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2화
제30장 적자지화(嫡子之火) (2)
승부는 마무리되었다.
이태산이 손에서 놓친 철봉은 활처럼 휜 채 바닥에 단단히 꽂혔고, 태성천의 검은 반 토막 나 버린 상황이다.
강하게 진각을 내딛은 조서인은 창끝으로 이태산과 태성천의 중간을 겨누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지만, 조서인의 무형기는 이태산과 태성천 두 사람을 동시에 옭아매고 있었다.
이게 실전이었다면 두 사람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조서인은 창끝으로 그들의 목을 꿰뚫었으리라.
그 정도로 확실한 결과였다. 양측의 역량은 차이가 컸고, 조서인은 무형기로 완벽하게 두 사람을 제압했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놀랍군. 정말로. 우리가 졌다.”
“……졌네.”
조서인은 창을 거두고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손속에 여유를 두신 덕분입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주변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오오!”
“역시 창쟁이가 이겼다!”
“젠장,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저렇게 빠르게 강해진 거야?”
“낸들 아나. 검선 영감님이랑 우리 촌장이 알아서 잘 했겠지.”
주변에서 지켜보던 노인들이 젊은이 못지않게 격렬하게 기뻐하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그중에는 조서인을 향해 술잔을 들어 올려 승리를 축하해 주는 노인도 있었다.
겉보기엔 호랑이처럼 무서운 덩치가 큰 노인.
추묵환이었다.
“휴우.”
조서인이 승리의 기쁨으로 활짝 웃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어?”
조서인은 흠칫 놀라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모두가 풍운객잔을 등지고 서있는 지금, 객잔 쪽을 볼 수 있는 건 조서인뿐이었다.
오히려 깨닫는 게 늦은 감이 있다.
평소라면 백 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사람은 나타나자마자 알아차렸을 터.
‘뭔가 이상한데……?’
조서인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히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정말로 그곳에 사람이 있는지 ‘무인의 감각’으로는 느껴지질 않는다.
그곳에 한 사람이 서 있지만, 감각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중요한 건 호흡이다.
아무리 감각을 예민하게 가다듬어도 상대방의 호흡이나 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귀식대법? 아닌가? 그렇지만 비슷해. 기척을 완벽하게 감췄구나!’
이곳에 있는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모두 속이고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가.
조서인은 설마 잘못 본 건가 싶어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래도 있다.
늘 동경하던 모습.
눈부시게 하얀 비단 옷을 입고, 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조서인의 자랑스러운 친구.
평소와 달리 표정은 조금 어색했지만, 막상 조서인과 눈이 마주치니 소호는 웃어 주었다.
“소호야!”
조서인은 반갑게 소리쳤다.
“엉?”
주변에서 난리가 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뭐야? 소호라고?”
“으잉? 소호? 소호가 왔다고!”
노인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는 것도 당연했다.
장강용왕 추묵환, 흑신의 우문환, 만수마왕 종조기, 북두신군, 일흉대기 광사로, 불요신승 각율에 거기에 일야회주였던 묵신까지.
단 한 명이라도 밖으로 나간다면 무림 강호를 시끄럽게 만들 만한 인물들이지만 이곳 은자촌에서는 그저 아이들의 재롱 보는 낙으로 살아가는 늙은이에 불과하다.
그들은 소호를 반기며 소리쳤다.
“정말이다! 소호가 아니냐!”
“왜 모르고 있었지? 이 늙은 몸은 다 퇴물이 된 모양이구나!”
“이놈아! 왜 이제야 왔어!”
훅― 하고, 귀식대법으로 기척을 감추던 소호가 그제야 본신을 제대로 드러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지는 화창한 태양 같은 기세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소호의 내면과 역근경 진기의 성질로 나타나는 무형기다.
은은한 휘광이 감도는 모습은 생불이 따로 없다.
전륜법광이 주는 혜택이었다.
‘그런데 약간……?’
오랫동안 소호와 함께해 온 조서인은 소호의 몸 주변에 뿌연 안개가 끼어 있는 것처럼 약간의 서늘함을 느꼈다.
