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08화 (437/686)

13권 7화

제30장 적자지화(嫡子之火) (7)

무림 강호에서 가장 경계하고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단체는 어디인가?

강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가장 유명한 몇 군데를 들 것이다.

태산북두 소림사.

만검조종 무당파.

일만걸개의 개방이나, 각 지역의 이권과 인맥을 꽉 움켜쥐고 있는 오대 세가도 거론될지 모른다.

그런데 강호 무림뿐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는 달리 답할 것이다.

황실의 재가를 얻고 무림에 고삐를 채우려는 흑시군.

그런 흑시군에 맞서며 큰 사건을 일으키는 백검회 같은 곳들 이야말로 강호 무림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위험천만한 단체이니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곳이라고 말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전자가 맞을 수도 있고, 후자가 맞을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재미있게도, 거론된 모든 단체의 수장에게 물으면 그들은 모두 똑같이 한 곳을 지목했다.

하남 인근의 삼산현.

이름 모를 화전촌이야말로 강호 무림의 평화를 위해 가장 신경 써서 주목해야 할 곳이라고 말이다.

***

평범한 산골 마을에 불과했던 삼산현에 어느 날부터 꽤나 많은 비둘기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삼산현에서 날아간 것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숫자였으나, 몇 시진 지나지 않아 이곳으로 날아든 비둘기의 수는 수십 마리였다.

그 후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비둘기가 날아왔다.

날아드는 비둘기들은 제각각 발목에 연통을 매달고 있었다. ‘급보(急報)’를 알리는 붉은 문양이 연통마다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비둘기가 바빠진 만큼 사람들도 바빠졌다.

갑자기 삼산현 인근의 마을엔 때 아닌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명절도 아닌데 거지 떼가 잔뜩 모여들었으며, 풍운(風雲)이라 쓰인 깃발을 매단 표사들과, 우마차에 상품들을 잔뜩 실은 상인들도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그뿐인가?

도적이라고 해도 믿을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과, 무기를 찬 낭인들도 심심치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이 모이는 법이다.

마을의 객잔은 갑자기 밀려드는 손님들로 꽉 차 버렸다. 심지어 잘 곳이 부족한 탓에 손님들끼리 시비가 붙어 칼부림이 나기까지 했다.

“아이고, 도대체 왜 갑자기 난리야? 삼산현에 금광이라도 발견되었나? 왜 여기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야?”

“자네 못 들었나?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군. 상계의 거물도 한 명 온 모양이고. 그것 때문에 그 거물의 눈에 들려는 상인들부터, 큰 판에 한몫 끼어 보려는 무림인들까지 몰려들어서 이 난리일세.”

“허어. 대체 무슨 일인데?”

“몰라. 자세한 건 아무도 이야기 안 하니까. 다만…….”

“다만?”

“문제가 된 건 여기가 아니고 화전촌이라는군.”

“화전촌? 저 험한 산길 위에 있는?”

“그래. 거기.”

“허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우리 같은 촌부들이야 알아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나.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지. 요즘 방값이 부르는 게 값이라더군. 난 오늘 우리 집 비워 주고, 방값이나 벌어야 되겠네.”

“이 사람. 돈독이 올랐구만. 멀쩡한 가정집을 비워 주려 하다니. 자네랑 가족들은 어디서 자고?”

“우리야 근처 아무 데서나 자리 깔고 자면 되지. 날씨가 추운 것도 아닌데 한몫 벌어야 되지 않겠나?”

“그래? ……크흠! 나도 집에 가서 마누라한테 집 청소나 좀 하자고 해야겠구만.”

“나한텐 돈독이 올랐다면서?”

“그깟 돈독, 나도 좀 오르지 뭐……. 돈이면 염라대왕도 부린다던데. 벌 수 있을 때 벌어야지.”

삼산현의 촌부 두 사람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

장기린은 용사비등한 필체로 새겨진 풍운객잔의 현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풍운객잔.

정겨운 이름이었다.

그는 그동안 저 현판 아래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땅에 떨어진 솔방울 하나가 거대한 노송이 되듯.

북로전쟁에서 적룡기마대로 복무하던 시절, 대(隊)의 막내였던 진구의 말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평범한 삶을 살려면 무조건 객잔이 최고라던 말.

