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00화 (429/686)

12권 25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25)

“어릴 때부터 마을 일을 돕곤 해서 이런 일은 익숙합니다!”

“그래?”

“네.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서, 늘 이웃의 일을 돕고 밥을 얻어먹었어요. 아버지는 그런 걸 싫어하긴 했지만요. 그런데 무인의 자존심이 밥을 먹여 주진 않잖아요?”

조서인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잡초 뽑기든 파종이든 모내기든,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저는 웬만한 건 대부분 할 수 있어요! 일손이 필요한 시기에는 마을에서 절 데려가겠다고 싸움도 났었거든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서 있는 모습에서 자부심마저 흘렀다.

자신은 어떤 잡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조서인의 어린 시절, 이웃들 중 그의 잡일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덕분이다.

상산 최고의 잡일꾼!

조서인이 유일하게 자신감을 갖고 말할 수 있는 분야였다.

“그렇구나. 기특한 일이다.”

장기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 어릴 때부터 일을 많이 하면 영악해지기 마련인데, 조서인은 아직까지도 우직하고 순수하니 그의 천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장기린에게도 지독히 배고팠던 과거가 있지 않던가.

그는 옛일들을 떠올리며 조서인의 말에 공감했다.

“배고픔은 칼보다 무서운 위협이지.”

“맞아요! 아버님도 그걸 아신다는 게 신기하네요.”

“나는 네가 더 신기한데.”

장기린은 잔잔하게 웃었다.

“마을의 일은 결과적으로 너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열심히 해 주거라.”

“예!”

“자, 이제는 직접 제 일식을 사용해 봐.”

“예!”

조서인은 장기린이 건네주는 수련용 목창을 들고 정면을 겨누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일연적룡무. 제 일식.”

스윽―.

정중동의 움직임으로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창끝이 한순간 공간을 가르며 정면으로 쏘아진다.

피잉―.

움직임은 한순간.

중간 과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극한 쾌공이 일연적룡무 제 일식의 요체.

쒜에에엑―!

팡!

바람이 길게 갈라지는 소리 끝에, 작은 폭음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일순간의 진공 상태가 된 창끝에서 공기가 터져 나온 것이다.

“아냐…….”

조서인은 초식을 시전하자마자 잘못된 점을 알아챘다. 그는 극도의 집중력으로 자신의 문제점을 파악했다.

“이건…… 아니야.”

애초에 장기린이 보여 준 무공을 단 한 번에 따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지만, 그래도 조서인이 보기엔 흉내조차 제대로 못 낸 수준으로 보였다.

“이래서야 조금 빠른 찌르기일 뿐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힘을 최대한 쥐어짜야 할까……? 아냐, 깨달음이 필요한 것 같은데. 좀 더 생각을…… 아냐, 일단은 다시 한번 해 보자.”

조서인은 다시 한 번 일연적룡무를 시전해 보았다.

쒜에에엑―.

콰직!

“읍?”

조서인은 손에 들고 있던 목창을 부숴 버리고 말았다.

강인한 내공과 신체 능력을 버티지 못하고, 손으로 잡은 부분부터 짓뭉개지듯이 갈라지면서 창이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으앗?”

깊은 집중 상태에 빠져들던 조서인은 강제로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황하여 손에서 쪼개진 목창과 장기린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으니, 장기린은 어디서 났는지 똑같은 크기의 철창을 휙― 하니 던져 주었다.

“감사합……니이익?”

조서인은 순간적으로 어깨가 빠질 뻔한 것을 겨우겨우 붙잡았다.

“으어?”

조서인의 팔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깜짝 놀라서 양손으로 붙잡은 철창의 무게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어떻게 이렇게 무거운 창이……?”

“대장간에 계신 광 어르신이 만들어 준 수련용 창이다. 순도가 높은 묵철을 써서 일반 철창의 세 배 가까이 무게가 나간다더군.”

“아……!”

“검선께서 네게 준 심법은 네 몸을 바꿔 버렸다. 적응될 때까지는 힘 조절이 힘들 테니 차라리 무거운 걸 들고 연습해.”

