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05화 (434/686)

13권 4화

제30장 적자지화(嫡子之火) (4)

상단전의 능력이 극의에 달해야만 쓸 수 있는 것이 허공섭물이었으나, 장기린은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창을 든 장기린에게서는 맨몸으로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전까지는 조용히 몸을 낮추고 있는 와룡(臥龍)이 상대였다면, 지금은 하늘에 승천해서 미천한 인간을 도도하게 내려다보는 천룡(天龍)이 상대다.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듯했다.

뜨거운 숨결 같은 무형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한 순간에 확- 다가와 소호의 전신을 덮쳐 왔다.

“윽?”

소호는 세 걸음을 물러섰다.

부릅뜬 두 눈.

흔들리는 눈빛이 소호의 동요를 드러냈다.

“하아…… 하아…….”

소호는 들고 있던 박도를 정면으로 겨누었다.

숨소리가 거칠다.

고수끼리의 대결은 첫 수가 전황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에도 전세를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시작을 잘못하면 전세를 되돌리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무형기에 짓눌리면 그 즉시 패배한 것과 다름없는 일.

아직 병기를 맞대지도 않았는데, 그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지경이다.

‘아버지가 이렇게 강했었나……?’

신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내심 이제는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 커서 보니 그게 얼마나 무지한 소리였는지 알겠다.

무공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대.

어떤 공격을 가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 무저갱 같은 존재이다.

‘천하에 짝이 없다더니……! 질 수 없어! 싸운다! 이긴다! 나는 천무공자다!’

소호는 전의가 사라질 것만 같은 마음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철 요대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황금빛 휘광을 흩뿌리던 전륜법광에 핏빛의 붉은색 기운이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명백한 적광색의 기파.

박도를 둘러싼 도강조차 붉은색의 빛이 점점 더 진해져만 갔다.

집혼기의 힘을 많이 사용할수록 소호의 기파에는 붉은색이 진하게 섞였다.

“후우우우…….”

소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박도를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하늘을 겨누고, 땅을 향해 내리친다.

드넓은 천하 강산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소호 한 사람뿐인 듯.

천지인의 조화가 맞물려 거대한 이치를 행한다.

“북천도. 참(斬)!”

쿵.

진각을 내딛은 왼발이 깊은 족적을 남겼다.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천하가 갈라졌다.

고오오오오오-.

내리치는 것은 일순간.

하지만 그 여파는 한발 늦게 천천히 드러났다.

피슉-.

소호의 발끝 근처에서 시작된 작은 균열이 점차 일자로 뻗어 나갔다.

촤아아악-!

비단 폭 같은 떨림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장기린의 등 뒤에 있던 방 한 칸짜리 초가집이 지붕부터 반 토막이 나서 비스듬하게 쪼개졌다.

소호의 일격은 평온했던 은자촌에 파괴의 흔적을 깊게 남겼다.

무시무시한 위력이다.

하지만 참격으로 갈라진 흔적 중에, 장기린은 없었다.

“북천도를 보는 건 근 이십 년 만인가. 물어야 할 게 하나 더 늘었군.”

깜짝 놀란 소호가 몸을 옆으로 돌리는 것과 동시에, 소리가 난 것과 같은 방향에서 섬광 같은 찌르기가 날아왔다.

따아아앙!

“큽……?”

소호는 몸이 반으로 접히면서 뒤로 날아갔다.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공격을 막아 낸 것이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격의 속도는 빨랐다.

인지를 초월한 공격이다.

창끝이 보였다 싶으면, 곧바로 그다음 순간 소호의 몸에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콰앙-!

튼튼한 통나무로 만들어진 목책이 박살 났다. 소호는 박살 난 나무 파편들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크윽.”

땅바닥이 등에 닿자마자 구르듯이 몸을 일으킨 소호의 미간으로 아까와 똑같은 형태의 찌르기가 날아왔다.

“챠핫!”

