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01화 (430/686)

12권 26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26)

충신이던 양사기가 죽은 후, 황실에서 태감인 왕진의 권세를 넘어서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북경 왕씨 집안의 대문에는 늘 커다란 상자를 싣고 온 관인들의 행렬로 분주했다.

하인들은 종이와 세필을 든 채 사람들을 신분과 도착한 순서에 따라 분류했고, 애초에 신분이 높거나 아니면 일찍 와서 오랫동안 기다린 자들부터 황실의 실세인 왕진 태감을 잠깐이나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만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인사를 하지 않아 왕진 태감의 눈 밖에 나는 건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양사기라는 큰 별이 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환관들이 과도한 힘을 갖는 걸 막겠다면서 상소문을 올리던 관인들도 꽤나 많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흑시군이 무림 강호를 재편하겠다며 돌아다니던 즈음에, 역모를 꾸미던 집단이라면서 하남 인근의 유림(儒林) 일부가 줄줄이 잡혀 들어왔다.

당사자만 따져도 수백이며, 그들과 연관된 가족들을 합하면 수천이 넘는다.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야 할 판결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형부에서 제대로 된 판결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모든 증거와 판결문이 준비되어 있었던 탓이다.

결국 잡혀 들어왔던 학자와 관인들은 모두 구족멸살의 형을 받았다.

하남 관청에서 풍기는 피 냄새가 하북까지 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공포로 가득 찬 시절이었다.

학살이고, 본보기였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 이후에도 가끔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리며 시위하듯 석고대죄를 하는 관인들이 나왔으나, 모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화려하게 핀 꽃이 열흘을 가기 어렵듯, 언젠가 그 권세가 기울 것은 자명한 일이었으나, 화려하게 꽃이 핀 열흘간은 온 세상이 붉게 물드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황제를 어린 시절부터 보필한 황사로서 비할 바 없는 총애를 받으며,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온갖 정보를 모으는 밀정 집단인 동창의 지휘권까지 가지고 있는 왕진이다.

사람들은 공포로 가득 찬 마음으로 왕진에게 별명을 붙였다.

황실에 자리를 잡고 단단하게 똬리를 틀어 버린 한 마리의 이무기.

언젠가는 승천해 용의 목마저 물어뜯을 무서운 괴물.

황실의 대망(大蟒)이라고 말이다.

달이 중천에 뜬 시각.

왕씨 세가를 찾아왔던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자 커다란 세가 내부는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푹신한 보료에 앉아 양옆에 산처럼 쌓인 보물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왕진은 따뜻한 등불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대인?”

두툼한 장부에 세필로 오늘 들어온 선물들과 내빈 명단을 정리하던 청년.

날이 갈수록 왕진을 닮아가는 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왕진을 바라보았다.

“선, 오늘도 고생했어요.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도록 해.”

“하지만 대인, 아직 정리가 안 끝났는걸요?”

“괜찮아. 내일 마저 하도록 하렴. 그리고 너라면 이미 명단과 선물 내역 정도는 다 외웠잖니?”

선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죠. 피곤하세요? 보약을 하나 지어 올리라고 할까요?”

“아니,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으음, 그럼 저는 침소로 돌아가서 마저 정리하고 잘게요.”

“그래 주겠니? 오늘은 좀 피곤하구나.”

왕진은 몇 개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손을 내저었다.

선은 납득이 가질 않는지 조금 우물쭈물하기는 했으나, 군말 없이 장부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고요한 방 안에 줄지어 늘어놓은 등불만 가끔 일렁거리며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왕진은 고개를 들고 천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준. 왔지?”

깜빡. 깜빡.

등불이 몇 번 일렁거리고 나자 어느 순간 투박한 베옷을 입은 청년이 왕진의 앞에 서 있었다.

귀신같은 몸놀림.

보통 사람이었으면 경기를 하며 놀랄 상황이었으나, 왕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백검회를 쫓던 일은 잘 안 되었나 보구나? 백검회주는 무력은 변변치 않아도 영리한 자야. 잡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말했잖니.”

“얄미운 자입니다.”

홍안의 소년 시절부터 왕진을 대신해 검을 휘둘러 준 충복.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는 백귀(白鬼)라고 불렸으며, 지금은 사흉의 일인인 혼돈으로 불리며 모든 이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걸출한 검사.

유준이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며 싫은 기색을 보였다.

“후훗, 늘 외진 산속에 숨어 신산귀계를 펼치니 너와는 상성이 맞지 않는 자야. 그리 속상해할 것 없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베겠습니다.”

“너는 분명히 그렇게 해 주겠지. 하지만 지금 나는 네게 원하는 일이 따로 있단다.”

쪼르륵―.

왕진은 자그마한 청동화로 위에 얹어 두었던 따뜻한 찻물을 정갈한 찻잔에 따라서 유준에게 권했다.

유준은 잠시 망설였으나, 왕진의 앞에 공손하게 앉아 찻잔을 받아 들었다.

“네가 사흉이 되겠다고 나에게 말했을 때 나는 깊게 고민했었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니?”

“……예.”

“정말?”

유준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께서는 저를 사신(四神)으로 만들지 사흉(四凶)으로 만들지 고민하셨으니까요.”

“후훗, 그랬구나.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이었어.”

왕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진실된 웃음이다.

왕진에게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역시 준이다. 너는 나를 늘 잘 따라 주었지. 그렇기에 사흉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흉은 사신을 만들기 위한 제물에 불과하니까.”

마침내 왕진의 입에서 신수 계획의 비사(祕史)가 흘러나왔다.

아무도 없는 방 안.

유준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왕진의 말에 집중했다.

