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23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23)
‘은자촌?’
소호는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백검회주마저 소호의 출신 마을을 알아내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은, 단지 무공만 강할 뿐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넘은 애송이인 천무공자 때문이 아니며. 하물며 그런 천무공자가 이제 막 돈을 써서 모은 어중이떠중이 천무련 때문도 아니오.”
“……!”
분위기가 변했다.
바람이 분다.
냉혹하면서 싸늘한 기세.
분명히 친절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뱀처럼 차가운 분위기로 소호를 응시하는 기인(奇人)이 눈앞에 있다.
지닌바 무공이 조금 약하면 어떠한가?
청광이 내보인 기세는 부족한 무공을 채우고도 남는다.
강호 무림 전체에서 암약하는 자.
황실의 실권자인 왕진과 싸우면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백검회주가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내가 그대와 잘 지내고 싶은 이유는 딱 하나. 삼산현에 있는 화전촌, 그곳과 척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청광은 팔짱을 낀 채 자신의 턱을 진중하게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소호는 벌떡 일어섰다.
“나는 두렵지 않다? 내 고향과 내 가족들이 두려울 뿐?”
“비슷하오.”
경악과 분노가 심중에서 휘몰아쳤다.
청광의 지적은 소호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아버지.
그리고 가족.
소호의 마음속에서 그들에 대한 사랑과 함께 존재하는, 그들이 아니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미묘한 열등감을 자극한 것이다.
“어허, 흥분하지 마시오. 조심해야 할 것이오, 천무공자. 그대와 내가 앉아 있던 상자 안에는 백린탄이 한 가득 들어 있소.”
“……!”
“아! 백린탄이 뭔지는 알 것이라 믿소. 아까 그대가 놀라던 모습을 보면 분명히 백린탄이 뭔지 잘 아는 것 같았으니까.”
세 치 혀가 칼보다 무섭다고 하던가.
툭툭 내던지듯 내뱉는 청광의 말들이 하나같이 소호의 심기를 건드린다.
소호는 미간을 좁힌 채 그가 앉아 있던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상자 안에는 깨끗한 흰색 천으로 감싼 주먹만 한 구형의 물체 다섯 개가 알 수 없는 수레바퀴 같은 것들과 함께 깔려 있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부터 내부의 바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리릭― 끼리릭―.
바퀴가 돌면서 나는 소리가 심상치가 않았다.
‘기관 장치!’
소호는 무산학관 습림관에서 기관에 대한 여러 가지 대응책들을 배웠으나, 지금 이 순간 쓸 수 있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다.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가 문제인데. 백검회주가 자신만만한 것으로 봐서는 제법 셀 듯한데, 알 수가 없네.’
소호는 눈에 힘을 주고 상자 안의 모습을 살폈지만, 기관에 관한 지식은 갖고 있지 않았기에 위력까지 알아볼 방도는 없었다.
딸깍―.
그 순간, 청광의 발밑에서 뭔가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소호가 놀라서 바라보자, 청광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발 밑.
평범해 보였던 포구의 나무판자가 미묘하게 인위적으로 잘려 있는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조심하시오. 그 상자 안에 있는 것들은 우리 백검회가 가지고 다니는 백린탄보다 훨씬 예민하고 민감한 물건이오. 실수로 그 상자를 발로 걷어차기라도 했다가는……. 이 일대의 삼 장 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초토화될 것이오.”
“허?”
“그리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마시오, 천무공자. 내가 이 오른발을 떼어내도 그 상자에서는 백린탄이 터질 테지.”
청광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지만 소호 입장에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지금 그는 스스로 함정을 작동시켜서 인질이자 협박범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삼 장? 대단하네. 이걸 믿고 나를 불렀나 보죠?”
“그렇소. 나보다 강한 자를 아무런 대비도 없이 만날 수야 있겠소? 그건 내 성격과 어긋나는 일이라오. 이 정도는 대비를 해둬야지.”
“대비…….”
“난 말이오. 예전에 청성파가 당하고 나서 내 무공으로 언젠가 복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소. 그런데 웬걸? 세상에는 천무공자 당신 같은 인재들이 너무나 많더이다. 특히 왕진이 기르는 개들 중에서 혼돈이라는 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 무공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소.”
“……그래서 대비를 한다?”
“그렇소. 물론 힘도 기르겠지만 그건 조직의 차원일 뿐. 나는 힘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언제든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구나! 라고 깨달았다오. 그 결과 다양한 방법의 계책을 얻었지.”
짝!
“……!”
청광은 박수를 세게 한 번 부딪쳤다.
소호는 그 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 떨 수밖에 없었다. 반사 신경이 너무 빠른 것도 힘들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피할 뻔한 탓이다.
청광은 그 모습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이지. 그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소.”
“허?”
“내가 그러지 않았소? 우리가 비록 무공은 약해도, 마음속의 검만큼은 누구보다 날카롭다고.”
끼기긱!
청광이 웃는 것과 동시에, 삼십 보를 떨어져 있던 백검회의 무인들이 일제히 끝이 뭉툭한 화살을 겨누었다.
소호를 직접 노리는 것이 아니다.
소호와 청광이 앉아 있는 포구 전체를 노리고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겨누고 있었다.
아무리 천무공자라 불리는 소호라도 한꺼번에 화살을 막을 수는 없는 거리였다.