“예!”

조서인은 장난감을 선물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손에 들린 철창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펴보았다.

“일연적룡무…… 제일식!”

쒜에에에에엑―!

퍼엉!

전력을 다해 힘을 불어넣었음에도 철창은 그 힘을 다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탄성을 살려 오히려 위력을 높여 주기까지 했다.

공기가 터져 나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무기로 막았다면 무기를.

방패로 막았다면 방패를 박살 낼 것 같은 위력적인 모습이었다.

“아냐, 이건 아닌데……. 으음, 투로는 맞는데, 그럼 내력의 흐름을…….”

홀로 중얼거리던 조서인은 점점 더 자신의 무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 번의 시연이 열 번이 되고, 그 횟수가 삼십 번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후반부에는 근처에 있는 바위를 때리기 시작했다.

타점에 물건을 맞추는 것이 동작을 맞추는 데 더욱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장기린이 사라진 뒤에도 조서인의 연습은 멈출 줄을 몰랐다.

동틀 무렵에 시작된 수련이 끝난 것은 해가 진 후, 전력을 다한 조서인이 탈진해서 다리가 풀린 뒤였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면서 멍하니 앉아 있는 조서인에게 장기린이 다시 나타나 매끈하게 잘 깎인 목창을 던져 주었다.

“마지막으로 힘을 빼고 한 번만 더 해 봐라.”

“……!”

조서인은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났지만, 그래도 막상 창을 잡으니 군더더기 없는 자세를 취했다.

“흐읍!”

거칠던 숨을 겨우 가라앉힌 조서인이 왼쪽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창을 잡은 오른손을 허리에 붙이고 있다가 앞으로 내찔렀다.

“힘 빼!”

“……!”

장기린이 툭― 하고 건드린 오른쪽 무릎 부근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온몸의 균형이 달라졌다.

발가락 끝에서 시작된 회전이 자연스레 무릎과 고관절, 허리를 타고 손끝까지 타고 올라왔다.

후우우웅―.

지금까지와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조서인의 창이 지금까지는 바람을 갈랐다면, 지금은 주변의 바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천을 갈고리로 걸어서 끌어당기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기운들이 창의 뒤를 쫓아오는 느낌이다.

텅.

창끝이 닿는 곳.

더덕밭 근처의 커다란 바위다.

철창으로 찔러도 흠집밖에 안 남던 바위가 목창의 끝에 닿자 커다란 나선형의 흉터를 만들더니 이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아……!”

콰드드득―.

우르릉―.

나무막대로 바위를 찔렀을 뿐인데 바위가 산산조각 나다니.

심지어 힘을 뺀 탓에 내공은 별로 싣지도 못했다.

조서인은 자신이 시전한 무공의 위력이 실감나지 않아서 멍하니 손에 들린 목창을 내려다보았다.

“그 감각을 기억했나?”

“네. 이게…… 일연적룡무…….”

“아니.”

힘의 여운에 젖어 있던 조서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장기린은 엄중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연적룡무는 검선께서 깨달은 무리(武理)와 내가 전장에서 얻은 요령들을 하나로 합친 무공이다. 그중에서도 제일식은 잡다한 모든 것을 뺀 기본 중의 기본을 목표로 했다.”

조서인은 장기린의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머릿속에 새겨 녛었다.

“기본 중의 기본……!”

“내 손에 들린 창끝이 상대방의 몸에 닿는 것만을 생각해라. 점(點)과 점이 이어지면 선(線)이 된다. 중요한 건 그 선에 방해되는 것들을 모두 꿰뚫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장기린은 조서인으로부터 목창을 건네받아 아래를 향해 툭― 하니 내질렀다.

푹.

지팡이 끝으로 흙을 찌르는 것과 같다.

“……!”

조서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장기린이 가볍게 내찌른 목창의 끝이 손바닥만 한 돌멩이의 가운데에 한 치의 낭비도 없는 원형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조서인은 근육의 경련이 일어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돌멩이를 들고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매끈했다.

명장(名匠)이 돌멩이에 섬세한 세공을 한 것과 같다.