소호의 눈빛이 번뜩였다.

한 번 당한 공격을 파악하지 못해서야 천무공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그는 다급하게 몸을 젖히며 칼날을 들어 올렸다.

쩌저저정!

단 일 격을 막았는데. 소호는 뒤로 다시 한 번 튕겨져 나갔다.

지이잉-.

칼날이 떨렸다.

공격의 박자는 알았으나, 그 안에 실린 힘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북천도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피했지?’

소호는 정신없이 밀리는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흉이라 불리며 악명을 떨치던 도올, 도철은 북천도를 제대로 피하지도 못했었는데. 무쌍귀에게는 통하지 않는 듯했다.

“우습군.”

휘리릭-.

장기린의 손에서 목창이 한 바퀴 회전했다.

“너는 네가 강하다고 생각하나? 그래서 그리 오만했더냐.”

장기린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꿈틀거리듯 피어오른다고 느껴진 그 순간.

하나뿐이었던 창이 여러 개로 늘어났다.

“이게 일연적룡무다.”

천수관음상처럼 수십 개로 늘어난 창이 일제히 소호를 노리고 날아왔다.

이제껏 위력은 강하지만 투로가 단순한 찌르기를 사용했다면, 지금은 완전한 무공의 초식이다.

기이이잉-.

소호는 칼날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다급하게 움직였다.

부드러운 몸놀림.

커다란 원을 그리는 발동작은 무당의 보법이며, 휘두르는 검에 서린 것은 현묘한 태극검의 묘리였다.

수십 개로 분열된 일연적룡무가 소호의 태극검과 마주쳤다.

따다다다다당-!

“윽?”

소호의 내력이 흔들렸다.

심기체의 균형이 깨졌다.

창이 수십 개로 분열하는 듯한 공격은, 검으로 따지자면 환검이다.

허초와 실초가 섞여 있을 테니 실제로 칼에 닿는 것은 절반 이하여야 했다.

‘그런데 전부 실초라고?’

소호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정신없이 뒤로 밀려났다.

힘을 한쪽으로 밀어내서 공격을 흘려내는 태극검의 원리는 그 현묘함을 다하기도 전에 또 다른 공격에 직면해 초식이 뚝뚝 끊어졌다.

밀리고, 밀리고, 밀리고.

정신없이 물러나던 소호가 풍운객잔의 외벽까지 밀릴 때쯤, 장기린은 어느새 소호가 팔을 내밀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당파의 무공은 운화를 통해서 다 봤다.”

왼쪽 다리를 소호의 양 다리 사이로 밀어 넣은 장기린은, 짧게 끊어 치듯 몸을 회전시켰다.

콰득!

땅을 갈아엎을 기세로 회전하는 몸.

장기린의 어깨가 소호의 명치에 닿자, 강렬한 기파가 북소리를 내며 터져 나간다.

뻐어억!

“컥?”

창이라고 하면 중거리의 싸움이 유리한 게 당연한 일이건만.

소호는 상상도 못했던 일격을 맞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고법? 고법이라니!’

맨손 대련 중에서나 가끔 볼 법한 초단거리의 공격법을 실전에서 사용하다니!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장의 무공이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조약돌처럼 뒤로 튕겨나는 소호의 두 눈에, 마치 커다란 용이 입을 쩍 벌리듯, 수십 개의 창격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곤륜파의 운룡대구식?

아니, 늦다.

심지어 등 뒤에는 풍운객잔의 벽이 있었다. 허공답보를 쓰지 않는 한 공격은 피할 수 없다.

속수무책.

소호는 몸을 웅크리고 내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시끄러운 격타음이 은자촌을 떨쳐 울렸다.

***

“이게 무슨 일이야!”

풍운객잔에서 뛰쳐나온 노인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굳어져 있었다.

그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객잔에 들어설 때부터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장기린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싶어서 호기심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그들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날카로운 기운이 솟구쳤을 때였다.

