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11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4)
“투망이라.”
장기린은 양손으로 창을 붙잡았다.
검푸른 빛깔의 대도(大刀)형 장창.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장(名匠) 풍 도공(刀工)이 이 이상의 병기는 없다며 스스로 극찬했던 물건이 바로 진청룡이다.
창날의 끝에 강렬한 기운이 맺혀 이글거렸다.
마치 팔의 연장선인 듯 창끝까지 자연스레 전달된 막강한 내력이 선명하게 유형화되어 있었다.
‘일연적룡무.’
살짝 뒤로 당겼던 창이 정면을 겨누었다.
호흡을 길게 내쉰다.
잔잔했던 호수에 파문이 일 듯, 고요했던 창끝이 여러 개로 늘어났다.
‘제이식.’
수십 개로 늘어난 창이 사방을 잠식했다.
천천히.
거대한 학이 날개를 펼치듯.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었다.
융단처럼 머리 위를 뒤덮은 철 투망과 장기린의 창끝이 만났다.
퍼퍼퍼퍼퍼펑!
폭죽을 터뜨리듯 쉴 새 없이 폭음이 터져 나오고, 튼튼했던 철 투망이 폭발하여 그 잔해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창끝에 극도로 집중된 내력은 강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창에 꿰뚫린 부분에서 짙은 노을빛이 아스라이 비쳐 들었다.
허공에서 알알이 부서져 터져 나가는 철 투망들.
후두두둑-.
사방으로 튕겨진 철 조각들이 흑시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흑시군이 던진 것은 철 투망만이 아니었다.
함께 던진 가죽 주머니도 터졌다. 무림인에게는 극약이나 다름없는 산공독이 머리 위를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흠.”
보통 무인이라면 죽음의 위협을 느껴야 할 상황이었으나, 장기린은 작은 탄성만 내뱉을 뿐이다.
우우웅-.
그는 머리 위에서 창을 회전시켰다.
크게 휘돈 창끝이 회전력을 살려 허공의 한 점을 쿡- 찌른다.
후와아아악-.
가벼운 첨격(尖擊).
창끝에서 공기가 터져 나가고, 폭풍 같은 바람은 그다음에 뒤따라왔다.
보이지 않는 용 한 마리가 장기린의 창끝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눈처럼 내려오던 산공독 가루가 창의 움직임을 따라 한쪽 방향으로 급격히 쏠렸다.
고오오오-.
“뭐, 뭐야!”
“이리로 날아온다!”
흑시군들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제방에 뚫린 구멍으로 강물이 쏠리는 것과 같다.
장기린의 좌측에 있던 흑시군 들은 본인들이 던진 산공독을 되레 뒤집어쓰고 말았다.
“쿨럭쿨럭!”
“커헉!”
그들은 기침을 토해 내며 다급하게 눈, 코, 입을 닦아 냈다.
“숨을 멈춰!”
“해독단을 복용해라!”
독을 쓰는 자는 반드시 해독제도 함께 준비하는 법.
흑시군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단약을 재빨리 입안에 털어 넣고 다시 무기를 붙잡았다.
방패를 들고, 무기를 겨눈다.
대열도 그리 흐트러지지 않았다.
잘 훈련된 병사들답게 그들의 반응은 빨랐다.
다만 붉은 악귀의 속도가 그들의 반응보다 빨랐을 뿐이다.
“흡?”
가장 앞에 방패를 들고 있던 흑시군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훅- 끼쳐든다.
히히힝-.
앞발을 들어 올린 준마.
사람의 키보다 높은 곳에서, 거대한 장창이 강기를 품고 아래로 떨어졌다.
“막앗!”
“늦……!”
쩌어엉-!
콰직!
푸화악-!
박살 난 방패와 육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매화신검을 겪어 보았던가?
장기린은 그와는 다르다.
그의 창술에는 자제가 없었다.
모든 것이 전장의 움직임이며, 일절 자비가 없는 살육의 예술이었다.
