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13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6)
“뭐야?”
두용갑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계획은 여기에 도착한 뒤에 싸우는 거였잖아! 젠장, 적이 생각보다 빨랐나? 왜 벌써 쫓기고 있어?”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떡해? 우린 가만히 기다린다. 그건 준비 다 됐어?”
“예. 이미 준비 다 끝났습니다.”
“바로 쓸 테니 준비해 둬. 금장이랑 병사들이 도착하면……. 곧바로 길을 막고 싸움을 시작한다.”
“저기, 두 부장님…….”
“뭐야? 할 말 있음 해라.”
“그분은……?”
“……내버려 둬. 알아서 할 거야.”
두용갑의 말에 의문을 표하는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싸울 분위기를 조성했다.
물길에서 성채로 들어오는 입구는 좁지만, 그 안에 들어서면 한판 거하게 싸우기엔 충분한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두용갑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그곳 주변에 토담을 쌓아 높이를 올려 둔 상태였다.
호리병 같은 지형이었다.
아마 손자병법을 쓴 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이곳만큼은 공략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고 두용갑은 생각했다.
“입구만 통과하면 된다. 입구만.”
두용갑은 철탑처럼 서서 때를 기다렸다.
일단 입구만 통과해서 들어오면 안에 들어온 자는 화살로 꿰어 죽이든, 불로 태워 죽이든 반드시 죽일 수 있는 최적의 지형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두 부장님! 옵니다!”
두용갑은 멀리서 깜빡거리는 등불 신호를 확인한 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커다란 화로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냄새가 지독한 어유(魚油)는 시뻘건 불길을 피워 올리면서 활활 타들어 갔다.
그 앞에서 두용갑은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채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두두두두두-.
가장 먼저 분지로 들어온 것은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갑주를 입은 사내였다.
금장 유준.
그리고 유준의 곁에 두용갑과 똑같이 부장 직책을 맡고 있는 등종무가 말을 달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과 함께 출진했던 흑시군과 금의위 혼합 부대 이백여 명도 함께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뒤를 힐끔거리며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두가 다급한 얼굴로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멀리서 아련하게 비명이 들려온다.
두용갑은 장익덕처럼 눈을 부릅뜬 채 아직 손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적절한 챔질을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아군의 최후미를 살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확-!
우두둑!
속도가 늦어 뒤쳐진 서너 명이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제각각 사방으로 튕겨 나가면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닥에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피와 육편이 무서울 정도로 튀어 올랐다. 시야가 흐린 한밤중임에도 검붉은 피가 솟구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다.
“저놈이군!”
두용갑은 신음을 흘렸다.
도망치던 흑시군 서너 명을 일격에 날려 버린 자.
“한 명이었던가……!”
설마 했는데 단기필마.
홀로 수백을 이끄는 금장을 쫓기게 만드는 위용이라니.
두용갑은 감탄하면서도 공포를 느꼈다.
‘들어왔다!’
그는 일순간 토담 위의 병사들 쪽을 힐끔 쳐다본 후 힘차게 손을 아래로 내렸다.
피슈슈슉-!
꽈아앙!
날아간 것은 미리 토담 위에서 조준해 두었던, 끝을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들이다.
거대한 노(弩)를 만들고, 거기에 화살 대신 통나무를 장전한 셈이다.
본래대로라면 전쟁 중에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해야 마땅한 공성병기들이건만.
두용갑은 단기필마로 일군을 쫓아 버리는 그 괴물 같은 장수를 향해 아낌없이 모조리 쏟아부었다.
푸콰콰쾅!
흙바닥이 터져 나가고, 땅이 흔들리는 굉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우아아악!”
히히히힝-.
상처를 입었거나 죽을 뻔한 병사들이 제각각 비명을 질렀다.
말들도 흥분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숨을 씨근거렸다.
먼 거리를 격하고 쏘아진 통나무들은 포탄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땅이 뒤집어지고 돌이 박살 났다.
한낱 사람이 저기에 얻어맞으면 혈육을 비산하며 죽는 수밖에 없었다.
“아군도…… 저기에 있었습니다.”
두용갑의 곁에 있던 전령들 중 한 명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다.”
“저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저 괴물이라도 죽이고 함께 죽으면 명예로운 것이지.”
두용갑은 냉랭하게 답한 뒤, 이번에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전령들이 노란 깃발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토담 위에 정렬하고 있던 일백 명의 흑시군 병자 조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공성병기로 쏜 통나무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키가 십 장은 되는 거인이 땅바닥에 여러 개의 젓가락을 꽂아 둔 것과 같다.
땅속에 깊이 박힌 통나무들 옆에 몸이 박살 난 말과 병사들의 시신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죽어라. 제발 죽어라.’
두용갑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의 기원이 통한 것일까.
흙먼지가 다 가라앉았는데도 통나무들 너머에선 움직임이 없었다.
“두 부장. 고맙습니다. 역시 준비를 잘해 주었군요.”
“인사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장군.”
두용갑은 가까이 다가온 유준이 인사를 건네는데도 집중을 풀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괴물이 있던 곳에 집중했다.
“괜히 힘 빼지 마세요. 어차피 저 사람은 안 죽었습니다.”
“예?”
“저 정도에 죽을 거라면, 여기까지 쫓기지도 않았겠죠.”
유준은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두용갑에게 다가왔다.
철컹철컹.
