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15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8)
“큽……!”
유준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정작 창을 찔러 넣은 장기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창을 자신의 수족처럼 쓸 수 있는 장기린이다. 방금 전의 감촉이 단순히 사람의 몸을 찔렀을 때와 다르다는 것쯤은 단번에 알아챘다.
음식을 씹었는데 그 안에 모래가 있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질긴 고기를 씹던 중이라도 그 안에 모래가 한 알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알아챌 수 있다.
껄끄러운 감촉.
유준이 양손으로 창을 잡았을 때, 방향을 미묘하게 비틀었기에 더욱 마음에 걸렸다. 창날 너머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감촉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륵…….”
피거품을 토해 내던 유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과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에서 징그러울 정도로 선명한 핏줄이 돋아났다.
“너…….”
장기린의 눈에는 보였다.
황금 갑주로 가려진 유준의 몸 안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꿈틀대고 있었다.
터엉!
콰지직!
장기린이 창을 다시 한 번 밀어 넣으려는 순간, 유준은 뒤로 몸을 튕기면서 태극의 묘리를 살려 몸을 비틀었다.
창이 빠져나왔다.
황금 갑옷이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훤하게 드러난 몸에서 은색의 세공품 조각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집혼기!’
장기린은 한눈에 알아봤다.
은자촌에서 소호가 갖고 있던 그 저주스러운 물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몸에 박았다? 그걸?’
장기린은 감탄했다.
목숨이 위험했던 짧은 순간.
목에 걸고 있던 집혼기를 잡아채서 날아오는 창날의 끝에 갖다 댄 것이다. 그 힘에 의해 집혼기가 유준의 몸에 박혔다.
“대단하군.”
유준은 쿨럭거리면서 피를 토했지만, 몸 안의 기운은 약해지긴커녕 점점 굴강해졌다.
장기린은 바닥에 떨어진 갑주의 조각을 응시했다.
겉으로 보기엔 황금 갑주지만, 안쪽에는 노란색 종이에 단사로 그려 놓은 부적들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봉인이 이제는 풀렸다.
완전히.
고오오오―.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유준은 핏줄과 힘줄이 잔뜩 돋아난 몸으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듯 아래로 내리쳤다.
후우웅―.
검끝이 닿지도 않았는데 땅바닥에 길게 흔적이 남았다.
콰직!
유준은 검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 너덜거리는 황금 갑주를 벗어 버렸다.
극도로 단련된 육신이 드러났다.
그리 크고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부위별로 근육이 세심하게 갈라져서 강인해 보이는 육체였다.
진청룡이 새겨 넣은 가슴의 긴 상처와, 그 속에서 짐승의 눈처럼 빛나는 호안석이 보인다.
투툭―.
유준은 검결지를 세워 자신의 가슴에 점혈을 가했다.
줄줄 흐르던 피가 멎으면서 천천히, 몸 상태가 점점 회복되었다.
쒜에에에엑―!
장기린은 곧바로 창을 내찔렀다.
노리는 곳은 머리.
그중에도 미간이다.
쩌어엉!
유준은 검을 휘둘러 다급하게 창을 쳐 내면서 옆으로 몸을 빼냈다.
그의 검은 떨렸지만 몸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역시, 직설적이야.”
햇살처럼 빙긋 웃는 얼굴에선 작위적인 이질감이 느껴졌다.
장기린은 내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 웃음, 보기 싫군.”
쩌어엉!
장기린이 내리친 참격을 유준은 검날을 비스듬히 세워서 바닥으로 흘려보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길게 갈라진 참격의 흔적이 비스듬하게 바닥에 새겨졌다.
파라라락―.
유준은 뒤로 뛰어서 훌쩍 물러나더니 갑자기 제자리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했다.
촤아아악―.
은광이 번뜩인다.
제자리에서 검을 비스듬히 올려 벤 것이다.
무려 이 장(丈) 가까이 떨어진 거리에서.
검의 사정거리와는 동떨어진 곳이었으나, 보이지 않는 참격이 장기린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
장기린은 황급히 창을 곧게 세워 막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피슉―.
