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5화
제30장 적자지화(嫡子之火) (5)
“허업?”
주변에서 지켜보던 노인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분명히 기절해 있었던 소호가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끈을 달아서 조종하는 인형과 같다.
처음에는 머리만. 그 뒤에는 어깨가 따라 올라왔다.
삐걱거리는 어깨, 반쯤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덜렁거리는 팔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우드득-.
관절에서는 뼈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났고, 전신 각 부위의 근육들이 제각각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처음엔 본능적으로 도와주려 손을 뻗던 북두신군과 묵신이 깜짝 놀라며 다시 손을 뺐다.
콰드득!
꿈틀거리던 소호가 양손으로 땅을 짚으니 손가락의 모양대로 땅에 긴 자국이 남았다.
쿵. 쿵.
한 발, 한 발.
두 발로 일어서려던 소호는 휘청거리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소호의 움직임이 기이했다.
소호는 아픈 것이 아니었다.
명인이 악기를 조율하듯, 소호의 몸은 무언가에 맞춰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소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자신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르륵…….”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말을 형성하지도 못했다.
퍽. 퍽.
그는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듯 스스로 자신의 몸을 몇 번이나 두드렸다.
적응은 빨랐다.
양손, 양발로 땅을 짚고 일어서는데 그 모습이 야생동물과 같다.
양옆으로 중심을 몇 번 이동해 보는가 싶더니, 어느새 한 발로도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스하아아-.
소호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철 요대에서 시작된 붉은색 기파가 소호의 몸을 얇게 뒤덮은 건 바로 그때부터다.
“호신강기……?”
불요신승 각율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심지어 상처도 회복되는 듯했다.
온몸에 울긋불긋 새겨져 있던 매 맞은 흔적들이 눈에 보일 만큼 순식간에 깨끗이 나아가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본신의 힘을 모두 드러낸 장기린이 질문했다.
척, 하니 겨눠진 창끝이 소호의탈을 쓴 ‘무언가’의 미간을 향했다.
“후핫!”
웃음인가 위협인가.
어린 맹수가 위협하는 소리 같기도 했고,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가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파팟!
그에 대해 판별되기도 전에 그 ‘무언가’는 양손, 양발을 이용해 옆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
신(神).
그만큼 신비롭고 기괴하며, 경이롭고 저주스러운 말이 또 있을까?
사람의 인지를 벗어난 모든 것들은 신이라고 불린다.
어린아이들이 잠을 설치게 만드는 귀신도 신이며, 모든 이들이 존경하는 관제묘의 무신 또한 신이다. 그뿐인가. 한밤중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둥벼락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신이라고 불리며 추앙받는다.
장기린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평소라면 떠올리기도 싫을, 어린 시절 동굴 안에서 자랄 때의 일이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또래 아이들과 같이 자랐다.
강인하고 생명력이 강한 아이들이었다. 밖에서 어떤 문파에 들어가더라도 주목받는 영재 소리는 듣고 자랐을 텐데, 불행히도 그들은 황실의 눈에 먼저 띄었다.
동굴은 처음에는 안락했다.
밥은 풍족하게 주었고, 뛰어난 교관들로부터 양질의 교육도 받았다.
사실은 투견장에서 키워지는 개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당시의 어린 장기린은 ‘월’이라는 이름의 친구를 사귀기까지 했다.
장기린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월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피죽도 못 먹고 자란 것처럼 얼굴이 허옇고 마른 친구를 기억하는 건 그가 장기린의 최초의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했다.
월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친구였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던 장기린이 만들어 낸 환상 같은 존재였으며, 참사가 벌어졌던 마지막 날. 그는 최후까지 살아남은 장기린의 몸속으로 들어와 한 몸이 되었다.
접신(接神)이다.
장기린의 가슴 한가운데 박혀 있는 물건.
도철이 찾아와 ‘구세대의 집혼기’라고 불렀던 바로 그곳에 월이 들어가고, 황제가 지어 주었다던 이름을 받은 순간 그는 정말로 ‘기린’이 될 수 있었다.
‘월, 묻고 싶다. 저 녀석은 누구냐? 소호는 어떤 신을 보고 있지?’
장기린은 호랑이가 앞발을 내리치듯 그를 후려치려는 소호를 창으로 쳐 내며 삼십여 년 만에 월을 불러 보았다.
“카아앗!”
거친 괴성을 토해 낸 소호는 땅바닥을 한 번 구른 뒤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강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장기린에게 창대로 얻어맞았음에도 아파하거나 주저하는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뿐인가.