평소와는 다르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조금 다른 분위기가 흐른다.
조서인이 그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소호는 마을 노인들과 반가운 환담을 나누며 조서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소호는 천천히 걸어와 장기린의 앞에 섰다.
장기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동안 말없이 소호를 응시했다.
날카로운 눈빛.
장기린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기운이 꿈틀― 요동쳤다.
“……!”
아무도 말은 꺼내지 않았으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왔구나. 고생했다.”
“네. 건강하셨어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는 소호는 조금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장기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근처에서 노인들이 왁자지껄하게 대답했다.
“저 포권 하는 자세 깨끗한 것 좀 봐라.”
“나도 눈이 있다, 늙은이야. 다 컸네! 다 컸어! 이제 장가가도 되겠네!”
“그야 당연하지. 나는 소호가 헌헌한 미장부가 될 줄 진즉에 알고 있었다네.”
“오늘은 환영식을 해야겠구나. 어떻게 할까? 운찬아! 오늘 맛있는 것 좀 할 수 있냐?”
소호를 보며 반갑게 웃고 있던 운찬이 당연하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어르신. 제가 맛있는 거 할 줄 아는 것 빼면 시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노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운찬은 황당해져서 억울한 듯 소리쳤다.
“아니, 거기선 조금 부정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이 마을에서 얼마나 노력하는데. 좀 섭섭하려 그러네?”
“시끄럽다. 운찬아. 숙수가 요리 실력 빼면 시체지 뭐.”
“아이고, 서러워라. 그럼 요리 빼면 아무짝에도 없는 숙수는 주방에 들어가서 야채 껍질이나 까야겠습니다.”
운찬은 소호에게 반가운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상황을 판별할 줄 아는 눈치 빠른 사내였다.
장기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한발 먼저 발을 뺀 것이다.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노인들을 능숙하게 상대하고는 객잔으로 돌아갔다.
“어르신들.”
장기린은 무게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반겨 주시니 소호의 아비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죄송한 일이지만 잠시 객잔에서 기다려 주셔도 괜찮겠습니까?”
공손한 예를 갖췄으나, 그 안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포권을 취했던 소호가 그 기세에 놀라 그 자세 그대로 굳어져있을 정도였다.
노인들은 힐끔 자신들끼리 눈빛을 교환한 뒤, 헛기침을 하며 각자 몸을 돌렸다.
“커험! 그럼 우린 운찬이를 도와서 음식 준비나 도와 볼까? 어때? 불요야. 너는 파계승이 되면서 고기가 먹고 싶어서 요리도 많이 했다고 하지 않았나? 소림에서 쓰던 실력을 오랜만에 여기서 좀 발휘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
“허어? 누가 수적 놈들 대장이 아니랄까 봐. 기억도 안 나는 옛일을 꺼내는 게 비겁하기 짝이 없소. 누가 소림에서 고기 요리를 했다는 것이오? 불경하기 짝이 없구만그래.”
“뭐야? 다 늙어서 웬 내숭이냐. 사실은 사실 아니냐?”
“아니오! 나는 부정할 것이오. 계율원에 잡혀서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에잉.”
추묵환이 입을 열자, 불요신승 각율 또한 그의 의사를 눈치채고 보조를 맞춰 주었다.
티격태격하는 대화에 은밀한 눈짓이 더해졌다.
“아니, 우리도 같이 소호랑 이야기를 좀…….”
“크흠! 만수노사, 갑시다. 어서 가요. 우리도 객잔에 가 있자고.”
적왕과 깜돌이를 돌보는 은자촌의 마구간지기, 만수마왕 종조기가 눈치 없이 남으려 했다. 그러나 흑신의 우문환이 그런 만수마왕을 잡아끌다시피 하면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이놈들아! 뭐하고 있어? 너희도 도와야지!”
“예?”
북두신군은 새하얀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이태산과 태성천을 끌어들였다.
“여기 다 죽어 가는 영감들이 야채 껍데기나 깎겠다는데 새파란 너희는 놀 거냐?”
“아, 아닙니다. 그래서야 안 되지요.”
