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15화 (444/686)

13권 14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7)

왕진의 목.

황제의 황사이자, 사례감의 태감을 죽이고 목을 가져가겠다니.

그 말 한마디로도 동창은 그를 즉결처분을 할 수 있다.

당장이라도 관청에 끌려가 옥에 갇힌다 해도 할 말이 없을 중죄가 아니던가.

“불경한!”

“쳐 죽일……!”

흥분해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조그맣게 들려왔다.

유준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직설적이십니다. 무모하시고요.”

“그런가?”

“예.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하나군요. 지나가지 못합니다. 그분의 목을 원한다니. 제가 있는 한 그분께 그런 일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스릉-.

유준은 검 끝으로 장기린의 목을 겨누었다.

장기린은 자연스럽게 양손을 늘어뜨린 채 유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웃는 모습이 낯이 익군. 예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웃는 거지?”

“예?”

“소호를 따라하나?”

“……!”

유준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얼굴이 굳어졌을 때, 장기린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분위기가 변했다.

유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전의가 깨진 항아리에서 새는 물처럼 줄줄 흘렀다.

“우습군.”

쿵.

장기린의 한 걸음이 주변 모두를 짓눌렀다.

“너, 이미 처음부터 죽이려고 마음을 정하고 있었으면서, 연기하지 마라.”

소인배의 마음 따위 이미 첫눈에 보자마자 알아챘던 장기린이다. 그는 진청룡으로 유준의 검끝을 후려쳤다.

따앙!

“……!”

장기린의 서늘한 눈빛이 유준을 압박했다.

“덤벼라. 신수(神獸).”

유준이 아니라 신수라 부른다.

더 이상 아들의 지인으로 대하지 않겠다는 장기린의 선전포고였다.

유준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

“후후…….”

스릉-.

빙글 돌아간 은빛 검신이 부드러운 반원을 그렸다.

채챙!

“죽일 겁니다. 당신.”

쩌어엉!

유준은 백귀검을 전개하는 듯 하다가, 장기린과 창을 한 번 맞대자마자 그 반탄력을 살려서 뒤로 훅- 물러섰다.

“공격해라! 태감을 위협한 자를 살려 둬선 안 된다!”

황실의 실세, 왕진 태감이 공인한 황실 최강의 검.

유준의 명령은 주변에 있던 수백 명의 병사들을 일제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잡아라! 돌아서 들어가!”

“철 투망!”

머리 위로 철 투망이 날아오고 사방에서 화살이 쏘아졌다.

장기린은 유준의 움직임만 시선으로 좇았다.

흑시군의 포위?

이미 겪어 본 일이다.

그는 진청룡을 앞으로 겨눈 뒤, 크게 발을 굴렀다.

쿠웅-!

“……!”

화아아아악-!

해일처럼 퍼져 나가는 기파.

잔뜩 응축했던 힘이 한순간에 터져 나가듯, 장기린의 주변으로 다가갔던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뒤로 튕겨져 나갔다.

머리 위로 날아오던 철 투망이 허공에서 덜컥 멈춘다.

상단전의 무학이다.

장기린이 그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을 뿐인데, 허공섭물의 힘으로 철 투망은 힘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숫자가, 의미가 있을 것 같나?”

우우웅-.

진청룡의 창날에 푸른색 강기가 선명하게 유형화되었다.

전장에서 붉은 악귀라 불리던 희대의 귀재(鬼才)가 무림 강호의 최고봉 검선의 지도까지 받았다.

삼산의 영지(靈地)에서 이십 년간 힘을 길러 온 그를 당할 자가 이 땅에 얼마나 될 것인가.

번뜩이는 눈빛.

장기린의 창이 정면 십 장 거리까지 일직선으로 관통했다.

콰아아아아---.

쩌엉!

방패가 부서지고 사람의 몸이 육편이 되어 날아올랐다.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그의 무력은 팔파일방의 고수들이 봐도 혀를 내두를 만큼 막강한 면모를 자랑했다.

앞을 막아서던 병사들을 무아지경으로 날려 버리면서 돌진한다.

베고, 부수고, 꿰뚫는다.

그는 옆에서 튀어나오는 사내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컥!”

기습을 가하려던 흑시군 병사 한 명의 목이 단단하게 붙잡혔다.

찔러 오던 검은 창대로 부숴 버렸다.

