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16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9)
“하남 삼산현이다. 그중에 백산(白山)이라고, 사시사철 눈이 녹지 않는 음지(陰地)가 있지. 거기에 백택이라 불리는 전대 고수가 살고 있다더군. 황실과 관련이 있다던데, 난 자세히는 모른다. 궁기는 거기 있는 백택을 잡으러 갔어.”
“백택……? 설마, 그? 그 백택을 혼자 잡으러 갔다고……?”
“왜? 아는 사람인가?”
“알아. 아마도. 그런데 너는 왜 그런 걸 순순히 말해 주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난 네가 제발 거기에 갔으면 좋겠다. 거긴 사지(死地)다.”
“그래? 가면 죽을 테니 알려 준다는 거야?”
“정보를 등급으로 나누면 특급 중에서도 특급의 정보였다. 견즉필사(見卽必死)가 붙어 있었다고. 그 백택이라는 자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사는 ‘모든 것’이 특급정보였어. 보나마나 거긴 무서운 곳일 거야. 내가 아는 한, 견즉필사가 붙어 있는 장소는 황실과 마교를 제외하곤 거기가 유일해.”
“유능하구나? 너.”
“흥.”
“도대체 도철과는 왜 같이 일했어? 그런 성질을 가진 자와 친했을 리도 없고.”
“말해 봤자 소용없겠지. 네 말대로다. 인성도 더럽고 참을성도 없고 짐승 같은 놈이었지만, 그래도 함께 일할 만한 장점은 있었어.”
“도철은 죽어 마땅한 자였어.”
“무림인 중에 안 그런 사람이 있나? 흥! 헛소리 말고 삼산현으로 가려면 당장 꺼져. 원한까진 아니지만, 넌 내가 출세할 사다리를 걷어찼다. 나 곽도엽 님은, 이 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야.”
“난 뒤를 걱정하면서 사는 건 싫은데. 그럼 너를 죽여야겠네?”
“…….”
“대답 안 할 줄 알았어. 넌 비겁해서 알기 쉬워. 본의는 아니었지만, 네게 손해를 끼친 건 사실이야. 내가 무사히 신수가 되면 널 부관으로 써 줄게.”
“……흥.”
“그러니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아는 게 있으면 다 이야기해 봐.”
***
백설지는 곽도엽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무산학관에서 주작방의 방장이었던 추남.
공자를 닮아 기괴하기까지 한 외모를 지닌 그는 머리와 상재(商材)만큼은 영특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다.
그는 백설지에게 그녀가 가장 절실히 바라던 정보를 주었다.
현재 궁기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가 향한 마을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말이다.
“후우.”
백설지는 사방을 극도로 경계하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새하얗게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얼굴에 닿는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와 발밑에서 사박사박 밟히는 눈길의 감촉은 그녀에게 익숙한 것들이었다.
사방이 온통 새하얀 설산은 그녀의 고향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눈을 감거나 자신의 소맷자락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하얀 공간에서는 눈이 쉽게 피로해지는 탓이다.
눈이 피로해지면 작은 것을 보지 못해 놓치게 되고, 그 작은 허점이 목숨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긴가?”
그녀는 설산의 중턱에 부자연스럽게 솟아 있는 얼음 바위를 발견했다.
휘이이잉-.
새하얀 눈이 칼바람과 함께 그녀의 몸을 계속 때렸다.
백설지는 얼음 바위 주변을 살펴보았다.
산 중턱에 있는 평지치고는 꽤나 넓은 곳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중간중간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땅이 움푹 팬 곳들이 있었다.
“이건……!”
그녀는 무산학관에서 추종술의 기본도 배운 사람이었다.
깊게 눌린 흔적, 미끄러지듯이 밀고 나가면서 땅을 쓸어낸 흔적까지.
바닥에 남은 수많은 흔적에서 사람의 발 크기를 추측하고, 그걸 토대로 움직임을 추측했다.
“빙설보(氷雪步)……!”
백설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확신을 얻은 그녀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얼음 바위에 손을 대보았다.
