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1화
제30장 적자지화(嫡子之火) (1)
평범한 날이었다.
주변을 시찰하고 돌아온 소호는 햇살 좋은 방 안에서 느긋하게 뒹굴다가 섭주해와 차를 한 잔 마셨다.
천무련을 만들기로 한 뒤로 그들은 늘 이런 식의 생활을 했다.
섭주해는 사람과 금전을 다루고, 소호는 주변의 인심을 다룬다. 두 사람은 종종 이런 자리를 마련하여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대미미는 암흑가 쪽의 일로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흘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찾아와서 함께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다.
용정차의 향을 느끼면서 별거 아닌 일로 키득거리던 중이었다.
섭주해는 소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질문을 툭 내뱉었다.
“형은 왜 창을 싫어해요?”
질문이 꽤나 뜬금없었던 탓에 소호는 두 눈만 끔뻑거렸다.
“내가? 창을?”
“네.”
“안 싫어하는데?”
소호는 오히려 섭주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잡히는 감촉이 편해서 박도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십팔반병기들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소호에게 있어 박도나 창이나 병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왜 그런 질문을? 아, 혹시?’
소호는 예전에 진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성명병기를 뭐로 할지 정하던 중에 진구도 그런 느낌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이야기구나.’
“흐음.”
소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섭주해는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 온 소호나 대미미만이 알아볼 수 있는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태도’로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아뇨, 형은 창을 피하는 것 같아요.”
“내가? 어째서?”
“그렇지 않으면 무림 최고, 아니, 어쩌면 역대 강호 무림 역사상 최강으로 손꼽히는 창술사(槍術士)가 아버지인데 창을 쓰지 않을 리가 없죠.”
“으음, 역시 그 이야기였어?”
소호는 팔짱을 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아니에요?”
“응, 아냐.”
“그럼 왜 창을 안 써요?”
“…….”
“그냥, 박도가 더 손에 편해서?”
섭주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소호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십팔반병기 중에 못 다루는 병기가 없는 만병지련자(萬兵之戀者)가?”
“진짜야. 이유는 그것뿐인데?”
“소호 형.”
“응?”
“형은 아버님, 그러니까 큰 삼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아버지는…… 대단하시지.”
장기린.
풍운객잔의 주인.
어린 시절에는 몰랐지만, 철이 들면 들수록, 무림 강호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존재감은 크게만 느껴졌다.
“은자촌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나와 보니 알겠어. 도대체 무림 강호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사람 중에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왜 하나도 없어?”
“그건 그렇죠.”
“대단한 것 같아. 전에 가면철왕 아저씨가 그러더라고. 네 아버지는 세상을 한 번 구했다고.”
“하하핫.”
“세상에, 이게 말이 돼? 난 은자촌에서 나와서 좀만 활약하면 우리 가족 중에 내가 제일 유명한 사람이 될 줄 알았어.”
소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삐쭉였다.
“뭐, 옛 무림 말고 지금의 무림에서만 따지면 그렇게 된 거 같기도 한데요?”
“턱도 없는 소리야. 기린이 뭐야, 기린이. 아마 그 이름도 사람들 외우기 쉬우라고 지었을 거야.”
“하핫, 뭐라고요?”
“저기 자금성에 가서 황제한테 물어봐도 아버지를 안다고 대답할 것 같단 말이야. 무쌍귀를 아냐고 물어보면 도대체 모르는 사람이 없어.”
소호는 한숨을 내쉬었고, 섭주해는 그런 소호를 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이제 보니 형은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었군요?”
“뭐, 모든 아들들이 그런 것 아니겠어? 무뚝뚝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지.”
“그게 진심이라는 게 문제네요. 보통은 투정에 그치는데 말이죠.”
“그런가?”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 아버지의 눈이 너무 높아서 대륙을 뒤흔들 정도의 인물이 아니면 차지 않고요? 위명을 떨치는 영웅이 되자니 그 길이 너무 힘들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그렇죠?”
“그래! 바로 그거야.”
소호는 자신의 마음에 공감하는 섭주해에게 박수를 쳤다.
막힌 체증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이보다 더 상쾌한 기분은 느낀 적이 없었다.
“창을 잡지 않은 것도 그래서군요? 그걸 잡으면 아버지를 따라 잡기 너무 힘들 것 같으니까. 아예 다른 길을 택한 거였어요.”