우득-.

“……!”

장기린은 손에 잡힌 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목뼈를 부순 후 바닥에 내동댕이칠 뿐이다.

스릉-.

그 순간 귓가에 들리는 섬뜩한 검명.

목이 부러진 사내의 그림자에서 은빛 검날이 치솟아 올랐다.

후우웅-.

“……!”

황금빛 갑주가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유준의 백귀검(百鬼劍)이다.

그것도 사람을 방패로 세워 놓고 그 틈을 파고들어 검을 찔러 오는 수법은 살수나 다름없다.

기이잉-.

만월귀살(彎月鬼殺)이 펼쳐지며 허공에 커다란 달무리가 생겨났다.

장기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비스듬히 돌려서 피했다.

서걱-.

“으아아악!”

반대쪽에서 장기린을 공격하려던 흑시군 한 명만 애꿎은 손목이 날아갔다.

피가 튀고 비명을 질렀다.

장기린은 짧은 순간, 유준이 만든 상처의 흔적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상처는 매끄러웠다.

놀라운 예기(銳氣)였다.

본인이 스스로 한 자루의 검이 된 듯 뿜어내는 검격들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파라락-.

유준은 공격이 실패한 걸 확인하자마자 사람들 사이로 다시 숨어 버렸다.

방패가 될 만한 사람은 많았다. 흑시군 수백 명이 장기린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고 있었다.

‘까다롭군.’

장기린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주변을 다 정리해야 제대로 싸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피는 이미 봤다.

남은 것은 결심뿐이다.

‘일연적룡무, 제이식.’

우우웅-.

장기린은 양손으로 창을 붙잡고 한 발을 뒤로 뺐다.

“방패를 들어! 모두 물러나라!”

흑시군의 부장, 두용갑의 외침은 적절했으나 장기린의 창이 더 빨랐다.

푸화아아악-!

수십 개의 창날이 파도가 밀려오듯 흑시군들을 휩쓸었다.

따다다당!

“크억!”

사내들의 방패가 날아가고, 갑주가 꿰뚫렸다.

일연적룡무 제일식보다는 약하지만, 수십 번의 창격을 날릴 수 있다는 것이 일연적룡무 제이식의 장점이다.

흑시군은 앞서 있던 사내들부터 차례로 끈 떨어진 인형처럼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목. 가슴. 복부.

치명적인 요혈을 공격당하니, 일격만 허용해도 순식간에 목숨이 끊겼다.

숨 몇 번 들이킬 만큼 짧은 시간 동안 흑시군이 열댓 명이나 죽었다.

“물러나라! 물러나라고!”

두용갑은 목에서 피가 흐르도록 소리치며 토담 위에 대기 중이던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노란색 깃발이 흔들리고, 장기린이 들어온 입구가 서서히 문이 닫히면서 가로막혔다.

노와 활도 장전되었다.

이미 필사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한쪽이 다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었다.

난전이 끝나면 토담 위에 장전된 온갖 암기들이 쏟아져 내릴 것이다.

그중에는 화공(火攻)도 있었고, 비장의 한 수도 있었다.

두용갑은 그 상황까지 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최후의 한 수는 준비되어 있었다.

채에엥-!

“흠.”

장기린은 상단에서 베어 오는 검을 창대로 막았다.

흑시군들은 도망치진 않았으나, 싸움에선 한발 물러섰다.

구름에 떠 있는 용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다가온 유준이 날카로운 검격을 숨 쉬듯이 쏟아냈다.

채채채챙!

쩌정!

몸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가볍고 날렵하며 유연했다.

장기린은 묵묵히 방어를 지속하다가, 정확한 시점에 창을 내찔렀다.

쩌어엉-!

“호오.”

장기린은 처음으로 흥미로움을 느꼈다.

‘거리감이 기가 막힌 건 여전하군.’

유준은 창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몸을 살짝 비틀어 갑주에 비껴 맞추고 있었다.

본래 완전히 피하는 것보다 몸에 살짝 맞추면서 공격을 흘리는 게 훨씬 쉬운 법이다.

상대하는 적이 자신보다 격상의 상대라면 더욱 그렇다.

반짝거리던 황금 갑주에 큰 흠이 생겼지만, 유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나, 둘, 셋.

