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24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24)
“예? 벌써 가셨다고요? 그럴 리가……!”
약재 냄새로 가득한 침상에서 눈을 뜬 녹림수로맹의 군사, 제갈륜은 양손으로 받아 홀짝거리던 탕약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눈을 아래로 깔고 깊은 생각에 잠긴 그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 그깟 탕약 호탕하게 들이키지 않고 뭘 그리 홀짝거려! 제사 지내냐!”
바로 옆의 침상에서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던 녹림 화부 방풍이 버럭 소리쳤다.
보광의원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성량인지라, 주변에 있던 하인들이 싫은 소리를 했음에도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탕약이 너무 쓰지 않습니까? 도저히 입에서 넘어가질 않아요.”
“너무 쓰지 않습니까? 이놈아. 그럼 몸에 좋은 약이 달아?”
“좀 달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이 약에 감초 좀 많이 넣어 줄 수는 없소? 없다고? 정해진 양이 있어? 그거 야박한 것 아니오?”
“못난 놈 같으니.”
방풍은 혀를 찼고, 제갈륜은 천하를 잃은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바쁜 일이 있으면 갈 수도 있지. 뭐가 그리 이상하다고 고민하고 난리야?”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왜?”
“제가 보기에 천무공자는 분명히 우리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 우연히 우릴 구해 준 게 아니다?”
“그건 우연이 맞죠. 하지만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어채든 우리 맹에 대해서든, 볼일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의원에서도 기다릴 줄 알았는데…….”
“그런데 가 버렸다, 이거지? 오히려 좋구만. 딴 뜻이 있어서 우릴 구해 준 건 아니란 거 아냐? 속 편히 은인으로 대접하면 될 일이다.”
방풍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듯 호탕하게 웃다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냈다.
“아이구, 이 사람들 참! 정양하셔야 한다니까! 왜 그리 소릴 질러 대요! 그것도 폐에 구멍이 난 사람이! 평생 못 걷고 싶어요?”
“아, 알았어! 알았다고!”
“빨리 죽이나 다 먹고 누워요!”
의원에서 일하는 중년의 부인이 깜짝 놀라서 혼을 내니, 천하의 방풍도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제갈륜은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면서도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 형, 아무래도 서신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로?”
“두 곳 다요.”
“두 곳이라면…….”
후루룩 다 마셔 버린 죽 그릇을 옆에 내려놓은 방풍이 눈을 빛냈다.
“설마?”
“예. 서역으로 통하는 비단길과 삼산현. 두 곳에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제갈륜의 결심은 확고했다.
풀어놓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총기 넘치는 눈빛이 결연하게 빛난다.
“수룡옥패는 네가 갖고 있으니. 알아서 하거라.”
방풍은 작게 웃은 뒤 벌렁 누워 버렸다.
“녹림수로맹의 최고수와 전대 최고수를 다 부르다니. 큰 사달이 나겠구만.”
“그게 제 목적입니다.”
제갈륜은 등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백검회 놈들. 녹림수로맹을 건드렸으니 사달이 한번 나 봐야죠.”
***
대도시의 고관대작이건 시골의 촌부건 가릴 것 없이 세상 모두가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지나가면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고, 더럽다면서 물을 뿌리거나 돌을 던지는 사람조차 존재한다.
그래도 그들은 흥겹게 살아간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오히려 항상 노래를 하며 기쁜 얼굴로 물벼락을 맞는다.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아이들이 돈을 던져도,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의 여인이 물을 뿌려도 그들은 군소리 없이 웃으며 도망칠 뿐이다.
하지만 무림 강호에서만큼은 사정이 다르다.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것이 그들의 지론이다.
강호인들 중에 거지를 무시하는 자는 없다.
만약 칼을 찬 강호인이 거지를 무시한다면 그건 딱 두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별호에 왕(王)자를 달 만큼 뛰어난 무인이거나, 아니면 강호에 대해 일면식도 없는 무지렁이거나.
정파 무림의 주축인 팔파일방.
그중의 당당한 한 축이 바로 거지들의 종파인 궁가방.
즉 개방(丐幇)인 탓이다.
“살겁이다. 살아남은 자는 없나?”
허리춤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매고 있는 나이가 지긋한 거지 노인이었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수염은 배꼽에 닿을 정도로 길었고, 뒤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은 반 넘게 하얗게 새어 있었다.
