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10화 (439/686)

13권 9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2)

검선이 육대 세가의 회합을 주최한 것도 놀라웠지만, 불요신승 각율과 묵신이 각자 자신의 문파로 돌아가 일을 벌인 것 또한 너무나 놀라웠다.

‘불요신승 어르신, 묵신 어르신. 두 분은 문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셨는데……. 소호 때문에 가 주신 것인가.’

은자촌의 노인들은 이미 문파를 등지고 나와 은퇴한 전대의 고수들이었다.

어쩌면 피를 나눈 가족들보다도 더 깊고 끈끈한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같은 문파에서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다.

그런 장소에서 빠져나온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분명히 많은 것을 포기하고 빠져나왔을 터.

그런데 그런 곳에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웬만한 각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터였다.

“대단한 분들이셨다는 걸…… 새삼 느끼는군.”

장기린이 조용히 중얼거린 말에, 가장 끝에 앉아 있던 봇짐 상인 한 명이 투덜거리듯이 대답했다.

“아이고, 대단하다마다요. 지금 그분들 몇 명 때문에 강호가 뒤집어지다 못해 우리도 갑자기 날벼락을…… 으억?”

“공 씨. 거 할 말, 못할 말도 못 가리네? 뒤지고 싶어?”

투덜거리는 상인을 제지한 건 만두를 쪄서 팔던 아주머니였다.

그녀가 집어 던진 대나무 접시를 공씨는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얻어맞았다.

“아이구, 아파라. 아이구, 나 죽는다.”

“지랄을 해요, 지랄을. 대인, 저 등신은 그냥 늘 저러는 놈이니까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우린 대인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찜기를 정리하는 여인의 눈빛에선 간절한 집념이 흐르고 있었다.

“복수요?”

“비슷해요. 쳐 죽일 원수 놈이 너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서 포기했는데. 대인께서 나와 주셨네요.”

그녀의 말을 들어 보니 이미 하오문은 그가 왕진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가. 내가 할 일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기대하고 있나 보군.”

“물론이죠. 원한이 하늘에 닿았어요.”

“나는 그저 개인적인 은원을 해결하고 싶을 뿐이오.”

장기린은 만두를 집어 들고 입안에 넣어 보았다.

쫄깃하게 씹히는 만두피 너머에서, 진한 고기 향과 함께 미끈거리는 육즙이 입안을 농후하게 채웠다.

“맛있군.”

이십 년이 넘게 객잔 주인 행세를 하던 장기린이 맛있게 느낄 정도의 맛이었다.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차려 놓은 만두 가게임에도 불구하고, 만두는 정말로 맛이 있었다.

“맛있죠? 나중에 은퇴하고 객잔이나 차릴까 봐요.”

“객잔……. 좋지. 좋은 생각이오.”

장기린은 처음의 기세 그대로, 작은 소룡포 열두 개를 모두 먹어 치웠다.

“더 드릴까요?”

“괜찮소.”

장기린은 전낭에서 은자 세 개를 꺼내 내려놓았다.

만두를 팔던 여인이 너무 많은 돈에 깜짝 놀라 도로 돌려주려는 것을 만류했다.

“좋은 이야기 고맙소.”

만두 값으로는 과하지만, 정보값으로는 오히려 싼 편이다.

장기린은 다시 말에 올라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정을 다시 시작했다.

***

장기린은 마을에 들르지 않았다.

꼭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들르겠으나, 음식이든 물이든 생존에 필요한 대부분을 자연에서 얻을 수 있으니 마을에 들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눈에 띄면 띌수록 왕진의 눈에 띌 확률도 높아진다.

그는 계속해서 움직였고, 타고 있는 말이 쉬고 싶어 할 때를 제외하고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거 되게 빠른 분이오. 찾기가 쉽지 않았수다.”

장기린이 의외의 사람과 마주친 건 그가 만두 가게를 지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천 옷을 대충 몸에 걸친 사내가 길목에 서 있었다.

평소에 잘 씻지 않는지 머리는 봉두난발이었고 목덜미와 손톱 끝은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때가 굳어 있다.