그의 하나뿐인 귓불이 길게 갈라지면서, 핏방울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옛날 분은 모르겠지만 말이죠. 요즘은 신수가 되면 특별한 능력을 하나씩 얻게 됩니다.”
유준은 자신의 입가에 남아 있던 핏자국을 손으로 완전히 닦아 냈다.
울긋불긋하게 올라온 핏줄과 힘줄들은 그대로다.
유준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입에는 미소를 띄웠다.
“제 건 공진(共振)이에요. 참격을 멀리 보내죠. 한번 막아 봐요.”
촤아아악―!
유준의 몸이 회전했다. 수십 개의 참격이 쏟아져 나와 거대한 그물처럼 장기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거리는 검끝에서 일 장 정도인가. 기본적으로는 검이 늘어난 모습이고, 채찍처럼 휘어지진 않는다. 휘어지는 건……. 예기(銳氣)만을 날렸을 때군. 그때는 일 장 너머까지 닿는다.’
장기린은 창을 바쁘게 움직여 날아오는 참격들을 쳐 냈다.
유준은 능숙하게 공격의 박자를 조절하고 있었다.
어떨 때는 정신없이 많은 참격들이 날아오다가, 어떨 때는 한 박자 쉬고 빈틈을 찾아 찔러 오는 식이다.
‘자연스럽게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인다. 재능은 재능이군.’
장기린은 시야를 가득 채운 참격의 벽을 창으로 짓누르고 찢어 버렸다.
그리고 폭풍 속에 몸을 던지는 한 마리의 새처럼, 참격 속으로 굳이 한 걸음을 비집고 들어갔다.
푸확!
창을 잡지 않은 왼쪽 팔목 근처에 긴 자상이 새겨졌다.
피가 흘렀지만, 대수롭지 않다.
장기린은 그저 상처가 뼈까지 닿았는지만 확인하고 창을 수평으로 휘둘러 일시에 모든 공격들을 갈라냈다.
“강해진 게 기쁘겠지. 상대가 누구든 죽여 버릴 수 있으니 신(神)이 된 것 같을 거다.”
쿵.
쿵.
장기린이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유준의 참격은 빨라졌다.
발작하듯 뿜어내는 공격들이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 같았다.
‘역시 경험이 부족하군.’
유준이 아무리 수백, 수천 번의 싸움을 겪은 백귀(白鬼)라도 장기린과의 격차는 여전히 존재한다.
싸움 중에 상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 오히려 힘을 비축해야 한다.
가까이 다가온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걸 겁내서 미친 듯이 힘을 뿜어내서야 지치기만 할 뿐이었다.
촤악―.
핏―.
푸확!
장기린도 완전무결하게 무사하지는 못했다.
팔목, 손등, 어깨.
부위를 가릴 것 없이 힘의 여파로 상처를 입고 피도 흘렀다.
허나 중요 요혈에 닿는 상처는 단 하나도 없다.
공격들을 쳐 내는 장기린의 눈빛 또한 무심해 보일 만큼 차가웠다.
장난스러워 보일 만큼 여유가 넘치던 유준의 표정은 장기린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흔들렸다.
“그게 허무하다는 걸, 언젠가는 알게 될 뿐이다.”
이미 그 모든 일을 앞서 겪은 사람이 바로 장기린이다.
우우웅―.
진청룡 창날을 감싸고 있던 푸른색 강기가 더욱 짙고 강맹하게 유형화되었다.
뒤로 반 보.
활처럼 당겨지는 광배근.
“후우.”
장기린은 길게 숨을 내쉬면서, 일순간에 번뜩이는 섬광을 뿜어냈다.
‘일연적룡무. 제삼식.’
고오오오오―!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용이 불을 뿜는 것 같았다.
수십, 수백 번의 참격들을 일방적으로 짓뭉개며 날아간 기파가 유준의 전신을 덮쳤다.
“……!”
검의 경지로 따지면 심검(心劍)이다.
붉은 악귀의 적룡창과 검선의 유성검을 합쳐서 함께 만든 무공.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담은 초식이 바로 일연적룡무 제삼식이다.