나이는 육십 정도 되었을까?
커다랗고 굵은 지팡이를 한 손에 쥐고 있기는 하지만, 허리는 꼿꼿했고 몸집도 건장했다.
얼굴도 쭈글쭈글한 주름투성이였다.
본래 나이가 많은 것인지, 아니면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제 나이보다 많아 보이는 것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그의 이름은 왕악.
강호에서 타구개(打狗丐)라 불리는 개방의 장로였다.
“살아 있는 자는 없습니다.”
주변을 살피고 돌아온 젊은 거지들이 공손하게 답했다.
“비록 도적질이나 하던 자들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이토록 단칼에 모두를 베어 버리다니. 무서운 검술이다.”
왕악은 혀를 차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신으로 다가갔다.
울창한 산림 속.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박살 나고 뜯겨져 나간 목책 사이로 빨래처럼 널브러져 있는 시신이었다.
왕악은 시신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려 보았다.
명문혈을 정확히 꿰뚫은 검끝이 붓으로 화선지에 꽃을 그리듯 살포시 흉터를 하나 남겨 놓고 있었다.
“매화검……!”
왕악은 직감했다.
이곳 산채 안에 있는 모든 시신들에는 매화검의 흔적이 똑같이 남아 있을 것이다.
“매화신검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인가? 놀라운 성취로다.”
왕악은 자신이 데려온 하북 분타주와 그 아래의 삼결 제자들에게 지시를 내려 청호채 전체를 샅샅이 훑어서 살펴보도록 시켰다.
시신은 함부로 수습하지 않았다.
시신을 치우면 흉수가 어떤 경로로 움직였으며, 어떤 상황에서 무공을 사용해 격살했는지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놀랍구나. 놀라워.”
왕악은 감정 표현을 즐겨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이 발자국 좀 보거라. 깊이도 일정하고 거리도 일정하고, 한 수 한 수가 정확하구나! 오행매화보에서 이어지는 오행매화검이라니. 이게 이리도 정확히 시전될 수 있던가!”
왕악은 바닥에 남은 흔적들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천천히 그 뒤를 쫓아갔다.
왕악의 두 눈에는 청호채가 습격당하던 때의 순간들이 실제로 보이는 듯했다.
어디에서 어떤 무공을 사용했고, 어느 정도의 속도로 청호채를 돌파하며 질주했는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신이 하나로 일체되었으며, 진기가 전신에 융통무애하게 흐르는구나. 화산의 홍복이로다!”
도적 떼의 시신은 정도 문파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왕악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게 청호채라고 한다면 더욱 더 그렇다.
“장강용왕이 그토록 힘썼음에도 유일하게 옛날 버릇 못 고치고 못된 짓을 벌이던 곳이 여기였지. 잘됐구나. 잘 됐어. 장강용왕 말고 녹림마왕을 믿더니. 그러니 천벌을 받은 것이다. 이놈들아.”
천천히, 하지만 단 하나의 단서도 놓치지 않고 흉수의 발걸음을 추적하던 왕악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하북 분타주와 삼결 제자들이 탐색을 중단하고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던 탓이다.
“이놈들아. 단서를 안 살피고 뭘 하고 있어?”
“장로님. 그것이…….”
개방 하북 분타주.
독개(毒丐) 오장방이 퉁퉁한 뱃살을 출렁거리면서 우물쭈물했다.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후촌이 조금…….”
“후촌? 도적놈들의 가족놀음?”
“예. 그곳이…….”
왕악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오장방의 모습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그는 어물쩍거리는 방도들을 거칠게 밀어젖히면서 앞으로 나섰다.
왕악의 불같은 성질을 아는 개방도들은 감히 그를 말리지 못했다.
왕악은 십성의 취팔선보로 순식간에 시체투성이인 산채를 넘어 후촌에 도달했다.
“허어.”
처음으로 감탄이 아닌 탄식이 흘러나왔다.
후촌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사람들이 대다수인 곳이다.
도적들의 아내나 자식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후촌이 피바다였다.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핏물이 시선이 닿는 마을 전체에 색을 칠하듯 뿌려져 있었다.
작은 몸집의 시신들이 길목에 누워 있는 모습은, 지켜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안타깝구나.”