공방을 이어 갈 때마다 유준의 반짝이는 황금 갑옷에는 숨길 수 없을 만큼 많은 흠집이 생겼다.

까가가강!

콰직!

“큭.”

가슴을 사선으로 가른 창격에, 그가 입고 있던 갑옷의 옆구리에 크게 금이 갔다.

유준은 이를 악물더니 검을 곧게 세웠다.

휘리리릭-.

장기린이 날카롭게 찔러 오는 검을 옆으로 피하자, 유준은 갑자기 몸을 낮췄다가 일어서면서 목을 노려온다.

챙!

채채채챙!

공방의 속도는 한계까지 빨라졌다.

장기린은 창대로 공격을 막았고, 유준은 날카로운 검기를 끊임없이 선보였다.

‘생각보다 강하군.’

극성에 이른 운룡대구식은 날카로운 검술을 완벽하게 거들고 있었으며, 상하좌우, 어느 곳으로나 검을 움직일 수 있으니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런 무인은 쉬이 찾기 힘들다.

똑같이 검을 사용하는 부운화가 유준과 겨루면 어땠을까.

장기린은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까드득-.

쾌검이 정신없이 쏟아지던 찰나의 순간, 장기린은 검의 손잡이에 창대를 얽으면서 강하게 진각을 내딛었다.

무게 중심을 강제한다.

위로 뛰어오르려던 유준의 몸이 강제로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큭?”

유준의 검술이 처음으로 흐름이 막혔다.

장기린과 유준의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이만한 검술을 지녔으면서, 수하들과 함께 싸우는 건가.”

“……!”

“넌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는 중이었군.”

무인의 마음가짐이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상대를 격살하고 말겠다는 군인의 마음이었다.

“그럼 나도 그렇게 하겠다.”

화아악-.

막강한 본신의 기파를 가감 없이 흩뿌리며, 장기린은 창대로 유준의 다리를 후려쳤다.

뻐억!

“큭?”

유준이 고통을 느끼면서 한쪽다리를 드는 순간, 장기린의 몸이 유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

왼쪽 다리를 유준의 양 다리 사이에 넣었다.

그는 짧게 끊어 치듯 몸을 강하게 회전시켰다.

후웅-.

콰득!

그의 왼발이 땅속을 파고들었다.

장기린의 왼쪽 어깨가 유준의 가슴 부분에 닿았다.

뻐어억!

강인한 기파가 가죽 북을 치듯 거세게 터져 나갔다.

“쿠억?”

유준의 황금 갑주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찌그러졌다.

뒤로 튕겨져 나가는 유준의 두 눈에, 머리 위에서 창을 한 바퀴 돌리는 장기린의 모습이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천천히 보였다.

고오오오-.

고조되는 살기.

그 끝에는 파멸만이 남아 있었다.

“받아라. 적룡창.”

장기린의 창이 거대한 원을 그려 냈다.

그는 유준만을 보고 있지 않았다.

주변을 포위한 자들.

유준과 그의 싸움을 넋을 놓고 보면서, 어떻게든 끼어들 틈을 찾는 들개들에게도 함께 공격을 날렸다.

후와아아앙!

그리고 수평의 일참(一斬)!

쩌어엉!

“큭?”

그나마 공격을 막은 것은 허공에서 뒤로 튕겨 나는 중이던 유준뿐이었다.

방패를 들고 있던 다른 흑시군들은 허리가 잘려 나가고 있었다.

“크악!”

“으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오고,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의 일각이 무너져 내렸다.

진청룡과 푸른색 강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공격을 가하는 족족 방패든 무기든 부서진다.

한차례 주변을 휩쓴 장기린이 다시 유준에게로 달려들었다.

유준은 막 땅에 착지를 한 찰나였다.

세 걸음.

장기린은 단 세 걸음 만에 유준을 무너뜨렸다.

유준이 휘두르는 검을 쳐 내고, 번개 같은 섬격으로 가슴을 꿰뚫었다.

쩌어엉!

한 번은 황금 갑주가 막아 주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아니다.

콰직!

“……!”

유준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굳어졌다.

갑주를 부수며 들어온 창날이 유준의 가슴을 관통했다.

“큭.”

안 그래도 햇빛을 못 받은 듯하던 유준이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유준은 양손으로 창대를 붙잡았다.

콰득.

장기린은 미련 없이 창을 더욱 깊숙이 박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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