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6화
제30장 적자지화(嫡子之火) (6)
“천도에 어긋나는 귀기(鬼氣)가 치솟기에 나와 봤더니만.”
흰색으로 검과 국화 문양을 수놓은 검은 비단 옷을 입은 노인.
검선(劍仙) 구양재인은 혀를 차면서 장기린의 왼손에 난 상처를 지그시 응시했다.
“싸움 끝에 꽤나 손해를 보았군. 자네답지 않게.”
장기린은 왼쪽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잘 단련된 전완근 위로 짐승이 할퀸 것 같은 상처들이 선명한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제가 아직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자네도 사람인 게지. 자식한테 강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장기린은 역시 아무나 별호에 선(仙)이라는 글자를 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앉아서 천 리 밖을 내다볼 수 있다는 말처럼, 검선은 작은 단서들만으로도 장기린에게 벌어진 일을 모두 알아챘다.
“안타깝도다.”
검선은 은자촌의 노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소호 쪽을 힐끔 바라보며 탄식했다.
“천하를 떨게 할 만한 귀기로다. 본래 봄날의 햇살 같은 아이였거늘.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야?”
“제 불찰입니다.”
“쯧쯧,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지만, 얼마든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거늘. 결국 선택한 건 소호 저놈이야. 자네가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은자촌에 살던 우리 모두의 잘못인 게지. 너무 오냐오냐 키운 모양이야.”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반박은 하지 않았지만, 그로서는 수긍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쯧쯧.”
검선은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침중한 시선이 다음으로 닿은 곳은, 장기린의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문사 차림의 사내였다.
“흰 귀신아. 네가 내려온 것을 보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구나.”
“……검선.”
“소호는 어떠한가? 귀한 아이다. 잘못되어서는 안 돼.”
검선은 무학의 도를 통달해 우화등선을 준비하는 자였다.
인간의 도(道)를 벗어났을 텐데, 그의 말투에선 사람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황실의 수호신이었던 백택.
역사상 최초의 신수는 초점이 흐린 눈으로 소호가 있는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쓰고 있는 문사건이 바람에 흔들렸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택이 소호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기린. 우악스런 행동을 하였다. 네 몸속의 ‘그것’이 네 혼백과 일체화되었듯, 저 아이는 이미 집혼기와 엮여 있다. 그 연결을 억지로 부수다니. 아들을 죽이고 싶은 것인가?”
차분하고 무감정한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 숨은 질책은 더없이 날카로웠다.
장기린의 안색이 더욱 침중해졌다.
“그럴 리가.”
“그럼 자식이 광자(狂者)가 되더라도 신수가 되는 길은 뜯어말리겠다는 건가? 이미 인연은 이어졌다. 끊는다고 끊어지는 게 아니다.”
“……그럼 그걸 가만히 두고 보란 말이오?”
장기린이 눈에 열기를 띄었다.
“아들이 기이한 신기(神氣)에 휩싸여서 짐승처럼 구는데, 이성을 잃고 광증에 빠져 난폭해져 가는 아들을 가만히 두고 보란 말이오?”
파스스-.
장기린의 발 근처의 풀이 일부 말라 죽어 가다가 멈췄다.
백택은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본 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리 네가 심검을 다루더라도 혼백을 칼로 자르듯이 거추장스러운 부분만 떼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말로는 쉽겠지. 그러나 행동하지 않아서야 쓸모없는 탁상공론이오. 나는 두 눈으로 상황을 직접 보았고, 문제가 있어서 행동하였소. 소호가 갖고 있던 집혼기라는 물건은 분명히 잘못된 물건이오. 가만히 둘 수 없었소.”
장기린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계기야 어찌되었든 소호는 그 순간 폭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집혼기였다. 인성을 바꾸고 감정까지 조종하여 사람이 달라 보이게 만들었다.
마물(魔物)이 따로 없다.
어찌 아비로서 그런 모습을 보고 가만히 둘 수 있겠는가.
백택은 장기린과 가만히 시선을 마주했다.
“과거를 극복하지 못했군, 기린.”