그들의 회주가 함께 죽어도 상관없는 건지. 화살을 겨누고 있는 그들의 눈빛에선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백검회는 제정신이 아니야. 백검회주가 같이 있는데도 폭파시킬 수 있다는 거지? 대단하네. 정말로.’
어이가 없어 울컥 화가 치솟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조금 냉정을 되찾았다.
‘백린탄에 현혹되지 말고 내용에 집중하자. 백린탄은 내가 난동을 피울까 봐 준비해 둔 거라고 치고……. 어쨌거나 나에 대해 다 알고서 왔다? 무공 때문이 아니라, 은자촌 때문에 나에게 양해를 구하는 거고?’
소호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생각을 더해 나갔다.
그는 삼 장 거리가 초토화된다는 청광의 말이 진짜인지 허장성세인지 궁금했으나, 광기로 가득 찬 눈빛 때문에 그 속마음을 꿰뚫어 볼 방도가 없었다.
“으음, 만약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기관이 터졌을 때 나만 당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물론. 나도 무사하지 못할 테지. 하지만 난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다오. 강호 무림에 명성이 높은 천무공자와 동귀어진이라. 그 정도면 죽더라도 괜찮은 명성을 떨친 것 아니겠소? 왕진에 대한 복수는 남아 있는 일검이나 다른 백검회의 가족들이 이뤄 주겠지.”
청광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기까지 했다.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판돈으로 걸 수 있는 광기.
맹목과 광신의 눈빛이다.
“재밌네요.”
소호의 마음도 활활 불타올랐다.
천무학관의 작은 호랑이.
천무공자 또한 승부욕이라면 지지 않는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온다면 망설일 이유도 없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 위축된다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다.
“이 기관이 터지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내가 백검회주의 목을 부러뜨리는 게 먼저일까?”
“하핫! 재밌는 승부가 되겠군.”
껄껄 웃는 청광과 팔짱을 끼고 있는 소호가 서로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언제든 발을 뗄 것처럼 무릎을 살짝 들어 올린 청광.
그리고 냉랭하게 눈을 빛내는 소호.
‘희한한 사람이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날 여기까지 데려와서, 이런 상황까지 만든 다음에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내가 바라는 것은 이미 이야기했고. 한 가지 그대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를 덧붙이겠소. 이걸 듣고 그대가 흥분할까 봐 대비를 해 두었을 뿐이오.”
청광은 옆에 내려놓았던 가면을 다시 얼굴에 쓰면서 말했다.
“천무공자. 그대는 우리가 집혼기를 어디서 얻었는지 아시오?”
“몰라요. 어디서 얻었어요?”
“화전촌.”
가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을 테지만, 소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청광은 웃고 있다.
“아까 말한 삼산현 화전촌에서 받아왔소. 그곳에 갔던 일검의 말로는 순순히 건네주었다더군. 왕진에게 복수할 때 힘이 되라면서. 고마운 일이지. 그 대가로 우린 적지 않은 돈도 내놓고 왔소.”
“돈……?”
“분명히 말하건대. 내 이름을 걸고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소.”
청광은 가면을 쓰고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정중하게 포권을 취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윽―.
“……!”
그는 상자 뒤에 놓아두었던 사람 머리통만 한 돌을 자신의 발 대신에 올려 두고는 산뜻하게 등을 돌렸다.
기가 막힐 만큼 간단한 해법이었다.
그는 백린탄이 터지지 않게 돌을 올려놓은 뒤에도 소호를 경계하지 않았다.
“다음에 또 봅시다, 천무공자. 내 말 뜻은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소. 집혼기에 대한 건 그대의 고향에서도 인정한 일이오. 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 봅시다.”
휘적휘적 가 버리는 청광의 뒷모습에선 미련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에 홀로 남겨진 소호의 충격은 거대했다.
“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소호는 치명적인 일격을 받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집혼기를 은자촌에서 받았다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변에 보는 눈만 없었어도 분명히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대체 왜! 아, 혹시? 이태산과 태성천 선배한테 받은 건가? 아냐. 그렇다 해도 마을에 도착했으면 할아버지들이……. 그리고, 아버지가 가만히 놔뒀을 리 없어. 대체 왜? 왜 저들한테 집혼기를 넘긴 거야? 밖에 나와서 살겁을 저지르라고? 백검회가 어떤 자들인지 보면 알 텐데?’
소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호는 충격과 동요를 감추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었다.
백검회주 청광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쓴 백검회 무인들이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내며 조심조심 옆에 놓인 상자를 정리하러 올 때쯤에야 소호는 정신을 차렸다.
“하아…….”
소호는 긴 한숨과 함께 일시적으로 생각을 그만두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시오.”
“이거 정말로 터지는 거예요?”
“그렇소.”
백검회의 무인들은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의아해 보였다.
소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쏘라는 놈이나. 쏘려는 놈이나…….”
몸에 닿았을 때 백린탄이 내뿜는 불꽃이 어떠했는지.
얼마나 끔찍했는지가 떠오른다.
전부 제정신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그 상황에서 웃었던 자신 또한 제정신이 아닌 것은 아닐까.
소호는 주변의 백검회 무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잔뜩 굳어진 얼굴은 북동쪽의 한 방향을 자연스레 바라볼 뿐이다.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뜨려 놓더라도 알 수 있는, 소호의 고향이 있는 방향.
“은자촌에 가 봐야겠어.”
소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확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