왕악 정도의 경험을 쌓은 개방의 노고수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자신과 똑같은 취팔선보로 따라온 개방도들이 들을 수 있도록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매화신검이여. 저승에서 통곡할 일이 생기고 말았소. 매화나무 아래에서 검로에만 매진했다면…… 분명히 별호에 최소한 왕(王)이 붙을 수 있는 재목이었거늘.”
“장로님?”
“독개. 흉수의 정체를 아는 자가 얼마나 되느냐?”
“오매검협은…… 백검회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사실로 드러났으나, 방주께서 화산의 정보는 감춰 주라고 말씀하셔서 저희가 최대한 정보를 막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사실을 아는 자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입니다.”
“그래? 이곳의 흉수는 그놈이 확실하지?”
“예. 백검회에서 이 정도의 검공. 오매검협 말고는 없습니다.”
“그렇군.”
왕악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검마(劍魔)다.”
“예?”
“오매검협이 아니다. 화산에서 검마가 탄생했구나. 앞으로는 별호에 협자를 붙이지 말거라. 그럴 자격이 없는 놈이다.”
왕악은 도적 떼의 죽음에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공도 익히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죽음에까지 ‘도적’이란 이유로 태연할 수 없었다.
이제는 정파 출신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힘에 사로잡힌 악적.
사도가 따로 없는 마인(魔人)이 아닌가.
그는 과거에 같은 정파의 무문이었던 화산파 출신에게 갖던 동정심을 모두 버렸다.
왕악은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방도들은 듣거라. 화산검마…… 아니, 그조차 신검에 대한 모욕이군. 오매검마에 대한 정보를 풀고 하오문과 동창에도 흘리거라. 이제 오매검마는 개방이 감싸 줄 필요가 없는 놈이다.”
“예!”
동전 한 푼 가진 것이 없더라도 개방도가 가슴속에 유일하게 지녀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의(義)와 협(俠)이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포권을 취하며 왕악의 의지를 받들었다.
“방주께는 내 친히 보고를 드리겠다. 녹림수로맹에도 소식을 전해 주거라. 오매검마가 청호채를 몰살시켰으며 장강으로 향하고 있다고. 목표는 아마 녹림수로맹의 본거지인 백경채가 될 것 같다고 말이다.”
“예!”
타구개 왕악은 침중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벌어지겠구나. 장강이 붉게 물들겠어.”
왕악과 오장방을 시작으로 개방의 거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장강.
곧 벌어질 큰 싸움을 대비하는 무인들의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
세상이 갈라진다.
검술이 지고한 경지에 오르면 저 하늘 위의 달도 벨 수 있듯이, 천의무봉한 경지에 오른 창술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넘어 조서인의 영혼마저 꿰뚫어 버렸다.
“아아……!”
조서인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온 시야를 압도하는 절경을 보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저 감탄 또 감탄.
영혼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즐거운 비명을 내지를 뿐이다.
“이것이 일연적룡무. 제일식이다.”
스윽―.
장기린은 창끝을 아래로 살짝 내렸다.
사실 창이라고 불리기도 민망한 나무막대기였으나, 조서인은 만족한 듯 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방금 눈으로 본 움직임을 떠올리는 듯 한참 동안이나 중얼거리면서 제자리에 서있었다.
“핵심은 허리와 다리. 아니, 내력도……. 깨달음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휙― 휙―.
조서인은 곧바로 손바닥을 조금씩 조정하며 장기린의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미 두 눈에 무공 말고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너는 정말로 소호와 정반대의 성격이구나.”
“네?”
조서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동그란 두 눈을 끔뻑거렸다.
“하핫, 네. 저기, 제가 많이 부족해서…….”
“그런 말이 아니다.”
“예?”
“성실함이 과할 정도구나.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추룡이 그나마 비슷하게 열정적이었으나 그 녀석은 요령이 있었지. 운화는 성실해 보였으나 이해가 빨라서 재능으로 덮는 성향이었고.”
장기린은 웃으면서 조서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다. 일손을 돕는 것은 할 만하더냐?”
“예! 즐겁습니다!”
“적왕한테 밥 주는 것도?”
“예!”
“더덕을 캐는 것도?”
“어…… 음, 예!”
“장작을 패는 건?”
“그건…… 음, 할 만합니다!”
장기린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도 네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