모두가 달인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 아니던가.

장강용왕 추묵환부터, 상대적으로 무공이 가장 약한 흑신의 우문환까지.

모두의 안색이 급변할 만큼 그 기운은 사납고 거칠었다.

마을 전체를 갈라 버릴 듯한 참격과 그 안에 도사린 살기.

대련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공격이었으며, 그게 부자간의 싸움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세상에.”

“아이고, 촌장! 애 죽겠다!”

그들이 객잔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는, 이미 장기린이 소호의 공격을 피하고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도중이었다.

심지어 맨손이 아니라 손에는 창도 들고 있었다.

말릴 틈도 없었다.

일연적룡무를 사용한 창술로 밀어붙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창을 든 상태로 소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고법 일타.

그 후에 이어지는 공격은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웠다.

퍼버버버버벅-!

창대로 두드려 패는 소리가 어찌나 강맹한지, 소호의 몸은 허공에 떠오른 상태로 내려오질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무공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만. 땡중아, 소림에는 저런 고법이 있냐?”

“비슷한 것은 있으나, 저렇게 창술에 섞어 쓰는 자는 본 적이 없소. 창술을 쓰는 자는 거리를 좁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본능이거늘. 그런데 오히려 스스로 거리를 좁혔다가 상대방을 멀리 쳐 내서 거리를 맞추다니…….”

“후하핫, 나도 그래.”

무공에 감탄하는 장강용왕 추묵환과 불요신승 각율과 달리.

나머지 노인들은 대경실색하여 장기린을 만류하기 위해 뛰쳐나갔다.

“아이고! 우리 손자 죽는다!”

“촌장, 그만해! 그만둬! 그만하면 알아들었을 것이야!”

북두신군과 만수노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장기린을 만류했다.

뒤에서 말은 안 하지만 흑신의우문환과 묵신도 안절부절못하는 중이다.

마치 깨를 털 듯 소호의 전신을 격타하던 장기린이 마침내 창끝을 내렸다.

우우웅-.

창끝이 떨린다.

막강하게 뿜어지던 기세도 안으로 갈무리된다.

“후우…….”

장기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지만, 전의가 사라진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신광(神光)을 번뜩이며 은자촌의 노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물러나십시오.”

“촌장!”

“아직 안 끝났습니다.”

장기린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차가워 보일 정도로 지극히 차분했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소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은자촌의 노인들은 아연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비로서 자식을 훈계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평소라면 장기린을 믿고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쓰러져 있는 것은 은자촌 노인들이 혈육보다도 더 아끼는 은자촌의 악동, 소호였다.

“촌장. 알아듣게 말해 주게. 소호는 우리 모두의 손주가 아닌가? 어째서 소호를 그리 엄하게 대했으며, 기절한 아이를 왜 그리 경계하는 것인가? 이건 아무리 봐도 지나친 것 같으이.”

“기다려 주십시오.”

장기린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한 손에는 창을 든 채, 다른 한 손은 손바닥을 펼친 채 소호에게로 향했다.

화아아아악-!

“……!”

장기린은 허물을 벗어 던지듯 본신의 힘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은자촌의 온화한 촌장에서 과거의 전신(戰神)으로 돌아간다.

소호를 상대하면서 전력을 냈다?

아니다.

장기린의 전력이 드러난 건 지금이었다.

몸 안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북로전쟁의 붉은 악귀.

북천의 대적자 말고는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었던 무쌍귀가 지금 이곳에 서 있었다.

“나와라.”

쿵.

그가 강하게 발을 구르자 지저 깊숙한 곳에서 용이 울부짖듯 땅이 뒤흔들렸다.

드드드드-.

“……!”

장기린이 드러낸 진신 무공에 경악한 은자촌의 노인들은, 그 이상 놀라운 것을 보고 말았다.

“당장 나와라. 이름 모를 신(神).”

장기린의 명령에 화답하듯, 소호의 몸이 움찔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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