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11화 (440/686)

13권 10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3)

장기린은 흑시군을 생각해 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상당히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처음에는 지극히 관료적인 발상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무림인들을 제압할 만한 특수한 무력이 필요하다는 단순한 생각.

협객에게 당한 탐관오리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고, 악적을 잡고 싶던 참된 관리가 의견을 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들은 명나라가 가진 좋은 요소들을 잘 버무려서 흑시군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체계화된 군문.

거대한 재력과 자원.

나라를 위한다는 사명감까지.

무림인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들을 특별하게 하는가?

사실 무림인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다.

아무리 소림사가 무림 강호의 태산북두라고 하나, 일만 금군이 진격하면 그깟 절을 태우지 못하겠는가.

꼭 소림사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육대 세가가 아무리 자기 지역에서 명성이 높다고 한들, 황실이 오명에 휩싸일 각오만 하면 모조리 사형시키는 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무림인도 사람이었다.

가족, 고향이 당한다면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황실은 그 이상을 원했다.

그들은 감히 무림인들이 싸움을 걸 생각도 못할 만한 무력을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흑시군.

황실의 영향권 아래 놓인 모든 문파에서 무공을 빼앗아 가르치고, 돈과 기술로 갖출 수 있는 무장을 모두 착용시킨 대 무림인 전용의 병사들 말이다.

무공은 성과가 나오기에 오래 걸리니 아직이지만, 돈과 기술로 무장한 흑시군은 이미 충분히 강했다.

‘활은 다 하나씩 갖고 있군. 방패는 상체를 다 가릴 만큼 크고. 거기에 검 하나, 도 하나. 아니면 검 하나에 손도끼 하나가 기본 무장인 건가.’

장기린은 마치 몸을 웅크린 맹수처럼 조용히 앉아 흑시군 백 명의 본대를 응시했다.

그들은 천진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에 아예 목책을 세우고, 관문을 하나 만든 상태였다.

지나다니던 행인들이 줄을 서서 검문을 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흑시군들은 행인들의 호패를 확인하고, 무공을 익혔는지 여부를 확인한 뒤에야 통과시켜 주었다.

‘허리에 찬 주머니들은 암기겠지. 이 인 일조로 함께가 아니면 움직이질 않아. 재밌군. 오랜만에 그걸 해야겠어.’

장기린은 조용히 기척을 감춘 채 풀숲으로 들어갔다. 평평하고 햇살이 잘 드는 바위를 찾아 그 위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았다.

***

꽈아앙!

해가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가는 저녁이었다.

불그스름한 노을 속에서 하루의 마무리를 준비하던 흑시군들은 천지를 박살 내듯 터져 나온 굉음에 놀라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모든 것은 평소에 훈련한 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정해진 자리에, 정해진 물건을 들고 뛰어갔다.

“적습! 적습이다!”

누군가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뭔가가 쳐들어왔다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끼기기기긱-.

꾸우웅-.

목책이 넘어가고 있었다.

사람 키만 한 통나무를 단단히 묶고 있던 새끼줄이 터져 나가고, 균형을 잃은 통나무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땅이 울리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온 사방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무슨 일이냐!”

“대형! 대형을 갖춰라! 싸움을 대비해라!”

흑시군 백인장 역할을 맡고 있는 권도형 조장이 망루를 향해 고함을 질러 댔다.

“적은 누구야! 산적 떼라도 몰려온 것 아닌가!”

“적은 단 한 기!”

망루도 당황한 듯 목소리가 흔들렸다.

“뭐?”

“기병! 한 기! 목책에 다가왔…… 으악!”

꽈아앙-!

굉음이 한 번 더 들리고, 목책과 이어져 있던 망루가 결국 옆으로 쓰러지며 박살 나 버렸다.

그 안에 있던 흑시군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은 알 방법이 없었다.

“제길!”

권도형 조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목에 차고 있던 호각을 불었다.

삐이이익-.

“싸움을 준비해라! 화살을 장전해!”

그들은 이미 강력한 적이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급작스러웠다.

