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04화 (433/686)

13권 3화

제30장 적자지화(嫡子之火) (3)

소호의 눈이 점차 붉어졌다.

툭.

이성의 끈이 끊긴 소호는 그동안 억눌러 왔던 속마음을 가감 없이 쏟아냈다.

“아버지는 제게 신수였던 과거를 숨겼어요. 집혼기를 사용해서 강해진 것도 말해 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왜 제게는 화를 내시는 거죠? 왜 나는 하면 안 되는 거냐고요? 아버지랑 나랑 뭐가 다른데요?”

소호의 숨소리가 거칠다.

눈의 초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항상 느긋해 보일 정도로 긴장이 풀어져 있던 천무공자는 지금 이곳에 없다.

“아버지도 잘 아실 거 아니에요? 집혼기가 없으면 강해지는 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요. 저는 천무련이라는 곳도 세웠어요. 그곳을 이끌려면 지금으로도 부족해요. 더 강해져야 한다고요. 내가 얼마나 큰일을 이루려는지. 아버지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소호의 입술이 떨렸다.

그는 격해진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장한 모습이었다.

“소호야!”

부자간의 갈등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던 조서인이 황급히 소호의 팔목을 붙잡았다.

“너 지금 이상해. 너무 흥분한 것 같아. 아버님께 예의가 아니잖아.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고…….”

“놔!”

조서인은 탁! 소리가 나도록 튕겨진 자신의 손을 매만졌다. 그는 상처받은 얼굴이 되었다. 육체의 아픔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더 컸다.

지금까지 소호는 자신을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한 일이 없었다.

사나운 눈빛.

소호는 마치 밤송이처럼 가시를 곤두세운 채 조서인의 모든 것을 거절했다.

두 눈이 붉다.

조서인은 소호의 두 눈이 마치 핏빛 같다고 생각했다.

“이건 우리 가족 일이야. 끼어들지 마.”

조서인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가 뭐라고 반박하기 전에, 장기린이 손을 들어 올리며 조서인을 만류했다.

조서인은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너와 내가 뭐가 다르냐고?”

소호가 격정에 빠진 불꽃이라면 장기린은 북풍한설을 뿜어내는 만년설이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이 소호의 격정을 압도했다.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러니까. 뭐가요?”

“내가 너를 잘못 키웠구나.”

으득.

소호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선명하게 퍼져 나왔다.

분명히 사납게 공격한 것은 소호인데, 오히려 그가 더 상처 입은 듯한 얼굴인 것은 왜일까.

소호는 자꾸만 귀를 매만졌다.

마치 파리 떼가 귓가에서 앵앵대는 것 같아 보였다.

“장소호.”

“…….”

“기껏 한다는 말이 나랑 똑같은 일을 했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건가? 즉, 네가 선택했으나 잘못은 나에게 있다는 말이로군.”

“그러니까. 뭐가 다른데요? 애초에 저한테 이야기해 준 적이 없잖아요?”

장기린의 눈이 소호의 내심을 꿰뚫을 듯 강렬하게 빛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안개처럼 주변을 잠식한다.

“후우.”

장기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가 선택한 적이 없다.”

소호의 시선이 흔들렸다.

“집혼기, 나라를 위한 싸움, 수천, 수만 단위의 살육.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나는 어느새 신수가 되어 있었다. 변명할 생각은 없다. 비록 선택의 기회가 없었더라도 결국은 내가 한 일이니. 하지만.”

장기린의 두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강렬하던 그의 살기는 강물 같은 세월에 씻겨 내려갔다.

이제는 신선 같은 현기로 가득 채웠다고 생각했건만.

명경지수의 마음을 유지하던 십여 년의 연공이 무(無)로 돌아가는 데는 불과 일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장기린의 내면에는 다시금 과거로 돌아간 듯 인간적인 분노와 실망감만이 가득했다.

“그렇다 해도 내 자식은, 나보다 낫길 바랐다.”

“……!”

소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요? 그렇게 집혼기를 싫어하는 분이 백검회에 집혼기는 왜 준 거예요? 이태산, 태성천. 저 사람들의 집혼기를 왜 천하를 어지럽히는 백검회에게 주었냐고요.”

