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09화 (438/686)

13권 8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1)

황실의 아침은 분주했다.

특히 사례감이라는 기구의 장이 되면 세세하게 확인해야 할 사안이 아침에만 수백 가지에 달한다.

사례감은 황제와 관련된 모든 의식을 주관하며, 그 일 중에는 황제에게로 올라가는 문서들을 확인하고 최종적인 검열과 심의를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잠깐.”

오늘 황제의 침소에 들어간 탕약의 이름과 약재의 종류를 보고받던 왕진은 급한 걸음으로 자신에게 뛰어오는 환관을 발견하고는 기존의 보고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죠?”

“태감, 긴히 살펴보라 하셨던 그곳에서 급한 연통이 왔습니다.”

“그곳?”

왕진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환관이 내미는 종이를 받아 펼쳐 보았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진하게 분칠한 얼굴 위로 초승달처럼 가는 눈썹이 위로 꿈틀 움직였다.

“이 연통이 언제 온 것이죠?”

“방금 도착했습니다. 하남에서 올라온 연락이기는 하지만, 아직 반나절이 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왕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보고를 기다리는 환관들에게 퇴청을 명했다.

“잠시 쉬고 싶군요. 일각 후에 다시 시작하도록 하죠.”

“예.”

환관들은 평소와 다른 왕진의 모습에 의아해했으나 군말 없이 물러났다.

왕진은 얇은 문 너머에 마련된 작은 공간으로 향했다.

온갖 서류와 죽간들이 쌓여 있는 방 안은 시큼하면서 텁텁한 먹 향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대인? 벌써 끝나셨어요?”

세필로 열심히 글자를 써 내려가던 선이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뽀얀 얼굴에 어깨선은 가늘었다. 여장을 하더라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중성적인 느낌의 미청년이다.

왕진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품 안에서 그가 평소에 바르는 분첩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가짜 손가락을 끼운 상태로 착용하고 있던 흰색의 수투도 벗어 주었다.

“선, 아침 보고는 네가 해 주어야 할 것 같구나.”

“아……!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이미 몇 번이나 했던 일이기에 선은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방 한구석에는 아예 왕진이 평소에 입는 관복이 걸려 있기도 했다.

선에게는 완전한 기억력 말고도 뛰어난 능력이 하나 있었는데, 왕진과 체형이 비슷한 데다 그의 말투와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모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도와주었으나, 이제는 왕진에게 급한 일이 있을 때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꿔 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우선해서 알아봐야 할 일이 생겼다. 급한 일일 것 같구나.”

“오늘은 폐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회의가 있는 날인데요? 아마 대인을 찾을 거예요.”

“네가 적당히 대응하렴.”

선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젓는 왕진을 보며 난감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별말 않고 받아들였다.

왕진은 선이 그의 관복을 입고, 얼굴에 분칠을 해서 그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가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재개된 보고에서 사실 왕진이 아니라 선이 보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환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후후, 그렇군요. 계속해서 진행해 줘요.”

“예. 태감.”

간드러지는 웃음, 과장된 몸짓.

선은 완벽하게 왕진이라는 존재를 모사하고 있었다.

왕진은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그런 선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

“흑시군에 들어가는 물자들이 도적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동창의 병필태감 왕문은 왕진에게 충직한 사람이었다.

환관이라 거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턱 끝에 난 수염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같은 왕씨이기는 하지만 먼 친척일 뿐 같은 가문 출신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같은 왕씨인 게 친근감이 들어서, 왕진이 챙겨 주다 보니 어느새 능력을 발휘해 동창을 지휘하는 병필태감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십이감 사사 팔국.

다 합쳐서 이십사아문이라 불리는 사례감의 조직 내에서도 동창의 지위는 독보적으로 중요한 자리였다.

왕진이 그런 중요한 자리의 인사를 허투루 처리할 리가 없다.

왕문은 왕진이 죽으라고 명하면 그 자리에서 칼을 물고 죽을 수 있는 자였다.