“그건…… 그런가?”
“만약에 형이 지략을 익히는 걸 좋아했다면 저는 아마 지략은 기초 소양 정도로만 익히고, 다른 길을 팠을 거예요. 기관진식이라든가, 무공이라든가. 가족 중에 나보다 똑같은 걸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불편하죠. 굳이 그 길을 가야 하나 싶기도 하고요.”
소호는 섭주해의 말에 의표를 찔려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의식하고 행한 것은 아닌데, 섭주해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았다.
“아버지가 워낙 잘하는 거니까……. 그냥 창을 피한 걸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섭주해는 조용히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반개하여 밑을 내려다보는 눈에서 깊은 고민과 지성이 느껴졌다.
“창을 딱히 싫어하지 않는데, 게다가 익히기 좋게 완벽한 교본이 근처에 있는데도 굳이 창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유는 그것뿐일 테지요.”
섭주해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건 저만의 추측일 뿐이니 틀릴 수도 있어요. 그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형이 창을 쥐지 않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은 것 같아 이유를 찾아봤을 뿐이죠.”
“그렇구나.”
“하지만 소호 형.”
섭주해는 차분한 얼굴로 진지하게 소호를 바라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것을 빼앗기면 화를 내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다 똑같죠. 부자는 얼핏 여유로워 보여요. 가진 게 워낙 많으니 주변에 조금 나눠 주든, 길을 가다가 좀 잃어버리든 화가 잘 나지 않거든요. 하지만 그런 그들도 자기 집에 불이 나면 화가 나는 건 똑같아요.”
“으응?”
“평소엔 소중함을 모를지 몰라요. 하지만 나중에 깨닫게 되면 뼈저리게 후회하죠. 아! 나는 이게 소중했구나. 이걸 뺏기는 건 죽기보다 싫어했구나, 라고요. 어찌 보면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살아온 거죠. 진짜로 아파 보기 전까지는 그걸 몰라요.”
“으음.”
소호는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기울였다.
“어렵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냥 이런 말이에요. 형은 피하는 게 안 어울려요. 정면으로 뛰어들어서 뭐든 얻어 왔잖아요? 언제나 그걸 잊지 마세요.”
“그건 당연하지.”
소호는 씩 웃었다.
“뭐든지 다 얻어 올 테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 군사님.”
***
소호는 양손으로 잡고 들여다보던 사람 머리통만 한 돌멩이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섭주해와의 대화가 생각난 건 어째서일까.
소호는 다시 말을 타고 은자촌으로 향했다.
돌멩이를 칼로 도려내듯 깨끗하게 관통한 자국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히히힝―.
“그래, 그래. 다 왔어. 수고했어.”
소호는 다 왔다고 알려 주듯 푸르륵―거리는 말의 목덜미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여기는 변함이 없네. 오히려 깨끗해졌어.”
숨을 쉴 때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청정하게 느껴진다고 하면 너무 과한 이야기일까?
소호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힘차게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삼촌! 나 왔어!”
객잔 안은 한산했다.
소호의 발달한 무형기는 현재 객잔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어? 삼촌이 객잔을 비워?”
놀라서 주방에 달려가 보니 커다란 쇠솥 하나가 아궁이 위에서 뽀얀 국물을 펄펄 끓이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이 무릎을 안고 앉을 수 있을 만큼 큰 쇠솥이었다. 고깃국 특유의 고소하면서 누릿한 향기 사이로 향긋한 약초 내음이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소면 육수? 엄청나게 많네. 이 정도면 서른 명은 먹겠는데……. 사람이 늘었나?”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시절부터 객잔 곳곳을 뛰어다니며 놀던 소호다.
눈대중만으로도 음식의 양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소호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생기를 쫓아서 객잔의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잘한다! 곰탱아!”
“몰아붙여! 그렇지! 아닛, 머리 긴 놈아! 거기서 왜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거기선 빠졌어야지!”
“어어? 저거저거, 치사하다! 다친 쪽으로만 도는 게 어디 있냐!”
“싸움에 치사한 게 어딨어? 상대의 약점을 노리는 건 상식이지?”