미리 훈련한 대로 백 명 중 서른 명이 화살을 장전했다.

또 다른 서른 명은 검과 도끼를 뽑아 들었고, 나머지 마흔 명은 방패를 들고 전면에서 방어를 굳혔다.

“이쪽이……!”

선두에 있던 한 병사가 끝까지 외치지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꽈앙!

“끄억!”

무쇠로 만들어진 방패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면서 병사의 몸도 반으로 접혔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병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숨을 꺽꺽거렸다.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 사이로, 커다란 장창을 들고 있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가 옆으로 사라졌다.

“쏴라!”

피슈슈슈슉-.

일제히 날아간 서른 개의 화살이 흉수가 있을 만한 공간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몸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도, 그렇다고 방패나 창으로 화살을 쳐 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하다.

흑시군의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새벽녘에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불안감과 공포가 흑시군들의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대형을 갖춰라!”

콰앙!

굉음이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이번엔 좌측이다.

“으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흑시군 한 명이 또다시 우그러진 방패를 든 채 뒤로 튕겨져서 바닥을 굴렀다.

“저쪽이다!”

이번엔 미리 준비하고 있던 흑시군들은 제때 반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인 이조로 움직였다. 도합 네 명의 사람이 방패를 앞세운 채 검과 도끼를 들고 좌우로 치고 들어 갔다.

상대를 세 방향에서 압박하는 것은 포위의 기본일 터.

그런데 들어갔던 네 사람은 거의 동시에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져 나왔다.

창이 여러 개로 늘어나기라도 한 것일까.

박살 난 갑주의 파편과 우그러진 방패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런 일이……!”

방패를 들고 있던 자는 손이 부러졌고, 검을 휘두르던 자는 다리가 부러졌다.

권도형 조장은 말을 잃었다.

그는 처음 만들어지던 때부터 지금까지 흑시군에 속해 있었다.

아미파, 화산파, 청성파.

어느 곳을 상대하든 항상 흑시군이 먼저 공격했지 이렇게 습격당한 적은 없었다.

벌써 여섯이 쓰러진 상황이었다.

매화신검을 상대로도 이렇게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남은 건 아흔넷.

이 인원이 다 쓰러지기 전에 상대방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경고하겠다.”

피슈슉-.

낮고 울림이 큰 소리가 흑시군 모두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날아간 화살은 창에 얻어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점점 가라앉아 가는 흙먼지 사이로 장창을 든 한 명의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부터 내 앞을 막는 자는, 죽이겠다.”

툭.

한 걸음.

사내의 한 걸음에 흑시군 전원이 움찔 몸을 떨었다.

대열을 갖추고 있는 흑시군들이 모두 권도형 조장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힐끔거리는 시선과 간절한 눈빛이 그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무쌍귀……! 이, 무슨 오만한……!”

이 한적한 곳에 왜 목책을 설치했던가.

그들은 상대가 누군지 이미 알고 왔다.

애초에 무쌍귀를 붙잡기 위해 파견된, 흑시군의 정예들이라는 소리다.

권도형의 고민은 짧았다.

그는 품 안에서 폭연을 위로 쏘아 올리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잡아! 계획대로 시행하라!”

쿵. 쿵.

“우오오오-!”

방패로 갑주를 두드리며 전의를 북돋은 흑시군들이 대열을 가다듬고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검과 도끼가 햇빛을 받아 번뜩인다.

그 앞에 선 사내.

장기린은 그 모습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가.”

푸확-!

“……!”

핏줄기가 터져 나가 사방을 적셨다.

가장 앞에 서 있던 흑시군은 자신의 방패가 쪼개지고,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듯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이런 상대가 있었던가.

철로 만들어진 방패를 종잇장처럼 뚫어 버리다니.

그야말로 군신이 따로 없다.

“우아아악!”

곁에 있던 흑시군들이 발작하듯 방패를 더욱 위로 들어 올렸다.

쩌엉!

지나가던 마차에 치인 것처럼 흑시군들은 사방팔방으로 튕겨 나갔다.

일격일살도 아니다.