“도적질이라니. 감히 흑시군에 들어가는 물자를 도적질하는데 흑시군에서는 가만히 있었나요?”

“물론 흑시군에서 나서서 붙잡으려 했습니다만……. 산속에서는 도저히 따라잡지를 못해서 결국 화살만 실컷 맞다가 성과 없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인명 피해는?”

“부상자 말고는 없습니다. 물자를 빼앗긴 것이 다입니다.”

“도적놈들이 선은 지키고 있네요.”

“예. 그런데 묘한 것이 그런 도적질이 한 곳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오늘 아침만 해도 세 곳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하남에서 두 건, 안휘성에서 한 건이지요.”

“호오.”

“갑자기 모든 도적들이 미친 것일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병필태감 왕문은 지도를 펼쳐 세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왕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은 병필태감의 나쁜 버릇이에요. 녹림수로맹이죠?”

“사실 그렇다고 보고 있습니다.”

“거긴 백검회 때문에 바쁜 것 아니었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백검회는 숨는 것에 능하니 싸움을 길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장강용왕 말이군요.”

병필태감은 감복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다 알고 계셨군요.”

“오늘 아침에 들었어요. 은자촌이 결국 움직였다면서요?”

“예.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이 하산했습니다.”

하남 삼산현의 은자촌.

왕진 태감은 물론이고 동창을 지휘하는 병필태감도 늘 주의 깊게 살펴오던 곳이었다.

“은자촌에서 하산한 장강용왕은 곧바로 본산인 백경채로 가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사방에 파발을 띄웠습니다.”

“그 결과가 흑시군의 습격이다?”

“아직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만, 시기상 공교로우니 장강용왕의 지시였을 거라 생각됩니다.”

왕진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생각하는 대로 일이 돌아간다면, 흑시군의 물자를 조금 빼앗긴 것 따위는 사소한 일이었다.

“우선은 이 이상 일이 잘못되지 않게 흑시군 모두가 경계하라고 전해 주세요.”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은자촌에 있던 다른 자들은…….”

왕진이 질문을 이어 하려던 순간이었다.

쿵. 쿵.

검은색 무복을 입은 동창의 요원이 집무실을 부술 듯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의 무복은 일부가 찢어져 있었고, 무릎과 팔꿈치에는 흙과 풀이 묻어 있기도 했다.

헐떡이는 가슴 위로 거친 숨이 쏟아져 내렸다.

“태감!”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조금 있다가 보고하거라!”

요원은 미간을 찌푸리는 병필태감을 향해 부복하며 외쳤다.

“급보입니다! 지금 말씀드려야 합니다.”

“어허!”

“강호가……!”

벌떡 일어서려는 병필태감을 제지하며 왕진이 앞으로 나섰다.

묘한 기운이 일렁이는 왕진을 힐끔 바라본 동창의 요원이 더욱 깊게 부복했다.

“말하세요. 강호가 어쨌다는 거죠?”

“강호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

일정한 속도로 들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장기린은 관도 끝에 보이는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유히 떠다니는 먹구름 사이로 맑고 청명한 하늘이 빼꼼 고개를 빼고 있었다.

말을 타고 얼마나 달려야 저 청명한 하늘에 닿을 수 있을까.

장기린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편자 갈아 드립니다! 칼도 갈고 망치도 갈고 뭐든지 갈아 드립니다요!”

사람이 그리 많이 다니는 길도 아니건만, 언덕 사이로 좁아지는 길목에서 한 사내가 좌판과 숫돌을 깔아 놓고 호객을 하고 있었다.

가끔 사람들이 지나가긴 했지만 대부분이 마차를 탄 사람이거나 봇짐을 메고 걸어가는 상인들이었다.

손님은 적을 수밖에 없다.

사내는 장기린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점점 더 목소리를 높였다.

“대인! 대인! 말이 먼 길을 온 것 같은데 편자 한번 갈아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요?”

“괜찮소.”