손바닥이 달라붙을 것 같은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기감을 집중해 살펴보니 얼음 바위 내부에서 깊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안에 있어.”
확신했으면 남은 건 행동뿐이다.
백설지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백옥처럼 새하얗고 매끈한 양팔을 드러냈다.
“후우…….”
양손을 얼음에 대고 길게 숨을 내쉬며 정신을 집중한다.
백설지의 두 눈에서 붉은빛이 일렁거렸다.
도철을 죽이면서 그녀가 얻은 건 크다.
집혼기를 채운 혼백.
흑시군에서 사흉의 신수라는 지위.
그리고, 지금 사용할 힘.
“용생……!”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붉은색의 강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매끈하고 하얀 양손을 뒤덮었다.
도철이 사용하던 철조는 없지만, 그녀의 맨손 위로 치솟은 용의 발톱은 충분히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콰드득-.
백설지는 얼음 바위에 그녀의 양손을 박아 넣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끄……으으……!”
무산학관 내부에서도 내공으로는 제일이라 칭송받던 그녀다.
풍족한 저수지가 있는 땅에서 벼가 잘 자라듯, 충분한 내공을 지닌 그녀의 무공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얼음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전력을 다해 용을 쓰면서 몸을 비틀었지만, 겉에만 얼음이 좀 긁혔을 뿐 내부의 단단한 힘은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끄으으……!”
일각의 시간이 흘렀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그녀의 몸에서는 김이 뿜어져 나왔다.
온몸을 비틀면서 용을 쓰고 있으니 아무리 추운 땅이라고 한들 몸에서 열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작은 단서만을 쫓아 북해빙궁에서 무산학관까지.
그리고 그 무산학관에서 무려 십 년이나 때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얻은 기회다.
하늘도 그 정성에 감동했음인가.
그 순간, 삼산의 중심에 있는 작은 화전촌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그녀는 몰랐으나, 그 날은 은자촌에서 장기린과 소호의 대결이 이뤄지던 날이었다.
백택은 그곳으로 가 있었고, 방금 전에 많은 힘을 써서 무언가를 바꾸었다.
쩌저적-.
“흡!”
얼음 바위에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하자,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녀는 기회가 왔음을 알고 재빨리 틈새에 양손을 집어넣었다.
“용……생……!”
다시 한 번 외치는 힘의 이름.
그녀의 눈빛이 번뜩이고, 붉은색 강기가 선명하게 빛났다.
콰드드드득-!
얼음 바위가 쪼개지고 갈라지며 양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눈앞에 쓰러져 있는 한 사내를 응시했다.
거대한 바위에 깔려 있었다던 손오공이 이랬을까.
얼음 바위를 깨부수자 모습을 드러낸 그는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오라버니……!”
백설지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의 모습은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대로였다.
금발의 머리.
벽안의 눈.
빙궁에서도 손꼽히던 거대한 체구에 완벽하게 단련된 육신.
“늙지를 않았어……?”
문제는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무려 십여 년 전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시간이 그리 흘렀으니 이제는 사십 대 중년의 사내가 되어 있어야 마땅하건만.
턱에 솜털 하나 없는 매끈한 얼굴은 그녀가 오라버니의 무림행을 응원하던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일단은, 하산해서 생각하자.”
그녀는 궁기를 등 뒤에 업고 전력을 다해 산을 내려갔다. 축 늘어진 그의 팔이 힘없이 덜렁거렸다.
그녀가 한 행동이 훗날 얼마나 큰 변수를 만들어 낼지.
그녀 자신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
“어머니……?”
궁기는 정신을 차리고 백설지를 보자마자 뜬금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궁기의 눈빛은 총명하지 못했다.
뿌연 안개가 낀 하늘처럼, 그의 시선은 탁한 무언가에 가려져 있는 듯했다.
“난 어머니가 아니야. 백설지야.”
숨소리가 많이 들어가고 어조가 낮은 북방 특유의 말투였다.
궁기는 자신과 똑같은 억양을 지닌 여인을 보며 당황스러워했다.
“난, 모른다. 누구냐. 너는.”