장기린이 창을 휘두를 때마다 흑시군은 서너 명씩 한꺼번에 튕겨져 나갔다.

던져진 사람 중에는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육편이 튀고 갑주가 박살 나 허공에서 흩어졌다.

“이…… 무슨……!”

권도형의 눈빛이 풍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렸다.

막강한 존재감이 피 보라와 함께 뿜어지고 있었다. 그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혀 온다.

붉은색 핏물.

살기에 휩싸인 무시무시한 기파.

“붉은…… 악귀……!”

콰앙!

순식간에 십여 명의 방패병을 박살 낸 장기린은 갑자기 창을 거두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다가온 준마를 타고 등을 보인 채 물러났다.

“어……?”

등이 훤히 보이는데도 감히 공격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끝난 건가……?”

옆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이 권도형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아냐, 도망가는 게 아니다!’

삼십 보가량 거리를 벌린 장기린은 말머리를 돌려 다시 흑시군을 바라봤다.

“기병을 상대해 본 적이 없나 보군.”

장기린이 나직하게 중얼거린 말이 모두의 귓속으로 파고든다.

히히힝-.

울부짖는 준마 위에서, 장기린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

권도형은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온다! 화살을 쏴! 방패를 들어! 검으로 말을 찔……!”

꽈아아아앙-!

순식간에 한 줄기 선이 되어 장기린은 돌진했다.

방패와 사람‘이었던’ 편린들이 머리 위로 치솟았다.

“으아아아!”

흑시군들을 돌멩이처럼 쳐 내며 한 사람이 나타난다.

그가 든 흑색의 장창이 붉은색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찌르기 위주로 공격하던 그가, 창날을 높이 세우더니 수직으로 내리쳤다.

푸확!

내리꽂힌 일격에 사람이 방패와 갑주채로 두 동강 났다.

창대를 한 바퀴 돌리자 핏물이 흩날린다.

옆으로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머리가 분리되며 핏물이 치솟았다.

터엉!

히히힝-.

울부짖는 말 한 마리와 함께 쳐들어온 기마병 한 기가 백 명의 병사들을 휘젓는 셈이다.

그야말로 상산 조자룡.

관운장이 되살아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귀신……!”

“괴물이다. 인간이 아니야……!”

천하에 명성을 떨치던 흑시군들이 전의를 잃고 주춤주춤 물러난다.

그의 주변에 쌓인 시체는 벌써 수십에 달했다.

후욱-.

뜨거운 숨을 내뿜는 그의 존재감은 이미 사위를 짓누르고 있었다.

수십 명의 정예 흑시군이 그 한 명의 숨소리에도 경기를 일으키듯 반응했다.

고개를 돌리면 몸을 움츠렸고, 창을 들면 숨이 멎었다.

그가 전진하는 대로 길이 생긴다.

막는 것 따위는 무의미했다.

뻐억!

“컥.”

흑시군들은 그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단말마의 비명만 남긴 채 목숨이 스러졌다.

“흐, 흩어져! 거리를 벌려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권도형의 지시는 올바른 것이었으나, 지금 시점에서는 안 좋은 판단이었다.

안 그래도 사신(死神)의 위용에 질려 있던 흑시군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 정신없이 물러났다.

한순간에 공동이 생기면서 앞길이 뻥 뚫린 셈이다.

촤아악-!

“끄아악!”

물러나는 과정에서 다섯 명이 죽었다.

등이 베이고, 몸통이 반으로 찢겼다.

등 뒤의 상처.

도망치다 당했으니 수치스러운 죽음이다.

으득-.

권도형은 이를 악물고 등 뒤에서 꺼낸 철 투망을 집어 던졌다.

촤악-!

단 한 번의 참격으로 허공에서 철 투망이 두 조각난다.

권도형은 핏대를 세우며 절규했다.

“모조리 던져!”

남아 있는 절반의 흑시군이 훈련받은 대로 보유하고 있던 암기들을 모조리 집어 던졌다.

휘리리릭-.

수십 개의 철 투망들이 겹치고 엉키면서 장기린의 시야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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