“극복할 것도 없소. 그저 받아들이고 나아갈 뿐.”
“우리가 신수가 된 방식과 저 아이가 겪은 경험은 달라.”
“알고 있소. 그래도 가만 둘 수는 없소. 그런 지옥……. 나만으로 족하오.”
장기린의 결연한 기세를 백택은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대치하길 잠시.
풍운객잔 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검을 썼느냐! 기린! 일연적룡무를 삼식까지 쓴 것이야?”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검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장기린은 몸을 돌렸다.
축지법이라도 쓴 것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곁에 있었던 검선이 어느새 소호의 손을 붙잡고 앉아 있었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었는데도 전혀 보지 못 했을 만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거, 검선.”
“오셨습니까?”
한편, 갑자기 곁에서 튀어나온 검선을 보고 깜짝 놀란 은자촌의 노인들이 황급히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은자촌의 노인들은 무림 강호에서 원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무공을 익히며 얻은 항렬과 배분이 그러했고, 그들이 무림에서 세운 업적과 명성 또한 천하를 진동시킨다.
그럼에도 검선에게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장강용왕 추묵환이든 불요신승 각율이든, 그들이 무림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쯤 이미 검선은 그 당시 유성검왕이라 불리며 구양세가를 천하제일 세가로 올려놓은 절대자 중 한 명이었던 탓이다.
한 배분 위의 인물이자, 무림 전체에서도 태양처럼 드높은 존재이거늘.
어찌 감히 함부로 대할 수가 있을까.
“이리로 오시지요. 의원으로서 제가 볼 때는 소호는 무사해 보입니다.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한 덕분인지 근골도 멀쩡하고 혈맥도 무사합니다. 다만 맥이 평소보다 느린 것이 조금 신경이 쓰입니다만…….”
흑신의 우문환이 우려를 표하며 한 걸음을 물러섰다.
여기서부터는 의술(醫術)이 아니라 무공이자 선술(仙術)의 영역이었다.
검선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소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내가 한번 보마.”
검선은 소호의 손목을 붙잡고 두 눈을 반개했다.
“정말로 맥이 느리구나. 기묘하구나, 기묘해.”
검선은 소호의 명문혈에 장심을 대고 건곤조화신공(乾坤調和神功)의 기운을 조심스레 불어넣었다.
그는 소호와 익힌 심공이 달랐지만 반발은 걱정하지 않았다.
소호가 중점적으로 익힌 심공이 소림의 지고한 절학인 역근경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호가 어린 시절, 아버지인 장기린의 적룡창을 따라하던 시절에는 그에게 벌모세수하듯 혈도의 기초를 잡아 준 것이 다름 아닌 검선 구양재인이었다.
소호 본인을 제외한다면, 그의 내부 진기의 흐름에 대해 검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스슥-.
검선의 기운은 소호의 명문혈을 시작으로 임독양맥을 거쳐 신체 안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소주천을 이뤄 냈다.
인체의 모든 혈맥은 임독양맥과 연결되어 있다.
소주천을 이루면서 검선은 소호의 내부에 대해 새삼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무당, 소림, 곤륜, 거기에 이건 북원의 무공인가? 허어. 무공을 많이도 익혔구나. 욕심도 많도다.”
스으으-.
살짝 벌어진 소호의 입에서 탁한 숨이 빠져나왔다.
검선은 반개하고 있던 두 눈을 찌푸리며 건곤조화신공의 진기를 거두어들였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장기린과 백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기린 자네, 솜씨가 기가 막히는군. 무공이 또 무르익었어. 심혼에 타격을 입기는 했는데, 선천진기는 멀쩡하다. 오히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순수해졌다고 생각될 정도야.”
“허어.”
주변에 있던 노인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검선의 무공은 강호 제일을 논한다.
그런 그가 소호의 내부를 살피고 진기에 대해 평한다면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놀랍군. 번잡스런 귀령들을 정말로 깨끗하게 잘라 냈어.”
장기린을 추궁했던 백택조차 소호의 곁에 다가와 직접 두 눈으로 보자 감탄했다.
“그렇지만…….”