“그렇지만 네가 들어가지 않으면 사흉을 통제할 방법이 없더구나. 도철은 영리하지만 그릇이 작고 난폭하며, 궁기는 무게감은 있지만 맹목적이고 시야가 좁지. 도올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고뭉치고.”

“높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나 나는 너를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구나. 후훗, 신기한 일이야. 이제 세상을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하는데도 늘 사람이란 존재는 내 예상을 벗어나 버리는구나. 정말 신기한 일이야.”

쪼르륵―.

스스로 찻물을 따라서 입에 가져가는 왕진의 얼굴에 씁쓸한 회한의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니?”

“전혀.”

유준은 즉답했다.

“저는 대인께 구원받았고, 대인 덕분에 더욱 강해졌습니다. 원망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후훗, 또 충직한 신하처럼 구는구나. 난 네가 좀 더 솔직해지길 바란단다.”

“…….”

“윗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아랫사람이 누군지 아니?”

유준이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젓자 왕진은 나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자.”

“아…….”

“그런 자는 다루기가 까다롭단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걸 주면서 일을 시켜야 하는데, 원하는 게 없는 사람에게는 일을 시키기가 까다롭거든.”

유준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때론, 그저 숨을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자가 있는 법입니다.”

“후훗, 재밌는 이야기지만 그걸로는 이제 부족하단다.”

왕진은 찻물을 마치 술을 마시듯이 들이켰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도올은 갑자기 철이 든 작은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어 버렸고, 도철도 똑같은 호랑이에게 쫓겨서 도망치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파랑새에게 잡혀 버렸단다. 궁기는 숨어 있는 고대의 괴물을 찾겠다고 산속에 들어갔다가 소식이 끊겨 버렸지.”

현재 뿔뿔이 흩어져 버린 사흉의 거취에 대한 비유였다.

왕진은 유준을 지그시 응시했다.

“남은 건 너뿐이구나.”

“소호는…….”

“이젠 포기할까 한다.”

유준은 입을 몇 번이나 벙긋거리다가 아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네 마음은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 아이가 황실을 위해 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폐하께서도 좋아하실 거고, 전 무림을 지배할 황금 갑주를 입은 장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야.”

“아……!”

“황실의 명을 받아 당당하게 무림을 체계적으로 지배하는 모습! 그야말로 만부부당! 내가 꿈에 그리던 무림의 모습이지.”

“대인, 소호는 버리기엔 아깝습니다. 도올의 혼백도 모두 잡아먹지 않았습니까? 신수화를 제때 시켜 주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입니다. 제가 언질을 주었으니 다시 한 번 설득해 보겠습니다.”

“정말로 가능할까?”

“가능합니다.”

“신수비처를 잃었듯, 또 다른 큰 피해를 우리에게 입히는 것은 아닐까? 무림의 재편이 거의 마무리된 지금, 사흉의 필요성은 끝났단다. 때를 맞추지 못하면 없느니만 못해.”

본래 왕진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자그마한 생채기 하나라도 새긴 자는 절대로 잊지 않고 되갚아 주는 인물이었다.

그런 왕진이 지금까지는 침묵하며 참아 왔다.

작은 호랑이가 그저 철이 없을 뿐이라 생각하며, 어떠한 심한 장난도 웃으면서 넘겨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구나.”

“대인……”

“하지만 좋다. 네가 그렇게까지 아쉬워하니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도록 하자.”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준아. 너는 소호에게 죽을 생각이었지?”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왕진의 눈빛은 서늘하고 차가웠다.

상대방의 내심을 꿰뚫어 보는 황실 대망의 용안(龍眼)이다.

감히 거짓을 고할 수 없어, 유준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에 크게 감명 받았는지는 모르나, 너는 그 아이와 무인답게 겨루고 죽고 싶어 하는 듯 보이더구나.”

“…….”

“이제는 안 된다.”

“대인?”

“이미 인연이 어긋났을 뿐더러, 네게는 새로운 역할을 줄 생각이기 때문이지.”

“역할이라고 하시면……?”

왕진은 의아해하는 유준에게 충격적인 결정을 전했다.

“너도 황금 갑주를 입거라.”

“……!”

“다행히 사흉 중의 혼돈은 가면을 쓰고 행동해 왔지. 네가 가면을 벗더라도 네 과거를 생각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도 사신수가 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

유준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경악했다.

“저는 잔인하고 난폭한 짐승에 불과합니다. 검으로 따지면 귀기(鬼氣)와 피 냄새를 내뿜는 마검입니다.”

“하늘을 나는 신령한 용도 화가 나면 괴력난신 요물이 되어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그 반대가 안 된다는 법은 없겠지.”

“대인……!”

“소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싸우고 싶지는 않니?”

유준은 충격을 해소하지 못한 채 말문이 막혔다.

“네가 먼저 황금 갑주를 입거라. 그리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며 소호를 설득해. 모든 게 어긋나서 네가 갑주를 입기 싫어진다면…….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왕진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절박했다.

“적절한 신분과 거처는 내가 구해 보마. 너는 그저, 내 곁에서 내게 힘이 되어 주렴.”

거절을 거부하는 단호함에 유준은 순순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이 그의 온몸을 옥죄고 있었다.

“예, 대인.”

***

몇 달 후, 황실에서 펼쳐진 연회에서 ‘무언가’를 본 황제가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했다는 소문이 조용히 퍼져 나갔다.

그것은 강하고 무시무시하여, 황실의 힘을 보여 줄 수호신이라고 하였다.

황실의 정예 금의위 일백 명이 손도 대지 못하고 패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날 연회에 참석했던 무림 명문 무파의 명숙들이 비참한 몰골로 업혀 나왔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중에는 소림의 무승도 있었으며, 무당의 도인들도 있었다고 했다.

황금 갑주를 입은 황실의 수호신.

무림 강호를 위협할 또 하나의 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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