강렬하게 몰아치는 무력(武力)의 파도 앞에서 흑시군들은 모래알처럼 나약하게 부서져서 쓸려 나갔다.
퍼엉!
콰지직!
푸확!
땅바닥이 질퍽하게 피로 젖어 간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파괴와 죽음만이 남을 뿐이다.
핏-.
희뿌연 살덩이 하나가 날아와 권도형 조장의 어깨 갑주에 철썩 달라붙었다.
그는 멍하니 손으로 집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흐어!”
사람의 귀.
너덜너덜한 살점에는 사람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었다.
비릿한 피 내음이 콧속을 마비시킨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다.
“사람이 아니다……! 악귀다! 악귀야!”
권도형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무쌍귀는 기껏해야 매화신검 정도의 능력이 아니었던가?
무림 십대고수보다 더 강하더라도, 흑시군 수십 명이 둘러싸면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냔 말이다.
어찌하여 이런 꼴이 되었나.
그들이 여유롭게 시간을 끌고 있으면, 금장과 지원군들이 와서 끝장을 내는 계획이었을 텐데.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인가.
우우웅-.
“흐윽?”
권도형 조장은 그 순간, 천천히 다시 뒤를 돌아보는 장기린과 두 눈이 마주쳤다.
“주, 죽는다……. 저게 사람인가……?”
등골이 오싹-했다.
산에서 범을 마주치면 며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 했던가.
지금 그가 느낀 것도 그런 공포였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었다.
그 순간, 대지를 떨쳐 울리는 나팔 소리가 착란을 일으키던 권도형을 제정신으로 되돌렸다.
뿌우우우우------.
“……!”
권도형의 두 눈에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왔다……! 왔어……!”
그는 어찌나 기뻤던지 양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불렀다.
다른 흑시군들도 마찬가지다.
앞날이 칙칙하게 흐려져 있었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만난 듯 두 손 높여 환호했다.
“지원군이다!”
“금장이 왔다아!”
히히힝-.
장기린의 기마가 멈춰 섰다.
충격에 빠져 몸을 움츠리던 흑시군들의 눈에서 희망과 전의가 다시 불꽃처럼 타올랐다.
우오오오-!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군(軍)의 사기란 참으로 신기하다.
승리의 상징이 있다면 당장 죽음을 앞에 두고 있어도 용기가 치솟고 희생할 각오가 생기는 것이다.
“워워.”
장기린은 잔뜩 흥분한 준마의 목덜미를 토닥거리며 냉철하게 ‘지원군’을 바라봤다.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북쪽의 관도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어디선가 화사한 빛 무리가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다.
‘태양’이 뜬 것처럼.
어스름한 노을빛을 화려하게 반사하는 황금빛 갑주는 십 리 밖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갑주뿐인가?
그는 금의위들이 입을 법한 황금색 장포를 걸치고, 그 위에 황금 갑주를 입었다. 머리에는 일각수(一角獸)처럼 뿔이 달린 투구까지 썼다.
당연하게도, 그 투구도 황금색이었다.
“저거 하나면 항주에 객잔을 살 수 있겠군.”
장기린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끌어 올렸던 살기가 풀려 버릴 만큼 황당한 광경이다.
금장이라 불린 이는 심지어 타고 있는 말까지 백마였다.
말의 고삐와 안장도 황금색이다. 설마 재질까지 금일까 싶긴 했지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푸르륵-.
장기린은 준마에 올라탄 채 금장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힘껏 말을 달리면 일각이면 닿을 거리였다.
다그닥- 다그닥-.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가 갑자기 그친다.
금장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장기린은 알 수 있었다.
멀리 떨어진 거리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금장과 그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금장이 손을 들어 올리자, 주변에 따라오던 금의위와 흑시군의 혼성부대 일백 명이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어……? 어디 가……?”
당황하는 목소리는 장기린과 한창 싸우던 흑시군의 간부로부터 나왔다.