엄지와 검지를 맞잡은 크기의 동그란 구멍으로 돌멩이 너머가 선명하게 보였다.

“힘을 빼라. 낭비하지 마라. 숨 쉬듯이 가볍게 초식을 전개해라. 바위에 나선형의 흉터를 남기는 게 아니라, 매끈하게 한 점으로 힘을 모아서 꿰뚫을 수 있도록 수련해라. 우선은 한 치다. 바위에 한 치의 구멍을 뚫어내라.”

“아……!”

“그러면 너는 적룡일연무의 일성을 성취한 것이다.”

장기린의 말은 조서인에게 하늘의 말씀과도 같았다.

그는 부들거리는 몸으로 꾸역꾸역 일어나서 장기린에게 깊게 포권을 취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사부님!”

조심스레 호칭을 바꿔 본 뒤, 조서인은 장기린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문파를 일으킬 생각은 없다.”

“허나…….”

“서인아. 호칭은 상관없다. 나는 너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야.”

사부라고 부르든, 부르지 않든 상관없다는 듯한 장기린의 태도는 분명 일반적인 무림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제게는 사부님이십니다.’

절친한 친구인 소호의 아버지라는 관계로 처음 인연을 맺었으나, 조서인에게는 무산학관에서도 만나지 못한 참 스승이 바로 장기린이다.

조서인은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정중한 인사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객잔으로 가서 잘 챙겨 먹고 쉬거라. 운찬이 맛있는 걸 해 놓겠다던데.”

“아……!”

“풍운객잔이 밥은 맛있지?”

“최고입니다!”

비할 바 없이 맛있는 소면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으며, 그 외에도 가끔 해 주는 요리들은 천상의 맛을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행복해도 좋을까 걱정이 될 정도라고 조서인은 생각했다.

“열심히 해 봐.”

“예!”

조서인의 힘찬 대답과 함께 은자촌의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

경쾌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갈색의 멋진 털과 갈기를 지닌 명마를 타고 있었다. 말은 덩치도 크고, 발굽도 단단해서 가파른 산길도 개의치 않고 편안하게 올라갔다.

말을 타고 있는 청년은 말 위에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승마에 익숙한 태도였다.

그는 느긋해 보이는 모습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보고,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햇빛을 가려 주는 죽립을 푹 눌러 쓰고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는 십 리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것처럼 화려한 흰색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배고프네. 오랜만에 운찬 삼촌 소면이 먹고 싶다. 이제 다 와 가는 것 같은데……. 응?”

기지개를 펴던 죽립을 쓴 청년.

소호는 쓰고 있던 죽립을 옆으로 젖히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시사철 눈에 덮여 있는 백산과 그 건너편에 있는 황량한 흑산.

그리고 그 사이에서 신령하고 생생한 생기를 발하는 녹색의 성산까지.

삼산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분지에 거의 다 도달했으니, 이제 곧 풍운객잔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소호가 기억하던 풍경이랑 달라진 점들이 있었다.

“뭐야, 길이 왜 이렇게 깨끗해? 누가 매일 쓸었나?”

항상 낙엽과 돌멩이들로 반쯤 가려져 있던 오솔길이 이제는 완연히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는 깨끗한 산길로 변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길의 양옆으로 건장한 성인 남성의 몸통만 한 크기의 바위가 마치 누군가 정원의 조경을 꾸민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여 있었다.

“잠깐?”

히히힝―.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춰 세운 소호는 바위의 앞으로 한 걸음에 다가갔다.

“누가 바위에 이런 구멍을 뚫어 뒀어?”

선명하고 동그란 원형의 구멍이 바위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있었다.

“구멍 안에 향불이라도 꽂는 건가? 왜 이런 구멍을 뚫은 바위를…….”

그 깊이가 무려 두 치 반.

검지가 하나 쑥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깊이다.

“이렇게나 많이 뒀어?”

어림잡아도 수백 개.

소호는 길고 긴 산길 끝.

시야가 닿는 곳까지 이어진 바위들의 행렬을 놀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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