“천하를 어지럽혀? 그건 누가 판단하느냐?”

“그들은 벌써 힘을 얻겠다고 산적과 수적들을 학살하고 있어요.”

“약자는 어느 시절에나 잡아먹혔다. 그게 도적이라면 동정할 여지도 없겠지.”

“……후촌이라고, 어린아이와 여인들도 다 죽였어요. 그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생각보다 과감하고 잔인하군. 본성이 그러하다면, 그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장기린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전장에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멀리 봐라. 집혼기를 지닌 자들은 불행해진다. 살육을 힘이라고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마성에 사로잡히게 될 거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들을 적으로 삼겠지.”

“……집혼기는 힘을 얻는 수단일 뿐이에요.”

“처음에는 그렇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아냐. 결국엔 타락한다. 힘을 얻는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내가 힘을 잘 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건 몰락의 지름길이다.”

장기린은 시리도록 차갑고 냉정했다.

“나는 그들에게 힘을 준 것이 아니다. 불행의 씨앗을 주었어.”

“……!”

“내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침통함은 잠시.

장기린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내였다.

“긴 말은 필요 없다. 넌 내가 너를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너도 나를 모른다, 장소호.”

“……!”

“이 모든 것에 대해 왕진을 원망하는 것은 맞지 않겠지. 결국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너를 방치한 나의 탓이다.”

장기린이 성큼 다가섰다.

그가 팔을 뻗자 삼 장 간격의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며 소호의 어깨에 닿았다.

“……!”

소호가 경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기린은 그런 소호를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 내가 다시 바로잡겠다.”

어두운 밤에 야생동물과 마주쳐 본 적이 있는가?

풀숲에 몸을 웅크린 야생동물을 찾아내는 것은 한낱 사람의 비루한 시각과 청각을 이용해서가 아니다.

본능.

평소에는 잊고 있던 사람의 생존 본능이 자연스레 어디를 쳐다봐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바로 옆에서 맹수가 두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과 같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감각.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하게 소름이 끼치는 전율.

폐부를 관통한 공포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가 되어 숨을 통해 흘러나온다.

지금 소호의 기분이 그러했다.

오랜만에 상대하는 아버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가까워져서 어깨를 잡아 오는데, 그 중간 동작이 뚝 끊어진 것처럼 전혀 보이지를 않았다.

“큭!”

소호는 황급히 상체를 뒤로 빼면서 발로 땅을 걷어찼다.

곤륜의 용형보(龍形步)였다.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듯 소호의 몸은 허공으로 회전하며 솟구쳐 올랐다.

파라라락-.

몸을 회전하는 것에 맞춰서 치렁치렁한 비단 소맷자락이 바람소리를 냈다.

턱.

“……!”

허공에 떠올라 운룡대구식을 전개하려는 순간, 소호는 단단한 흙바닥이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목격했다.

장기린의 손에 소맷자락이 잡혔다는 걸 알아챈 건 이미 그가 땅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쳐진 뒤였다.

“커헉!”

거센 충격에 숨이 턱 막혀 온다.

온 천하에 무명을 떨치고 있는 천무공자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헌신짝만큼의 가치도 없었다.

그나마 바닥에 닿는 순간 나려타곤을 시전하여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온몸에 흙이 묻기는 했지만, 땅을 구르는 행위는 갈비뼈 하나쯤은 충분히 부러뜨렸을 충격을 부드럽게 완화시켜 주었다.

“꼴사납구나.”

장기린은 차분하고 냉랭한 투로 말했다.

그가 다시 한 번 내뻗은 손이 어느새 소호의 목에 닿아 있었다.

“……!”

파밧-!

소호는 아지랑이 같은 몸놀림으로 최선을 다해 일 장의 거리를 벌렸다.

온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쾌속한 움직임이었으나, 장기린은 상체만 움직여 소호의 움직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쫓아왔다.

이번에도 소호는 보지 못했다.

장기린이 어떻게 움직여서 언제 그의 손이 소호의 목에 닿았는지.

그 중간 과정이 전혀 보이지를 않았다.