“저희가 가서 일하겠습니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정중하게 사과하며 북두신군의 곁에 따라붙었다.
“그래, 그래. 비무야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거지. 그런 걸로 그렇게 축 늘어져 있으면 안 된다.”
“아, 예. 가, 감사합니다.”
“허헛, 가자. 같이 가서 따끈한 차라도 한잔하자꾸나. 내 너희들을 보면서 느낀 점들을 이야기하고 싶구나.”
노인들이 제각각 허허 웃으면서 몸을 돌리니 난처해진 것은 한순간에 혼자 남아 버린 조서인이었다.
“크흠, 그럼 저도 어르신들을…….”
반가운 소호와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어째 장기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조서인도 눈치챘다.
이럴 때 자리를 피해 줘야 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서인.”
“예?”
그런데 장기린이 그런 그를 만류했다.
“너는 남아라.”
“예? 예에?”
어찌나 당황했는지 조서인은 눈빛이 흔들리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왜!’
조서인은 심장이 턱― 하니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엄밀히 따지면 이곳 은자촌의 외부인이다.
이태산과 태성천을 제외하면 은자촌에 온 지 얼마 안 된 뜨내기나 다름없다.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소호가 혼날 것 같은데…….’
친구가 부모님께 혼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게 또 있을까.
돌처럼 사고가 굳어 버린 조서인은 신경 쓰지 않고, 장기린은 소호를 향해 대화를 시작했다.
“장소호, 말해 봐라.”
“네?”
“왜 그랬지?”
“……무슨 말씀이세요?”
그제야 자세를 바로 잡은 소호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 전에도 장난을 치다 혼난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이렇게나 차가운, 어찌 보면 사납기까지 한 기세로 소호를 냉랭하게 바라보는 아버지는 처음 겪어 본 탓이다.
“모르는 척할 거냐?”
“뭐를요?”
“네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것. 그 철 요대 안에 들어 있는 것 말이다.”
소호가 헛숨을 들이켰다.
명료했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예전부터 불안함은 있었다. 학관에서 너를 보았을 때는 원인도 몰랐고, 그저 잘못된 예감에 불과하다고 믿으려 했었다. 그런데 아니었어. 지금 보니 원인은 명백하다.”
장기린은 준엄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그 집혼기를 어째서 받아들인 것이냐?”
“……!”
소호가 당황하면서 옆에 있는 조서인을 바라보았다.
‘어어?’
조서인은 당황했다.
어째서 소호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가?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던가?
지금이라도 자리를 피해야 하나 생각했으나, 그런 마음은 칼로 베듯 뚝 끊어져 버렸다.
“대답해라!”
온몸에 소름이 돋는 섬뜩함.
나직하면서도 준엄한 목소리가 소호와 조서인이 딴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장기린의 분노는 강렬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이 그들을 강제하는 듯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박력이 두 사람을 옭아맸다.
“내가 너를 너무 제멋대로 키웠구나.”
숨도 쉬기 힘든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후우.”
장기린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듯 긴 숨을 내뱉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왕진이 준 힘을 받아들이다니. 내가 그렇게나 경고를 했는데도.”
“……!”
소호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빛, 요동치는 기파가 그걸 증명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울컥 치솟는 감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호는 분노를 꾹 눌러 참는 듯,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두 눈에서 붉은빛의 기운이 번뜩이다가 사라졌다.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요했어요. 모든 것은 왕진 태감을 쓰러뜨리고 흑시군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예요. 시대가 변하고 있어요. 그걸 따라가기 위해서는 집혼기를 사용해야 해요.”
“수많은 원혼들을 네 속에 가둬 두더라도 말이냐?”
“네.”
“네 힘을 기르기 위해 수많은 인원을 살상해야 하더라도?”
“……아버지는.”
소호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적어도 아버지는, 그걸로 저를 추궁할 자격은 없어요.”
놀랄 만큼 공격적인 말투였다.
마음을 정한 듯, 소호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장기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버지도 똑같잖아요. 신수(神獸). 그만한 힘을 기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을 빼앗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