“당신의 동생. 설지.”
“설지……?”
“기억 못하나 보네. 무림행을 떠나면서 바지를 잡고 매달리는 나를 당신은 매정하게 뿌리쳤지.”
백설지는 담담하게 말했고, 궁기는 두통을 느끼는 듯이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난…… 가족…… 없다……. 무림행은…… 예전……. 모른다. 기억. 안 난다.”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녀가 알던 그대로의 목소리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제대로 된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기억을 잘 못 하는구나?”
백설지는 궁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일까.
다행히도 궁기는 백택을 쫓다가 갇힌 얼음 안에서 불타오르던 복수심을 조금 식힐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대화가 되고 있었다.
“무림행……은…….”
궁기는 말끝을 흐렸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처럼,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본래 감정이 조금 식으면 주변이 보이지 않던가.
궁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훨씬 사람다운 존재로 돌아오고 있는 상태였다.
“백택을 쫓았다면서?”
“백택은……. 그렇다.”
“왜 그를 잡으려 해?”
“복수…….”
“아버지의?”
“…….”
“의미 없는 짓이야. 그만둬. 어차피 그렇게 복수 운운할 일도 아니었잖아?”
궁기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긍하지도 않았다.
그를 지금 살려 놓고 있는 것이 그 불같은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걸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말을 안 듣네. 그럼 이렇게 말해 볼게.”
“무엇. 을?”
“졌어?”
“…….”
“얼음에 갇혀 있는 걸 보면 졌겠지? 당연한 일이야. 내 기억으로 그는 빙궁에 왔을 때도 사람이 아니었어. 지금은 얼마나 더 강해졌을까. 상상도 되질 않아.”
“백택…… 강하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싸울 필요 없잖아. 어차피 지는데.”
궁기는 어색해했다.
붕대를 벗은 것이 어색해 다시 얼굴에 칭칭 감으려는 것을 백설지가 몇 번이나 말렸다.
“살아 있었다면 왜 빙궁으로 돌아오지 않았어? 어머니가 오랫동안 기다리셨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지만.”
백설지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 했던가.
본래 부모는 자식이 효도를 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다.
백택은 처음으로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어머니…….”
“기억은 나?”
“닮았다. 너. 동생……?”
“그래. 동생이라고 했잖아.”
“…….”
“난 오라버니를 만나면 미친 듯이 화를 내거나 펑펑 울 줄 알았어.”
운다.
궁기에게는 지극히 낯선 단어였다.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멍하니 굳어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네. 지금 모습을 보면 더더욱.”
“난…… 모른다.”
“일단은 황실로 돌아가자. 어차피 나도 흑시군이고 사흉의 일원이야. 말하자면 오라버니의 동료지.”
“사흉……?”
“아직 이름은 못 받았어. 하지만 곧 받을 거야. 나는 신수를 받아들이는 의식을 이미 다 치러 냈거든. 아마 도철의 이름을 이어받겠지?”
백설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적어도 똑같은 신수인 궁기가 있기에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였다.
그 순간 궁기의 시선이 착잡하게 가라앉는 것을, 백설지는 보지 못 했다.
“왕진 태감에게로 돌아가서 이 일을 이야기해야 해. 우선은 돌아가자.”
“황실…….”
“백택 쪽은 쳐다보지도 마. 찾았으니 됐어.”
궁기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백설지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마차를 타고, 그대로 북경까지 돌아갈 수 있었다.
***
어두운 밤.
자신의 온몸에 붕대를 감은 궁기는 황실에 존재하는 왕진의 처소로 향했다.
요즘 들어 점점 많아지는 손님들과 수많은 선물들로 늘 꽉 차 있던 공간에 오늘은 다른 존재가 한 명 서 있었다.
“궁기?”
유준.
한때는 사흉 중 혼돈이었으며, 지금은 황금 갑주를 입은 ‘호위’의 상징이 된 자다.
궁기는 그가 왕진의 심복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을 것. 있다.”
“어떤 것이 궁금합니까?”
“사흉. 어떻게. 나갈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