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12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5)
“예? 팔파일방 장문인 따위라고요?”
등종무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팔파일방의 장문인이 어떤 자들인가?
각자의 무력만 해도 십대고수보다 낮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영향력은 강호 무림에서 손꼽히게 강한 무공을 익힌 장로들과 장문인 휘하의 수백에 달하는 문도들만으로도 증명된다.
흑시군들 중에는 그들을 가볍게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무림인들 따위는 이미 잊혀져 가는 구시대의 산물이라면서 퇴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 봤자 산공독과 갑주. 그리고 온갖 암기들로 무장한 흑시군의 전술 앞에서는 그저 일반인보다 무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아미, 청성, 화산 등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데리고 있던 대문파들을 잔혹할 정도로 몰살시킨 게 흑시군이니 말이다.
“대문파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팔 할이 황실의 이름값과 사흉이라는 고수들 덕분이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산공독을 써도 각 문파의 장문인들을 쓰러뜨리긴 어려웠을 겁니다. 금장께서 그들의 진짜 힘을 모를 리는 없고…….”
등종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유준은 그가 고민하는 사이 자신이 느꼈던 기린의 그 무시무시한 기(氣)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역시 엄청나. 똑같은 집혼기가 아니었던가? 어떻게 그리 강할 수가 있는 거지?’
하늘 위에 있던 태양이 사바세계로 내려온 듯했다.
본래 거대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주변의 모든 것을 용광로처럼 삼키는 법이다.
장기린의 기세가 그랬다.
넘실넘실 피어오른 살기와 강맹한 기파가 산 너머까지 전해져 왔다.
유준은 무산학관에서 장기린과 마주쳐 본 적이 있기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가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무공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능력에 한해서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 말이다.
유준은 자신의 손등을 만져 보았다.
오톨도톨하게 닭살이 돋은 게 만져졌다.
먼 거리를 격하고 서로가 서로를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등골이 오싹하면서 소름이 돋았다.
“역시 소호의 아버지인가…….”
본래 무인이라면, 자신이 마주치는 사람과 승부를 가늠해 보는 법이다.
유준은 장기린과 자신의 싸움을 예상해 보았고, 결론은 순식간에 내려졌다.
이길 수 없다.
열 번을 싸우면 열 번을 진다.
만나면 죽어야 하는 존재.
그야말로 사신(死神)이다.
“혼자라면 말이지만…….”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준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등종무는 계속해서 유준의 눈치를 살폈다. 퇴각을 하고 있음에도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질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장군.”
등종무는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그렇다면 매복도 철수하고 퇴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장께서 그 정도로 말씀하시는 자가 상대라면……. 싸워서는 안 됩니다. 함정을 깔고 매복을 해도 몰살당할 것입니다.”
등종무는 더 이상 관문에 남기고 온 흑시군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그는 실리주의자였다.
그 점에서 유준과 잘 맞는 사람이다.
그는 철저하게 앞으로 일어날 손실만 따졌다.
“권도형 조장이라고 했죠?”
“예. 관문을 맡고 있던 백인조장입니다. 무공이 대단하진 않아도 맡은 바 임무는 충실히 수행하는 친구입니다.”
“아까 보니 오십 명 정도 남은 것 같던데. 그가 아까 그 상황에서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을까요? 일각? 반 시진?”
“……금장보다 더 강한 자가 상대라면, 반시진이면 잘 버틴 것이겠지요.”
“그래요?”
유준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그들이 향하던 방향에서 말을 탄 병사 한 명이 전력을 다해 다가오고 있었다.
“급보! 급보입니다!”
말에서 거의 구르듯이 내려온 병사가 유준의 앞에 부복한 채 품고 있던 죽간을 양손으로 건넸다.
“이건?”
“태감께서 보내셨습니다. 금장께 시급히 전달하라고…….”
“흐음.”
유준은 죽간에 새겨진 글자들을 손끝의 감각으로 읽었다.
서찰이 아니라 죽간을 쓰는 것은 맹인인 유준에 대한 배려였다.