검즉아 아즉검의 검아일체를 이룬 유준일지라도, 이미 마음의 검을 현실에서 유형화할 수 있는 심검의 경지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창 한 자루가 유준의 기(氣)와 신(身)을 관통하여 마음[心]에까지 닿았다.
덜컥 숨이 멎어 버린 유준이 입을 벙긋거렸다.
정기신을 모두 일거에 격타당한 유준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어둡고 고독한 세계에 영혼만 던져진 것처럼, 그의 몸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것이다.
장기린은 앞으로 내찔렀던 창을 높이 들어 올렸다.
멍하니 굳어진 얼굴.
석상처럼 굳어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유준에게 마지막 죽음을 선사할 생각이었다.
“안타깝군.”
작은 아쉬움만을 남긴 채.
장기린은 창을 아래로 내리쳤다.
유준이 기적적으로 검을 들어 올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장기린은 놀랐지만, 이미 승부는 기울어져 있었다.
콰창!
황금 검이 두 동강 나서 부러지고.
푸화악―!
유준의 가슴이 비스듬하게 베였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울컥, 토해 낸 피가 유준의 입가를 적셨다.
‘조금 얕았나?’
장기린은 창을 거둬들이면서 냉철하게 유준의 상태를 살폈다.
유준은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서서,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는 검끝으로 장기린을 겨누었다.
이제 그는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
백태가 잔뜩 껴서 뿌연 두 눈을 부릅뜬 채 장기린을 노려보았다.
“놀랍군.”
장기린은 충격을 받았다.
심창(心槍)으로 심혼을 제압했건만, 그래도 움직이는 자라니.
이 얼마나 강인한가.
주술을 쓰는 도사들 정도 되어야 이 정도 정신력을 지닐 텐데.
“보낼 수…… 없다.”
유준은 허리에 차고 있던 황금 검집을 집어 던졌다.
상처도 출혈도 심각한 상태인데도 그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철탑처럼 버티고 서서 장기린을 적대했다.
“아쉽군.”
허나 이미 서로 길은 갈라졌다.
싸움의 향방도 크게 기울었다.
장기린은 창을 뒤로 젖혔다.
이대로 찌르면 유준은 죽는다.
머리를 날려 버리면, 아무리 집혼기를 삼킨 신수라도 회복하고 살아날 수 없을 터.
그런데 그 순간, 장기린을 향해 달려드는 자가 있었다.
고오오오―.
“……!”
저 멀리 토담 위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리는가 싶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장기린에게 돌진해 왔다.
그는 겉모습부터 특이한 자였다.
대석 못지않아 보이는 거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손만 내놓고 있는 사내였다.
“저자는?”
장기린은 덤벼드는 자의 무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강인해 보이는 거구의 육신뿐만 아니라,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힘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귀기 어린 힘.
소호나 유준이 지닌 것과 비슷한 종류이면서도, 한편으론 격이 다른 힘이 육체 안에 뭉쳐 있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째서? 말로만 듣던 강시인가?’
장기린은 자세를 되돌리고, 덤벼드는 상대를 요격할 준비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순식간에 좁혀졌다.
장기린은 진청룡을 앞으로 내찔렀다.
딸려 오는 공기.
막강한 기파가 가감 없이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덤벼드는 사내는 새하얗고 매끈한, 거대한 손바닥 두 개로 진청룡의 창날을 강하게 붙잡았다.
쩌어어엉!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흙먼지가 흩날리고, 장기린이 딛고 있던 발밑이 미처 충격을 다 흡수하지 못하고 가뭄이 든 땅처럼 쩍 갈라졌다.
점점 가라앉는 흙먼지 속에서, 장기린은 자신의 창을 맨손으로 받아 낸 괴인을 향해 질문했다.
“넌 누구냐.”
눈, 코, 입조차 막아 놓은 붕대 너머.
뚝뚝 끊어지는 어색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궁기. 사흉……의. 짐승.”
파스슥―.
진청룡의 창날 끝에 하얗게 서리가 끼면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