아무리 봐도 거지인데, 희한하게도 평생 운동 한 번 안 한 고관대작들처럼 뱃살이 출렁거리니 정말 거지인지 의심이 되는 특이한 사내다.

‘다섯.’

장기린은 평온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퉁퉁한 사내 말고도 네 명의 거지가 근처 산길에 숨어 있었다.

자세히 보면 봉두난발을 한 거지들이 슬쩍슬쩍 나무 사이로 모습을 비췄다.

“어떻게 사람이 하남에서 대명부까지 오는데 단 한 군데도 마을을 안 들를 수가 있는 거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밥은 제대로 먹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오? 내가 그것 때문에 마을을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원.”

장기린은 기가 차다는 듯이 투덜거리는 사내의 허리춤을 힐끗 바라보았다. 동냥을 위해 챙겨 둔 바가지 하나랑, 허리띠를 꼬아서 만든 매듭 다섯 개가 사내의 움직임에 맞춰 출렁출렁 흔들리고 있었다.

“말 위에서 지내는 건 익숙해서.”

장기린은 거지가 따라오든 안 오든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를 취했다.

“북로전쟁에서 활약했다더니. 몽고 달자 놈들만큼이나 말을 좋아하시나 보구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한테 밥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에 있겠소?”

거지는 자신의 두툼한 뱃살을 퉁퉁 두드리며 씩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누런 이빨이 드러났다. 더럽지만 붙임성은 좋은 웃음이었다.

더럽지만, 말이다.

“불필요한 참견이군.”

“어허, 참견이라니. 그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오. 거지보다 못 먹어서야 큰일을 할 수 있겠소?”

“할 수 있소.”

훈계에 가까운 말투다.

붙임성은 좋지만 그다지 예의는 없는 모습이었다.

“모든 걸 뒤로하고 화전촌에 은거하기에 과연 강호인은 아니구나 싶었소. 그런데 자식을 건드리니 곧바로 무섭게 뛰쳐나오는군. 그래서야 이용당할 거요. 그 화전촌이 허울만 좋은 소꿉놀이라는 뜻이오.”

“개방이 상관할 바는 아니군.”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말 안에 담긴 내용이 꽤나 신랄했다.

장기린의 말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뚱뚱한 거지는 취한 사람처럼 휘적휘적 걸으면서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왔다.

“거 매정한 분일세. 천하에 짝이 없다는 이야기가 무공에 대한 것만은 아닌 모양이오. 그보다 그 창은 무엇이오? 무기를 놓은 지 오래되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보통 물건이 아닌 듯하오? 한번 살펴봐도 되겠소?”

“안 되오.”

장기린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말을 거는 그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 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힝-.

“이제야 날 봐주시는구만. 반갑소, 개방에서 분타주를 맡고 있는 오장방이라하오. 강호 동도들은 나를 독개(毒丐)라고 부르고 있소.”

“장기린. 무슨 일이오?”

독개는 건성건성 포권을 취했고, 장기린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과연 개방이랄까.

팔파일방 중에서도 손꼽히는 대문파답지 않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자였다.

서로 간에 허술한 예의는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어느 길로 갈지 물어보려고 왔소이다.”

독개 오장방은 손가락으로 갈림길을 가리켰다.

“어디 보자, 왕진의 목을 날리려면 목적지는 북경일 테고. 여기서 길이 갈라질 거요. 저 길을 따라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태원부나 석가장이 나오고, 반대로 우측으로 물길을 타면 천진으로 가서 그다음에 북경으로 가는 방법이 있소. 사실 이게 제일 정도(定道)고 빠른 길이지.”

“빠른 길로 가고 있소.”

히히힝-.

“워워, 말고삐는 아직 풀지 마쇼. 성질도 급하셔라. 그야 그렇겠지.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고 온 것이오.”

“물길을 따라 천진을 가서는 안 된다?”

“그렇소.”

장기린은 자신만만한 오장방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이유가 무엇이오?”