그 말 한마디가 장기린을 항주로 불렀다.

항주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만났던가.

친우, 동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그 모든 인연을 맺어 준 것이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풍운객잔이 아니던가.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게 벌써 이십 년 전이군.”

그는 묵묵히 현판이 매달려 있는 기둥을 쓰다듬었다. 손때가 묻어 매끈하게 다듬어진 나무 결이 생생하게 만져졌다.

“넌 얼마나 갈 것이냐? 십 년? 이십 년?”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거늘.

한낱 나무 기둥이 그보다 더 오래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잠시 후 마음을 굳게 먹은 그는 성큼성큼 내실로 들어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은은한 연꽃 향이 퍼져 나왔다.

이십 년 전과 똑같은 것은 풍운객잔의 현판만이 아니었다.

첫 만남 때와 똑같이 발랄하면서도 대차고, 계산이 명확하면서도 의리가 있는 여인.

병아리처럼 샛노란 옷을 입고, 단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려 뽀얀 목덜미를 그대로 드러낸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눈앞에 앉아 있었다.

“휘연.”

진휘연.

장기린의 반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상에 누워 있는 그들의 하나뿐인 자식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끼이익-.

장기린은 그녀의 곁에 의자를 끌어와 함께 앉았다.

“열흘간 잠만 잘 거래요. 어쩌면 더 걸릴 수도 있구요. 소호가 마음이 지쳤나 봐요.”

“그래. 그렇다더군.”

“이러다 못 일어나면? 그럼 우리 소호는 이대로 평생 눈을 못 뜨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장기린은 백택의 말을 믿었다.

심지어 흑신의 우문환마저 소호를 진맥하고 같은 진단을 내렸으니 의심할 여지는 없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내린 진단이다. 분명히 정신을 차릴 거야.”

“후유증은요?”

쓰러진 자식을 보는 어미의 마음이 오죽할까.

휘연은 날이 선 목소리로 꼼꼼하게 되물었다.

“다친 사람이 오랫동안 못 일어나면 머리가 이상해진대요. 부모자식도 못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고 해요. 우리 소호가 그러면 어떻게 해요?”

“괜찮……을 거다. 소호는 강한 아이야.”

장기린은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이 소호를 쓰러뜨렸다면서요?”

“그래.”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

장기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백택에게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휘연에게는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나은 방안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호를 쓰러뜨리고 강제로 집혼기를 떼어 내는 것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한 방법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순간에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건 확실해.’

장기린은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진휘연은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작은 마을을 답답해하기에 내보내 줬는데. 무공을 좋아하면 제대로 익혀 보라고 황실에서 지원하는 학관에 들어가는 것까지 허락해 줬는데.”

“휘연, 너의 잘못이 아니야.”

“부모가 잘못 가르친 탓이 아니라면 누구의 탓이죠? 무산학관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차라리 유명한 문파에 맡기거나, 좀 지겨워해도 우리 마을에 계속 데리고 있을 걸 그랬어요.”

장기린은 휘연의 손을 붙잡았다.

가늘고 매끈한 손가락들은 추위를 타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뱀의 혀 같은 간언으로 소호를 유혹하고, 집혼기라는 물건을 갖고 있게 만든 왕진의 탓이다.”

“그런가요?”

“그래. 그자의 탓이야.”

장기린은 진휘연을 위로하듯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소호야. 왜 그랬니.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왜 그런 위험한 물건을 받았어?”

진휘연은 대답이 없는 소호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장기린은 마음 아파하는 진휘연을 보자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왕진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소호에게 집혼기를 주다니.

악의 씨앗을 뿌린 자나 마찬가지다.

“만약 이 모든 게 왕진의 탓이라면…….”

휘연의 어조가 변했다.

차분한 말투 안에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만히 두지 않겠어요. 풍운상회가 지닌 모든 힘을 사용해서라도.”

“휘연.”

“끼어들지 말라고요?”

장기린은 엄중한 기세로 고개를 저었으나, 그녀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내 자식의 일이에요. 왕진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어요. 왕진 태감에게 도움이 되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을 거예요.”

“위험해.”

“먼저 소호를 괴롭힌 건 저자들이에요.”