화가 잔뜩 난 듯, 소호가 양손에 힘을 주자 단단한 땅바닥이 바스라졌다.
“도철도 그런 분위기였지. 요즘 신수가 된다는 건 다 그런 것인가?”
장기린은 궁금함을 느끼며 창끝에 힘을 집중했다.
기이잉-.
창대가 떨리며 주변을 진동시켰다.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으니, 그야말로 정중동이다.
장기린의 호흡이 잘게 쪼개졌다.
호흡을 반으로 쪼개고, 거기서 다시 한 번 반으로 쪼갠 짧은 찰나에 창끝이 허공을 관통했다.
숨 쉬듯이 튀어나온 일연적룡무 제일식이 본래 소호가 있었던 자리를 짓누르듯 관통한 것이다.
푸화아악-.
땅에는 원통형의 매끈한 관통흔이 생겨났다.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는 그다음에 들렸다.
창끝이 보이는 순간 이미 상대방의 몸에 닿아 있을 정도로 쾌속의 찌르기였으나, 소호는 그걸 피해 냈다.
펄쩍 뛰어오른 몸.
꼽추처럼 허리를 굽힌 채 덤벼 오는 모습은 영락없이 야생동물과 똑같다.
뻐억!
“카악!”
장기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비스듬히 휘둘러 창대로 옆구리를 가격했다.
본래대로라면 소호가 풍운객잔의 외벽을 뚫고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일격.
소호의 몸이 움찔 흔들린다.
하지만 그뿐.
그는 아픈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색 호신강기가 더욱 짙어졌다. 전신에 힘을 줘서 타격을 버텨 낸 것이다.
오히려 창을 턱- 하니 붙잡고 가까이 덤벼드니 장기린은 양손으로 창을 잡고 정면을 방어해야만 했다
까득-.
허공에서 부딪친 이빨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소호의 이빨이 장기린의 귀 근처까지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졌다.
“으음…….”
장기린은 양손으로 창을 붙들고 이빨로 깨물려 드는 소호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소호는 뒤로 튕겨 나는가 싶더니, 한 손을 창대에 걸친 채 창을 타고 반대쪽으로 넘어갔다. 빙글 돌아서 내리치는 주먹에 붉은빛이 번뜩였다.
꽈아앙!
땅이 흔들리고 흙이 튀어 오른다.
마치 강기를 두르고 공격한 듯한 위력이었다.
장기린은 정면에서 창을 풍차처럼 돌려서 날아오는 흙덩어리들을 쳐 냈다.
뿌연 흙먼지 속에서 소호가 다시 몸을 일으킨다.
장기린은 왼손을 앞으로 펼친 채, 창을 잡은 오른손에 감각을 집중했다.
“이것도 버텨 보거라.”
천수여래의 손길처럼 수십 개로 분열하는 창.
일연적룡무 제이식이다.
거대한 용이 이빨로 물어뜯듯 날아오는 창을 앞에 두고 소호는 기성을 지르며 몸을 낮췄다.
고오오오오-.
붉은색 기운이 솟구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며 귀기 가득한 기파가 삼산 전체를 뒤덮을 듯 충천(衝天)했다.
막강한 호신강기를 몸에 두른 소호는 우직하게 달려들었다.
날아오는 일연적룡무 제이식을 열에 여덟을 얻어맞고, 둘 정도만 피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장기린만 눈에 보이는 듯했다.
뻐버버버벅!
장렬한 격타 소리가 났으나, 소호는 모조리 견디고 장기린의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장기린이 반격하려는 순간, 소호의 두 눈에서 핏빛이 번뜩였다.
기묘한 느낌.
뒷골을 누군가가 손으로 붙잡고 잡아당기는 듯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우우웅-.
“……!”
그 순간 땅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거인이 바닥에 숨어 있다가 손을 뻗은 듯했다.
바닥에서 치솟은 흙더미가 장기린의 발을 붙잡는다.
처음엔 발을 빼려 했으나, 발밑이 진흙처럼 끈적거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단단하게 굳어 버려서 뺄 수 없었다. 심지어 치솟은 흙덩어리가 순식간에 허리춤까지 올라오니, 이래서야 산 채로 땅에 묻힐 터였다.
“이런.”
설마 기묘한 사술을 사용할 줄이야. 장기린은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다.
다리의 움직임에 힘을 써야 하는 그 짧은 한순간.