“동창은 삼산현의 화전촌을 늘 감시하고 있었소. 당연히 당신과 금분세수(金盆洗手)한 노인들이 다시 강호에 나왔다는 사실도 바로 알았겠지.”

“…….”

“아! 오해는 마시오. 우리 개방은 그들과 협력하지 않소. 오히려 서로 하나라도 더 숨기고 안 가르쳐 주려고 견제하는 관계라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소. 이번에도 어떻게든 무쌍귀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노력 중이라오.”

독개 오장방은 퉁퉁한 배를 내밀면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속뜻을 명확히 내비치지 않아 의뭉스럽기는 하나, 장기린을 도우려는 것만큼은 진짜 같았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오?”

“그야 우리 방장님이 그쪽을……. 크흠,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촌장을 도와줘라.’라는 불요신승의 부탁도 있었소.”

“…….”

“아무튼, 천진 쪽 물길은 사지(死地)요. 무조건 피해서 돌아가야 하니 태원으로 가시오.”

“왕진이 대비한 건가?”

“그렇소. 흑시군 이백과 살수 문파 여럿에게 지시한 걸로 알고 있소. 심지어 요즘 명성이 자자한 금장(金將)도 나온다더군.”

“금장?”

“최근에 황실 금의위의 장수로 임명받은 자요. 검술이 대단하다더군. 항상 황금 갑주를 입고 있다고 해서 금장이오.”

황금 갑주를 입은 황실의 장수라니.

실력은 둘째치고 전장에서 눈에 많이 띄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화살 많이 맞겠군.’

장기린은 전쟁터를 전전하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그게 다인가?”

“음? 그렇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요. 천진으로 가서 북경으로 들어가는 경로는 포기하시오. 그놈들은 포위망을 촘촘하게 짜둔 채로 당신이 빠져나갈 수 없게 집요하게 따라붙을…… 응? 어디 가시오?”

장기린은 다시 말을 출발시켰다.

갈림길에는 독개 오장방의 말대로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좌측은 태원부와 석가장. 우측은 천진으로 가는 물길이다.

장기린은 표지판을 힐끔 본 뒤, 그대로 몸을 틀었다.

히히힝-.

길이 정해졌고, 이젠 달릴 일만 남았다.

장기린이 타고 있던 준마가 길게 울면서 달리기 위해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내가 그렇게나 말했는데 왜 그리로 가시오?”

깜짝 놀란 오장방이 당황하며 달려왔다.

장기린은 천진으로 향하는 물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난 거짓말을 한 게 아니오! 유인책을 쓰지 않았소. 정말로 당신을 걱정해서 조언하는 것이란 말이오!”

“알고 있소.”

“그런데도 천진을 골라? 대체 이유가 뭐요? 흑시군이랑 황실의 장수가 기다리고 있다니까?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지금은 옆으로 조금 돌아가면 그뿐 아니오? 자자, 지금이라도 돌아갑시다. 석가장에도 이미 말해 두었으니 가서 맛있는 밥이랑 따뜻한 잠자리를 받고……. 저기? 또 가네?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거요?”

장기린은 달리기 시작한 말을 뒤따라오는 오장방에게 외쳤다.

“그가 이미 내가 나온 것을 알았다면 지체할 시간은 없소. 그리고…….”

“그리고?”

“범이 개 떼를 피할 필요는 없지.”

오장방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우뚝 멈춰 선다.

장기린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해야 할 말이 한마디 더 있었다.

“개방. 후의에 감사하오.”

척-.

말 위에서 포권을 취해 예를 갖춘 뒤, 오장방이 예를 받기도 전에 돌아선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사이에 장기린은 오장방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개방. 도와주려는 마음은 알겠으나 나는 왕진 한 사람만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다. 모든 것을 잃어 가는 그 느낌을……. 왕진도 느끼게 해 줘야지.’

장기린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박차를 가했다.

“이럇!”

히히힝-.

준마의 긴 울음소리와 함께 장기린은 한 줄기 선이 되어 천진으로 향하는 장강의 물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는 한 시진 뒤, 미리 진을 치고 있던 흑시군 백 명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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