휘연의 목소리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저를 말릴 건가요?”

“아니, 그럴 리가.”

장기린은 그녀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하지만 휘연이 하는 일은 의미가 없을 거다.”

“어째서 그렇죠?”

“내가 먼저 왕진을 죽일 것이니까.”

휘연이 처음으로 동요했다.

그녀도 장기린이 가만히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건 느낌이 달랐다.

다만 휘연의 동요는 금방 가라앉았다.

그녀도 장기린과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

은자촌의 적자를 건드린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그런가? 나는 혼자고 휘연은 상회의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으니까 다를 수밖에.”

장기린은 나직하게 웃었다.

“나를 말린 건가?”

“……그럴 리가요.”

“그럼 됐다. 나에게 맡겨. 다녀오지.”

장기린은 휘연의 손을 놓았다.

“여보.”

그녀는 처음으로 소호에게서 시선을 떼고 장기린을 바라보았다.

“조심해요.”

길지 않은 말에 진한 걱정이 묻어났다.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밖으로 나섰다.

***

히히힝-.

건장한 준마의 고삐를 잡고 밖으로 나오자 은자촌의 노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장강용왕 추묵환부터 일흉대기 광사로까지.

모든 이들이 무거운 표정이었다. 소호는 그들에게 있어서 친손주와 같은 아이다.

그런 아이를 건드렸다.

그들도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오지 않은 건 검선 어르신과 백택뿐인가.’

장기린은 투레질을 하는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검선과 백택 또한 나름의 방법으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 점은 의심하지 않았다.

“우린 우리 나름대로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로 했네. 촌장은 정말로……. 그자를 죽이러 갈 것인가?”

“예.”

“운화나 다른 동생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을 거고?”

“제 일입니다. 동생들도 각자 가족이 다 있는데 끌어들여선 안 되겠지요. 소호의 치료에는 도움을 청하겠습니다만.”

복수에는 끌어들이지 않는다.

장기린의 마음은 확고했다.

“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세.”

“그렇기에 더더욱, 저 혼자 다녀와야 합니다.”

그의 의동생들을 부르면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허나 그러진 않는다.

동생들의 희생을 강요하다니. 그건 장기린답지 않은 일이었다.

장기린은 말의 고삐를 놓고 정중하게 은자촌 노인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꼭 돌아올 것이지만, 곧바로 오진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실의 실세, 왕진을 치는 일이었다.

실패하면 죽는 것은 당연하고, 성공한다고 해도 나라에 쫓기는 몸이 될 터.

“성급한 짓은 하지 말게. 소호는 우리 모두의 손주지. 그리고 자네도, 우리 모두의 자식 같은 존재야.”

“어르신.”

“복수를 말릴 수는 없지. 우리도 그놈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니까. 다만 자네 혼자 짊어질 생각은 말게. 그건 우릴 무시하는 처사야.”

“감사합니다.”

진한 마음을 주고받았다.

이 이상 힘이 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천군만마를 등에 업은 장수가 이런 기분일 것인가.

스윽-.

장기린은 잠시 망설였다.

이미 마음을 정했음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위로 들어 올렸고, 덜컹거리던 풍운객잔의 현판이 장기린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콰직!

쩍- 하니 쪼개진 현판 안에서 나온 것은 한 자루의 철창이다.

윤기가 흐르는 흑철 재질로 창날과 창대가 한 몸으로 이루어진 대도(大刀)형태의 창이다.

명장의 손길이 닿은 듯, 창대 끝에 세공된 용머리 모양이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했다.

“진청룡이 그 안에 있었던가……!”

장기린의 성명병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추묵환이 탄성을 토해 냈다.

반으로 쪼개지고 부서진 현판이 바닥에 떨어졌다.

장기린은 현판의 조각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말에 올라탔다.

“다녀오겠습니다.”

정중한 포권 끝에 말에 올라탄 장기린은 삼산현을 내려갔다.

개방, 하오문, 동창.

무림 강호에 유명한 모든 정보 집단들은 그날 급보를 의미하는 붉은색 연통이 달린 전서구를 날렸다.

제각각 방식은 달랐으나, 최종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은 동일했다.

은자촌(隱者村) 준동(蠢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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