“이거, 살수 출신 아니랄까 봐. 도의도 법도도 없는 것 보소. 이놈아. 비무에 치사한 게 당연히 있지!”
“뭐야? 영감, 해볼 거야?”
왁자지껄하면서도 정겨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
소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고 굳어졌다.
어째서인지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소호는 숨을 멈추고 기척마저 감췄다.
객잔의 뒷문 근처에서 멀찍이 보이는 마을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본래는 풀만 자라고 있던 공터가 단단하게 다져진 연무장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축제 같은 광경이었다.
그곳에서 세 명의 비무가 펼쳐지고 있었고, 그 주변을 은자촌에 사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서 구경하고 있는 중이다.
돼지라도 잡았는지 고기 요리들이 몇 접시나 올려져 있고, 그 주변에는 술병도 놓여 있었다.
‘아버지, 운찬 삼촌, 할아버지들.’
소호는 그리운 얼굴들을 확인한 뒤, 그제야 비로소 비무 중인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비무 중인 사람들은 소호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비무는 일 대 이의 격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두 명은 각자의 개성이 강한 청년들이었다.
오른쪽 다리를 저는 거구의 청년은 굵은 철봉을 능수능란하게 다뤘고, 왼손으로 검을 잡은 좌수 검사는 몸놀림이 날렵하기 이를 데 없다.
무산제전.
육 년 동안 참가하며 그들을 마주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철탑패웅 이태산! 그리고 섬전검객 태성천!’
고지식하면서 규율을 따지던 성격답게, 강맹하고 묵직한 봉법을 사용하던 이태산은 얼마나 싸우기 까다롭던가.
태성천도 마찬가지다.
곤륜의 신법을 사용하면서 날카로운 검격을 숨 쉴 틈도 없이 연이어 날려 대던 그의 검술은 유준에 비교될 정도였다.
각각 무산학관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무재(武才)들이며 왕진의 인도로 만들어진 사신회라는 곳의 일원이기도 했던 사람들이다.
반갑다.
반가운데…….
소호는 그들에 대한 반가움보다 그들이 상대하는 자에 대한 놀라움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채채채챙―!
터엉!
“큭!”
두 사람이 연수 합격으로 무공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부상으로 몸이 불편하다?
그렇다 해도 변명은 되지 않는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다.
태성천과 이태산은 일류의 경지를 훨씬 뛰어넘은 무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존심도 버리고 연수 합격을 하고 있으니, 그 위력은 절정의 고수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욱 매서울 터.
그런데도 압도당한다.
상대방이 너무 강했다.
태성천과 이태산의 공격을 꿰뚫어 보는 안력.
먼 거리를 제압하는 능숙한 창술.
일격, 일격에 강철도 부술 것 같은 강맹한 위력까지.
휘리리리릭―.
평범한 회색 무복을 입고 있는 청년이 창을 머리 위에서 회전하자 태풍 같은 바람이 불어나왔다.
따당!
“큭?”
창대가 일순간에 철봉을 두 번 두드리자, 거구의 이태산이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흡?”
상대방의 사각지대로 돌아들어가려던 태성천이 휘청거리는 이태산을 피하려다가 보법이 꼬였다.
큰 틈은 아니었다.
자그마한 틈.
몸을 낮춘 채 돌진하던 태성천이 그저 옆으로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되는 단순하고 짧은 허점.
후웅―――!
“……!”
길고 가벼운 목창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직선으로 뻗어 나왔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
창이 먼저 나오자 바람이 딸려 온다는 느낌이다.
인식하니, 이미 그 창은 두 개의 무기를 동시에 꿰뚫고 있었다.
이태산이 들고 있던 철봉과 태성천이 휘두르려던 협봉검이다.
그 둘의 궤도가 일직선으로 겹치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치 꼬치로 구슬을 꿰듯 창으로 무기 두 개를 꿰뚫은 것이다.
쩌어엉!
파창!
철봉은 활처럼 휘어졌고, 협봉검은 검날이 부러져서 반 토막이 나 버렸다.
놀라운 창술.
막강한 위력이다.
“대단하다……!”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며 이름을 불렀다.
잊을 수 없는 인물.
오랜 시간 동안 친하게 지낸 그의 절친한 친구.
“조서인……!”
소호의 감탄의 시선을 받은 청년이 표정이 바뀌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