죽간의 마지막 글자까지 모두 읽어 본 후, 유준은 소리 내어 웃었다.
“준비가 되었군요. 역시 대인이십니다.”
유준은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속도를 높입니다. 등 부관, 이건 속도의 싸움입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시간을 끌 수 있도록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라고 전하세요.”
“……예.”
등종무는 잠시 고민했으나, 한번 마음을 정한 뒤에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흑시군 중 다섯 명이나 불러서 전령으로 보냈다.
각각에게 서찰을 따로 들려주면서 상세하게 당부를 전하기도 했다.
“절대로 교전하지 마라. 가까이 다가갈 일도 만들지 말고, 견제하고 도주하는 것을 반복해서 발목을 잡는 게 우선이다. ……이리 가까이들 와 봐. 활도 안심할 수 없다. 최소한으로 공격해. 안 되면 모습만 살짝 보여 주고 빠지라고 해라. 명심해. 절대로. 교전하지 마라.”
유준의 지시와는 살짝 다른 내용이었지만, 유준은 못 들은 척해 주었다.
세부 지시야 어찌되든 괜찮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줘서 적절한 ‘때’만 맞출 수 있다면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다.
“후우…….”
그보다 유준이 우선시해야 하는 건 앞으로 벌어질 큰 싸움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유준은 도도하게 걸음을 옮기는 준마 위에서 묵묵히 눈을 감은 뒤, 허리춤의 검을 살포시 움켜쥐었다.
아즉검(我卽劍).
검즉아(劍卽我).
내가 검이 되고, 검이 내가 되면 베지 못할 것이 없을지니.
유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내부로 침잠되어 한 자루의 검으로 변해 갔다.
***
쒜엑-.
장기린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젖혀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날카로운 화살촉과 화살대, 화살 깃까지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진 화살이었다.
그는 진청룡을 역수로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화살이 쏘아진 각도, 활시위가 튕겨지면서 난 공기의 울림으로 암습을 가한 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즉시 알 수 있었다.
장기린은 고삐를 살짝 잡아당겼다.
히히힝-.
말이 앞발을 들었다가 내리는 순간, 그는 크게 어깨를 회전시키면서 번개처럼 창을 앞으로 내던졌다.
꽈앙!
이십 장(丈) 거리.
산등성이에서 자라고 있던 커다란 노송이 거세게 흔들렸다.
장기린은 묵묵히 말머리를 돌려 자신이 창을 던진 방향으로 나아갔다.
노송을 향해 가까워질수록 그 앞에서 날개가 뜯긴 잠자리처럼 버둥거리고 있는 흑시군 병사가 선명하게 보였다.
“크윽.”
병사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장기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입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진청룡의 창날은 병사의 복부를 관통한 뒤, 등 뒤의 노송에 말뚝처럼 단단히 박혀 있었다.
병사가 부들부들 떨면서 창대를 붙잡았지만, 진청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화살을 쐈으면서, 죽을 각오는 안 했었나?”
흑시군의 병사는 답하지 않았다. 고통에 몸을 떨며 거칠게 숨만 씨근거릴 뿐이었다.
저주하듯 노려보다가, 발작하듯 산공독이 든 가죽 주머니를 던졌는데 장기린까지 닿지도 못했다.
툭.
장기린은 바닥을 나뒹구는 가죽 주머니를 힐끗 본 뒤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우웅-.
“……!”
진청룡이 떨렸다.
병사가 기를 쓰며 빼려 해도 안 빠지던 창날이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커헉.”
그나마 상처를 막고 있던 창날이 빠지자 급격히 뿜어진 피가 바닥을 선혈로 적셨다.
순식간에 안색이 하얗게 질린 병사가 무릎을 꿇는다.
우우웅-.
허공섭물의 한 수로 떠오른 진청룡은 기묘한 울림을 토해 냈다.
장기린은 창을 오른손으로 붙잡은 뒤, 바닥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노송 쪽으로 쳐서 날렸다.
툭.
파바바밧-.
