치다 죽겠소?”

“지도자로서 그래야 말단들의 뒤처리가 편하기 때문은 아니고요?”

“그럴 리가. 이걸 보시오.”

백검회주는 자신의 품 안에서 손가락 하나만 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매끈한 도기 속에 사람의 살과 닿으면 불꽃을 일으키는 무서운 극약이 들어 있는 물건이었다.

소호도 아주 잘 아는 물건.

백린탄이었다.

“회주라고 불리지만, 나도 예외는 아니오. 때가 되면 나도 똑같은 일을 할 테지. 우리 백검회는 그런 면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진 진정한 가족이라오.”

“가족이라…….”

“그대는 알지 못하오. 우리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아 왔는지. 무산제전 이후로 우리를 뿌리 뽑을 듯이 달려드는 왕진을. 그리고 무시무시한 무력을 뽐내며 쫓아오는 사흉들을 어떻게 따돌리며 살아왔는지. 그걸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그대는 우리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오.”

백검회주는 씁쓸한 얼굴로 백린탄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백검회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당연하다는 듯.

뿌듯하고 자부심 가득한 눈빛으로 가슴을 펴는 모습이었다.

‘흐음, 과연 저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냐는 거지만.’

소호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겪었다.

이제는 어리고 철없던 시절의 소호가 아니었으며, 사람이 말하는 대로 다 믿지는 않는다.

그가 보기엔 백검회주는 아직 완전히 믿기는 힘든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공자를 만나 말하고 싶은 건 이것이오. 우리, 서로 건너지 못할 다리는 건너지 맙시다.”

백검회주는 친근하게 웃었다.

소호는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서로 적대하지 말자는 말이죠?”

“그렇소. 우린 왕진 태감과 흑시군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오.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소이다.”

“그러니 교어채의 일은 관여하지 말아라?”

“교어채의 일 뿐만이 아니오.”

백검회주는 옆에서 잔잔한 물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장강의 지류를 가리켰다.

도도한 황색 빛의 강물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녹림수로맹. 그 도적들과 싸우게 되더라도 천무공자와 천무련은 관련되지 않았으면 하오.”

“……백검회는 녹림수로맹을 칠 겁니까?”

“아마도, 적당한 ‘합의’를 하기 전까지는 크게 싸울 수도 있을 것 같소.”

“적당한 합의라…….”

소호의 머릿속에서 얼마 전에 교어채에서 봤던 청계의 모습이 떠올랐다.

창백한 얼굴에 광기 어린 눈빛이 워낙 강렬해서 잊히지 않는다.

폐허가 된 교어채.

잔혹하게 죽어 나간 시체들.

그리고, 은자촌에서 더덕을 캐던 호탕한 추묵환의 모습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아.”

소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교어채는 왜 공격한 거죠?”

“나 청광, 이래 뵈도 청성에서 수학하던 도사였소. 민초들을 괴롭히는 도적 떼는 늘 눈엣가시 아니겠소? 그들을 처단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오?”

“거짓말.”

소호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백검회주.

청광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집혼기를 가졌으니 그걸 채울 피가 필요한 것이겠지. 우리 서로 솔직하게 대화하기로 한 것 아니었어요?”

“하핫, 솔직하시군. 마음에 들어. 그럼 하나 더 말하겠소. 그렇소. 집혼기는 완성되어야 하며, 우리 백검회가 사흉에 버금가는 힘을 우리도 지니게 되는 것이 목표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드디어 황실과 흑시군과 싸워 볼 만한 전력이 생길 테지.”

청광의 두 눈에서 순간적으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그 목표를 위해서 도적 떼를 잡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소? 당연한 일이오. 그리고 민초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 일석이조가 아니오?”

“노인과 어린아이, 여인들이 있는 후촌도 몰살시키면서까지?”

“어차피 도적이 되거나 도적을 돕는 사람들 아니오? 대를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오.”

소호는 답답함을 느꼈다.

어차피 명분이라는 것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눈앞에 있는 청광이라는 자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지금 소호는 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명분이 없었다.

도적은 도적이다.

민초들을 위해 도적을 잡겠다는데, 그게 아무리 허울뿐인 말이라고 한들 뭐라고 하며 막는단 말인가.

게다가 백검회주 청광은 소호에게 충격적인 말을 꺼내 들었다.

“은위군을 기억하시오?”

“……기억해요.”

“그대가 은위군과 친했던 것은 잘 알고 있소. 그리고 난 그때 우리 백검회가 조사해서 알아낸 사실을 잊지 않았다오. 사실, 지금 그대에게 이렇게 양해를 구하는 것 자체가 그 때 알아낸 사실 때문이지.”

“……”

“천무공자의 고향. 삼산현에 있는 그 범상치 않은 화전촌에 대한 이야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