유준의 허리춤에 매달린 황금 검이 흔들렸다.
두용갑은 유준이라는 사람 자체가 한 자루의 검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으음.”
강골인 그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을 정도다.
잔뜩 날이 서서,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뜨려도 칼날에서 잘려 나갈 것 같은 분위기.
유준은 잘 갈린 명검처럼 섬뜩한 예기를 자연스레 품고 있다.
“저것 봐요.”
유준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갑자기 거대한 기파가 폭발하듯 뿜어졌다.
“헙.”
두용갑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그 짧은 순간, 가장 정면에 박혀 있던 통나무 하나가 허공으로 번쩍 뽑혔다.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평범하다 못해 빈곤해 보이는 백창의를 입었으나, 비범한 철창을 한 손으로 든 사내다.
그는 창으로 통나무를 찍어서 그걸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후우우웅-.
“……!”
그리고 날아온다.
자그마하게 보이던 통나무가 처음에 그들이 공성용 노로 쐈던 것처럼 빠른 속도로 두용갑을 향해 날아왔다.
쒜에에에엑-!
순식간에 원래의 크기를 되찾더니, 이내 시야를 한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랗게 확대되어 보였다.
“하압!”
그때 앞으로 나선 것은 유준이다.
황금색 갑주가 번뜩인다.
유준은 왼쪽 발을 앞으로 쭉 뻗으며 몸을 낮췄다가, 튕기듯이 올라오며 검을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촤아아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날아온 통나무가 반으로 쪼개졌다.
날아오던 경로도 틀어져서, 반으로 쪼개진 통나무는 유준의 우측으로 비스듬히 날아가 거칠게 바닥을 뒹굴었다.
“과연.”
유준은 검을 한 번 아래쪽으로 털어낸 뒤, 검끝으로 정면을 겨누었다.
“두 부장.”
“예?”
“공격 안 합니까?”
두용갑은 멍하니 굳어 있었던 자신을 책망하며 서둘러 들고 있던 왼손을 내려쳤다.
신(神)들의 싸움처럼 압도적인 광경에 굳어 있던 것은 두용갑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전령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깃발을 흔들었다.
피슈슈슈슉-.
토담 위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흑시군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흑시군 내에서도 젊은 층인 병(丙)군들은 상승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다.
그들이 활을 쏘는 속도는 보통 궁수의 다섯 배에 달했다.
쏘고, 쏘고, 쏘고.
무공을 익힌 일백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자, 마치 오백 명의 궁사가 활을 쏘듯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창으로 통나무를 집어 던진 침입자.
장기린의 주변은 순식간에 떨어진 화살들로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
히히힝-.
말이 구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장기린을 슬프게 만들었다.
은자촌에서부터 이곳 하동부까지, 그를 태우고 질주해 준 준마의 여정은 여기까지였다.
이미 통나무가 날아왔을 때 앞다리가 부러진 상태였었다. 급격히 제동을 하면서 통나무에 몸을 부딪친 탓이다.
그런데 이제는 하늘을 새까맣게 덮을 정도로 날아온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울음을 터뜨렸을 뿐, 눈과 목덜미에도 화살이 잔뜩 박힌 말은 이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고마웠다.”
장기린은 진청룡의 창날로 말의 심장을 찔렀다.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보내 주는 것.
장기린이 지금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가 아니겠는가.
피슈슈슈슉-.
채챙!
머리 위를 새카맣게 덮을 지경인 화살 따위는 장기린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
날아오는 대부분의 화살들은 장기린이 허공섭물의 요령으로 방향을 비틀어 다른 곳에 꽂히도록 만들었다.
화살에 내공을 실은 일부의 화살들만 직접 창으로 쳐 내며 묵묵히 앞으로 전진했다.
“금장이라.”
장기린은 그가 걸어온 길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가 걸어온 장소만 화살이 꽂히지 않아 선명한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너였군. 유준.”
어느 순간 날아오던 화살이 뚝 그쳤다.
정면에 서 있는 황금 갑주를 입은 사내, 유준.
주변에 서 있던 금의위 일백 명과 흑시군 일백. 그리고 뒤쪽에서 전열을 갖추고 있는 이백 명가량의 흑시군도 제각각 무기를 든 채 장기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유준은 장기린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지 않기를 바랐는데요.”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황금 투구 아래에서, 유준은 웃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 둔 지형에서 싸우게 되어 기쁜 것인가?
아니면, 강적을 만나서 습관적으로 웃는 것인가?
장기린은 알 수가 없었다.
“너를 무산학관에서 처음 만났었지. 그때도 특이하다고는 생각했다. 그 나이에 그 정도 살기. 흔하지 않지.”
장기린은 유준을 적수로 보지 않았다.
유준은 약하지 않지만, 그래 봤자 소호보다 조금 강한 정도다.
천하를 논하는 경지에 오른 장기린의 눈에는 차지 않는다.
“길을 비켜라. 내 아들과 친분 있는 아이를 베고 싶지 않다.”
유준의 입가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분통을 터뜨린 건 유준의 주변이었다.
“감히!”
“지금 누가 누구에게……!”
각종 야유를 쏟아내려던 흑시군들에게 손을 들어 올려 진정시킨 것은 유준이었다.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켜 드리면? 어디로 가십니까?”
“황실.”
“……거기서 뭘 원하십니까?”
“왕진의 목.”
당당한 한마디에 모두가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