장기린은 거절의 뜻을 비쳤으나, 사내는 붙임성 좋게 다가와 말의 편자를 살폈다.

“아이구, 발굽이 꽤나 길었네. 편자를 갈기가 부담스러우시면, 끌로 조금만 매끈하게 다듬어 드릴깝쇼?”

“괜찮소.”

히히힝-.

장기린이 타고 있던 갈색의 준마가 사내를 경계하듯 앞발을 쿵쿵 내딛었다.

사내는 화들짝 놀란 것처럼 과장스럽게 피하면서 장기린의 곁에서 중얼거렸다.

“검선이 구양세가에 나타났습니다. 말년의 심득을 선보이고, 정파 무림 세가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겠다면서 육대 세가의 회합을 소집했습니다.”

사내는 괜스레 말목을 몇 번 쓰다듬었다.

“당연히 소문이 퍼지면서 난리가 났고, 군웅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흑시군들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무림 세가 근처를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다른 곳은 비교적 허술해질 겁니다.”

사내는 할 말을 끝냈다는 듯이 훌쩍 물러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귀찮게 해서 실례했습니다요. 그래도 다음 역참쯤에서는 꼭 편자 한번 갈아 주십쇼. 너무 무심하시면 말발굽에 피가 날 것입니다요.”

“……그렇게 하겠소.”

장기린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편자를 가신다굽쇼?”

사내는 장기린의 뒤에서 마차를 타고 천천히 이동하던 상인에게 호들갑을 떨면서 접근했다.

누가 봐도 한몫 벌고 싶어 하는 상인의 얼굴을 한 사내였다. 아무리 닳고 닳은 사람들이라도 저런 사내를 의심할 자는 없으리라.

장기린은 하오문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며 갈 길을 재촉했다.

뜻밖의 정보를 전해 준 사내는 장기린이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도 계속해서 편자를 갈아 준다면서 힘차게 호객을 해 댔다.

“대인, 만두 하나 드셔 보세요. 제가 직접 만든 만두입니다. 자아-,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있는 만두예요. 지금 사신다고 하면 특별히 한 접시에 동전 열 개! 에이, 기분이다. 만두 두 개는 덤!”

통통하게 살이 찐 인상 좋은 여인이 박수를 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길목에 작게 아궁이까지 만들고, 그 위에서 만두를 찌고 있으니 고소한 만두 향이 솔솔 풍겨 왔다.

마침 배가 좀 고프던 장기린은 말에서 내려서 노점으로 다가갔다.

노점에는 봇짐장수로 보이는 상인 두 명이 앉아서 벌써 각자 만두를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장기린은 그 옆의 의자에 편안하게 걸터앉았다.

“한 접시 주시오.”

“예이,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경쾌한 손놀림으로 대나무 그릇 위에 담아 준 만두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나를 손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바로 곁에서 만두를 먹고 있던 상인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소림사에 불요신승 각율이 나타나 불법을 설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진 괜찮았는데, 그 이후에 팔파일방만이라도 무림맹을 소집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해서 하남 무림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우적- 우적-.

상인이 만두를 씹어 삼키는 사이, 장기린에게 턱- 하니 물을 한 잔 내려놓은 아주머니가 나직하게 말했다.

“풍운상회는 황실과 무산학관에 지원하던 재물들을 싹 끊어 버렸고, 수로맹에서는 흑시군과 관련되었다면 무조건 습격해서 작살을 내고 있다네요.”

휘적휘적-.

옆에서 수거한 대나무 접시를 닦는 손길이 능숙했다.

“그뿐인가? 강북 제일 살수 문파 일야회에 그간 잊혀 있었던 전대 문주 묵신이 나타나서 누군가를 지키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고 소리쳤다는데, 아직 못 만났나요?”

장기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못 만났소.”

“그렇군요. 곧 만날지도 몰라요. 강호 무림이 들썩이고 있어요. 대인의 장도에 행운을 빕니다.”

장기린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르신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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