“묵신 어르신의 신법인가.”

장기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소호를 살펴보더니, 갑자기 가만히 서서 양팔을 늘어뜨렸다.

자연체.

언제 어떤 동작이든 할 수 있는 지극히 편안한 자세였다.

“허억……. 허억…….”

소호는 목덜미를 매만졌다.

장기린의 손끝이 닿았던 감촉이 지금도 선명했다.

반 호흡만 늦었어도 소호는 목이 붙잡혔을 것이고, 그러면 싸움은 끝이다.

찌릿-.

“윽.”

소호는 두통을 느꼈다.

사실 세 명만 남아 대화를 시작할 때쯤부터,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뿌옇고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깜빡 잠이 든 것 같았는데, 어느새 소호는 장기린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호의 귓가에선 계속해서 자그마한 속삭임들이 들려왔다.

“다 적이다! 믿지 마라. 부모라는 것들은 자식을 물건처럼 휘두르려고만 하지.”

“싸워! 저거 다 수작부리는 거야. 네 집혼기의 혼백을 뺏어가려는 거잖아!”

“큭큭, 약육강식이다. 집혼기를 가진 자들 사이에서 혈연이 무슨 상관이냐? 일단 잡아먹고 봐!”

굵고 낮은 사흉 도올의 목소리부터, 생전 처음 들어 보지만 어딘가 약삭빨라 보이는 목소리까지.

온갖 목소리들이 소호의 귓가에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소호는 날파리를 쫓아내듯 귀를 쳐 냈다.

“시끄러……. 시끄럽다고…….”

소호는 숨을 몰아쉬면서 싸움에 집중했다.

‘목소리’들은 대부분 나쁜 말만 지껄이지만, 그중에 옳은 말이 있을 때도 있다.

혼백에 대한 이야기가 그랬다.

장기린의 손이 소호의 몸에 닿을 때마다 속이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철 요대 속에 숨겨진 신물.

집혼기에 잘 들어가 있던 혼백들이 장기린과 접촉할 때마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뛰어 댔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지금의 장기린은 포식자였다.

그와 몸이 닿을 때마다 소호는 약해질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집혼기에 모아두었던 혼백이 시시각각 빠져나가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질 수는 없지…….”

무인으로서 먼저 손을 쓴 것은 아버지다.

이왕 시작된 싸움, 지는 건 소호의 승부욕이 용납할 수 없었다.

한편으론 기대가 되기도 했다.

무산학관에서 성장한 소호의 실력이 천하의 무쌍귀에게 얼마나 통할 것인가.

궁금하지 않은가.

스릉-.

“……!”

소호는 허리에 차고 있던 박도를 뽑아 들었다.

장기린의 시선이 박도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소호는 머릿속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나중에 생각해야 했다. 지금은 힘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마치 허물을 벗어 던지고 본체를 드러내듯 순식간에 강한 힘이 뿜어진다.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전륜법광 사이로 집혼기에서 흘러나오는 패기가 섞였다.

고오오오-.

박도에 선명한 도강이 집결되었다.

소호는 박도의 손잡이를 가볍게 움켜쥐고, 상체를 비스듬히 앞으로 숙였다.

“단(斷)!”

촤아아악-.

비단 폭 같은 힘의 흐름이 천지를 쪼갤 듯 수평으로 날아갔다.

텐차이에게 배웠던 북천도의 응용이었다.

상대는 자연체를 유지하고 있는 적수공권의 장기린.

그는 크게 손을 들어 올렸다가 손바닥을 펼친 장타로 소호의 도강을 내리쳤다.

콰아앙!

“……!”

소호는 저릿한 팔목을 붙잡고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아래로 꺾인 힘의 흐름이 바닥에 길게 고랑을 팬 탓이다.

“놀랍군.”

점차 가라앉는 흙먼지 사이에서 장기린이 자신의 옷자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백창의의 소맷자락에 긴 칼자국이 남아 버렸다.

“맨 손으로는 힘들겠어.”

장기린이 손을 펼치자, 조서인이 비무 때 썼던 목창 한 자루가 허공으로 떠올라 그의 손에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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