금장은 말머리를 돌려 등을 보였다.
그러고는 속도를 내더니 그대로 달려서 멀어졌다.
“흐음.”
장기린은 가만히 그들이 퇴각하는 움직임을 살폈다.
금장을 뒤따라가기 위해 일제히 몸을 돌리는 병사들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도 없고, 허둥지둥 뒤쫓는 자도 없다.
일정한 속도로 일정하게 방향을 전환했다. 잘 훈련된 병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의외라면 의외였다.
싸우지 않고 도망치다니.
마치 쫓아와 달라는 듯 그저 묵묵히 등을 돌리고 멀어지다니.
“영리하군.”
그는 묵묵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과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들어라.”
장기린은 입을 열어 큰 소리를 냈다.
군의 사기라는 것은 쉽게 오르는 만큼, 절망을 만났을 때 쉽게 무너지는 것 아니던가.
그는 살기 가득한 기파를 은은하게 뿜어내며, 다시 현재의 적인 흑시군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는 버려졌다.”
“……!”
병사들은 아연한 표정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권도형 조장 또한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더 싸울 건가? 이 이상은 무의미한 죽음일 것이다. 패배를 받아들여라. 그럼…… 살려 주겠다.”
장기린은 창끝을 늘어뜨렸다.
창날이 머금고 있던 핏물이 방울져 떨어져 바닥에 긴 선을 그렸다.
“개소리.”
피슉-.
채앵!
장기린은 날아드는 화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가볍게 쳐 냈다.
권도형 조장의 손에 들린 활이 시위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우릴 우습게 보지 마라! 우린 대명제국의 대(對) 무림 부대. 흑시군이다!”
광기인가. 절망인가.
발작하듯 소리친 그는 갖고 있던 화살을 연속으로 모조리 쏴 버린 뒤, 직접 검과 방패를 들고 장기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아아아!”
“조장을 따라라!”
“악귀를 죽여라!”
주변에 남아 있던 흑시군들도 용기를 얻어 제각각 방패와 무기를 들고 장기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에는 강물.
정면에는 수십 명의 흑시군.
장기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그는 마음을 차갑게 굳히고, 자세를 낮추며 말에게 박차를 가했다.
히히힝-.
긴 울음소리와 함께 말이 달려 나간다.
푸화아아악-!
검붉은 핏물이 관도를 뜨겁게 적셨다.
***
“매복은?”
“준비되었습니다.”
“조금씩 멀리서 화살만 쏘라고 분명히 지시했죠?”
“절대로 맞서 싸우지 말라고 해 두었습니다.”
“폭약은 어찌됐습니까?”
“신호만 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황금 갑주를 입은 사내.
금빛 장수라고 불리며 흑시군 모두의 경외를 받는 자.
유준은 가만히 정면만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들을 버리고 온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사실 그렇습니다.”
유준의 부관.
등종무는 군문에서 경험이 많은 사내였다.
수많은 흑시군들의 기초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이었고, 한때는 그 악명 높다던 사흉 중 도올의 곁에서 사람 관리를 돕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흑시군은……. 만들어진 지 아직 십 년도 안 된 조직입니다. 그런 조직일수록 구성원들끼리는 끈끈해야 합니다. 위기의 상황에 동료를 버린다면……. 누가 싸우고 싶어 하겠습니까?”
등종무는 유준을 두려워했으나, 그럼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유준은 말 위에서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등종무가 답답하고 초조해서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갈 때쯤, 유준은 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등 부관, 아까 거기서 우리가 가면 이겼을 거라 생각하죠?”
“……우리에겐 금장이 있습니다. 제가 무공 고수는 아니지만, 금장께서는 팔파일방의 장문인과도 겨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손실을 줄이기 위한 금장의 계책은 이해를 하나…….”
“고맙습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유준은 평온한 목소리로 충격적인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저 사람은 팔파일방 장문인 따위와 비교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