돌멩이가 병사의 앞을 툭- 하고 건드리는 순간, 바닥에 숨겨져 있던 쇠 그물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모르고 다가갔다면 쇠 그물에 붙잡혀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크륵……!”
병사는 원통하다는 듯이 피거품을 토해 낸 뒤, 앞으로 꼬꾸라졌다.
장기린의 예민한 감각은 그 순간 먼 곳에서 다섯 개의 기척이 동시에 멀어지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원래부터 도주를 염두에 두고 지켜보고 있다가 일이 잘못되자마자 흩어져서 도주하는 것이다.
“보고 있었군.”
장기린은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려 다시 원래의 경로로 돌아왔다.
쓰러진 병사는 쳐다보지 않았다.
이미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다.
적을 동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는 걸, 그는 전쟁터에서의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디 한번 준비해 봐라. 그게 무엇이든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마.’
장기린의 분노는 백탄(白炭)과 같다.
얼핏 봐선 다 타고 남은 재인지, 숯인지 구분이 안 가지만 한번 불이 붙으면 그 어떤 숯보다 거센 화력을 내뿜는 상질의 숯이다.
그는 묵묵히 말을 달렸다.
또다시 화살을 쏘는 어리석은 병사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는 금장이 남기고 간 흔적을 쫓아 말을 달렸다.
***
흑시군은 하동부(河同府) 인근에 성채를 세우고, 독자적인 세력을 기르는 중이었다.
동창이 판단하기에 흑시군은 내부에서 세 가지 무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도철이 흑시군을 이끌고 강호 무림을 정벌할 때부터 함께했던 흑시군의 정예들로, 온갖 싸움을 경험한 이들은 갑(甲)군이라고 불렸다.
두 번째는 강호 무림 정벌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명문 무파에서 빼앗은 높은 수준의 무공을 오랜 기간 익혀서 최근 들어 흑시군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한 을(乙)군이다.
세 번째는 가장 최근에 흑시군에 들어온 젊은 층이다. 그들은 이미 흑시군의 명성이 오를 대로 올라 있을 때 들어와서 좋은 무공을 제한 없이 익히고는 있지만, 아직 시간이 부족해 경험이 없는 이들로 내부에선 병(丙)군이라고 불렸다.
갑, 을, 병.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흑시군의 성채 중에 병군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하동부 인근의 성채였다.
갑군 이십 명.
을군 오십 명.
병군 이백 명.
거기에 병군이 되길 희망하는 어린 청년들 백여 명까지 합하면 도합 사백 명 가까이 되는 꽤나 큰 규모의 무리가 된다.
그 사백 명이 모두 흑시군의 갑주를 입고, 병기를 착용하며, 산공독과 각종 암기를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니 대단히 위험한 무력 집단이었다.
인근의 관청이나 무림 문파들도 흑시군의 성채에는 아무런 간섭도 감히 하지 못했다.
그들이야말로 지금 천하가 왕진 태감의 천하라는 걸 증명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서둘러라! 금장께서 오신다!”
하동부 성채를 지휘하는 두용갑은 완강한 사내였다.
그는 흑시군 내부의 구분으로 따지자면 갑군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으나, 다른 이들과는 출신부터 달랐다.
나름 이름 있는 무가 출신에, 무과에 합격해 금의위까지 올라갔음에도 흑시군에 들어온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갑군, 을군, 병군, 거기에 새파란 병아리나 다름없는 청년들까지 모조리 동원해서 성채 앞에 진형을 갖추고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토담은? 다 쌓았나?”
“예!”
“화살은? 넉넉히 구비했고?”
“예!”
두용갑은 싸움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나서야 더 이상 주변에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갑주를 입고, 모든 병기를 착용한 그가 밖으로 나선 것은 노을이 완전히 지고 달이 높이 떠오르는 한밤중이었다.
“두 부장님! 금장께서 거의 도착셨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두용갑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다급하게 달려온 을군의 병사 하나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미 싸움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금장과 그분의 병사들이 쫓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