은자촌의 노인들은 검선에게는 선배에 대한 경의와 존경심을 보였다면, 백택에 대해서는 조금 꺼리는 듯한 분위기를 숨기지 못했다.
백택은 그런 어색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소호를 내려다보았다.
“불안정하다. 역시 집혼기의 문제인가.”
백택이 허공에 손을 뻗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부서진 철 요대가 그의 손으로 빨려들었다.
철컹-.
백택이 손을 살짝 비틀자, 너덜거리는 철 요대에서 숨겨진 약실이 덜컹 입을 벌렸다. 그 안에서 떨어진 손바닥 반만 한 장신구가 붉은색으로 빛났다.
우우웅-.
백택은 그것을 손으로 들어 눈앞에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정교하게 세공된 은판 위에 박힌 호안석이 붉은색의 기운을 은은하게 흩뿌리고 있었다.
“역시 결함이 있군.”
반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집혼기를 진지하게 살펴보던 백택은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범재가 천재를 따라 하기 위해 집념을 불태운 결과인가……. 예전보다 뛰어난 점은 있으나, 과도한 욕심이 화를 불렀다. 이걸로는 혼백들이 한데 묶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니 완전한 신수가 될 수 없을 터. 결국은 파멸밖에 없는 실패작이다.”
무공으로 무림에서 손꼽히는 자가 검선이라면, 주술과 상단전의 무학에 관해서는 백택을 따를 자가 거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장기린은 백택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기린. 네가 격퇴한 신(神)은 일부일 뿐이다. 지금 이 집혼기를 부순다 해도 잔뜩 모여 있던 혼백은 너의 자식과 결합했으니 사라지지 않을 테지. 결국은 미봉책(彌縫策: 눈가림만 하는 일시적인 해결책)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새로운 신을 찾든 만들어 내든, 몸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일은 끝나지 않아.”
“그렇다 해도 감수하겠소.”
장기린은 냉철하게 말했다.
“왕진이든 황실이든, 이 이상 소호가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그 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소.”
“……나는 부수고 쫓아낼 수 있을 뿐이다. 백택은 지키는 동물일 뿐, 주술을 쓰는 신(神)이 아니야. 우리가 그러했듯 새로운 신을 찾아서 받아들이게 도와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고 있소.”
장기린은 미리 생각해 둔 방편을 이야기했다.
“남해군도에 내 의제(義弟)가 가 있소. 청조각의 신녀(神女)와 혼인을 한 친구요.”
“검각의 신녀와 혼인을 했단 말인가. 검각이 모시는 검혼(劍魂)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텐데?”
“…….”
“그렇군. 당사자는 무사했으나 자식에게 영향을 끼쳤군.”
백택은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듯이 중얼거렸다.
초점이 흐린 그의 두 눈은 대체 어디까지 내다볼 수 있는 것인가.
장기린은 묵묵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섭우생이라는 친구요. 그 동생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검혼과 대화를 나눠서……. 그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소. 이제는 강호 무림에서 거론될 정도로 주술에는 일가견이 있는 자가 되었지. 그러니 방도가 있을 것이오. 없다면, 반드시 찾아내겠소.”
강렬한 의지.
확고한 신념이 담긴 목소리였다.
백택은 잠시 고민하다가 손에 쥐고 있던 집혼기를 바스러뜨렸다.
우우웅-.
부서진 집혼기는 붉은 빛 무리로 변해 소호의 몸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쿨럭!”
한 번 기침을 토해 낸 소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백택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기 위해 열흘은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너는 무엇을 할 것이지?”
백택은 질문을 던진 것이 그임에도 불구하고, 답을 알고 있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장기린은 곤히 잠든 소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단호하게 답했다.
“나는 경고를 두 번 하지 않소. 한 번 경고를 어긴 자는, 또다시 어길 게 분명하기 때문이지.”
파스스-.
장기린의 몸 주변에서 풀이 말라 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무시무시한 살기.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붉은 악귀의 힘이 잔을 꽉 채운 물처럼 위험하게 찰랑거렸다.
“이번 일의 원흉을 죽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