소호는 이미 장기린의 코앞까지 짓쳐들었다.
살짝 오므린 호조(虎爪)에 둘러진 호신강기는 그 자체로 단단한 갑옷이자, 흉악한 무기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다.
발을 움직일 여유는 없었다.
장기린은 창을 들지 않은 왼손에 힘을 모아 강기가 둘러진 호조를 후려쳤다.
터어엉!
공기가 터져 나가고, 발밑의 땅에 금이 가며 쩍- 하니 갈라졌다.
장기린의 왼쪽 소맷자락이 끝에서부터 대나무처럼 쪼개지며 산산이 터져 나갔다.
발톱으로 할퀸 것처럼 왼팔 전체에 자잘한 생채기들이 길게 그어졌다.
또르르-.
처음으로 장기린이 흘린 핏방울이 팔꿈치를 타고 아래로 한 방울 떨어졌다.
“그르르-.”
으르렁거리는 소호와 숨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장기린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호를 평가했다.
“힘도 내력도 신체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군. 그렇지만 이래서야 짐승이 아니냐.”
안타까움과 분노가 은은하게 드러났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려 해도, 진심으로 아끼는 아들에 관한 일이다.
흥분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던가.
“못난 놈.”
장기린은 안타깝게 중얼거린 뒤, 폭발하듯 기세를 뿜어냈다.
화아아아악---.
“……!”
일순간 주변이 어두워진 듯 막강한 기파가 치솟았다.
장기린이 입고 있던 옷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의 발목을 붙잡던 흙덩어리들도 일제히 터져 나갔다.
파스스스-.
근처에 새파랗게 피어 있던 풀들이 노랗게 말라붙으며 순식간에 죽어 갔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쥐어짜서 응축해 놓은 듯한 기운 속에서, 장기린은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격을, 그러나 최대한 절제해서 앞으로 내질렀다.
일연적룡무.
제삼식(三式)이다.
“부서져라.”
한 줄기 유성이자, 적룡의 화염 같은 일격이 소호의 허리에 격중했다.
“컥.”
단말마의 비명만이 남았다. 소호는 몸이 반으로 접힌 채 뒤로 튕겨져서 날아갔다.
퍼버버벅!
장기린이 사용한 목창 한 자루는 끝에서부터 터져 나가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진기를 융통무애하게 두를 수 있는 장기린일지라도, 막강한 일연적룡무 제삼식을 사용하기에는 나무로 만든 창이 너무 허약했던 탓이다.
소호는 물수제비를 튕기듯, 땅에 한 번 부딪쳤다가 다시 뒤로 튕겨져 풍운객잔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아이고! 손주가 날아온다!”
“잘 받아 봐라, 땡중아!”
싸움을 지켜보던 노인들 중 자연스레 앞으로 나선 것은 불요신승 각율이었다.
그는 양발을 단단히 땅에 딛고, 합장을 하듯 손을 모았다가 양손으로 소호의 몸을 받아 들었다.
“흐읍!”
일순간 각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계인이 찍힌 머리 위로 핏줄이 돋아났다.
그가 항상 입고 있는 황색 승복이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드드드드-.
팍!
각율의 온몸이 두부처럼 물컹하게 흔들렸다. 충격은 상쇄되었고 그의 발밑에서부터 가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쩍 하니 갈라지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콰드드득-.
각율은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일 장이나 뒤로 밀려났으나, 그래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소호를 무사히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은자촌의 노인들은 일제히 각율 주변으로 몰려가서 소호부터 받아 들었다.
“숨 쉰다!”
“또 기절했다! 이번엔 진짜 기절한 거겠지?”
“철 요대가 박살 났는데? 이거 귀한 것 아닌가?”
“귀하긴 무슨, 그게 뭐든 간에 필요하면 광 영감이 또 만들어 주면 되겠지! 그보다 애는! 무사하오?”
왁자지껄한 가운데, 각율만이 씁쓸한 얼굴로 허리를 두드렸다.
“다 늙은 땡중한테 이런 짓을 시키다니. 내 살다살다 이리 무거운 일격은 공화존자랑 검선 이후로 처음이구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땡중아.”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소호 주변에서 정신이 없는 사이.
장강용왕 추묵환만이 냉정을 지키면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소호를 살피던 노인들이 홀린 듯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소호를 날려 보낸 장기린.
그의 양옆에, 백색의 문사건을 쓴 마른 사내와 흑색의 화려한 비단 무복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