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17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10)
“어떻게 하면 사흉에서 나갈 수 있냐고요?”
“그렇다.”
“함부로 나눌 이야기가 아니군요. 이리로 와 주시겠습니까?”
유준은 궁기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리고 간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밤,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찌르르 들려왔다.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당신이 사흉에서 나간다는 건 이 나라에 끼치는 영향이 큽니다. 저도 함부로 말할 수가 없어요.”
“나, 아니다.”
“예?”
“그녀.”
유준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되물었다.
“그녀라면…… 백설지 소저 말입니까?”
“그렇다.”
“그녀를 사흉에서 내보내는 방법을 물어보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
유준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궁기는 상대의 감정에 무감각한 편이었지만, 유준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내심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챘다.
“왜 그런 걸 대신 물어보는지 궁금하지만……. 일단 답하자면 방법은 있습니다.”
유준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방법이 있으면 이제 방법을 말해야 할 차례건만.
어째선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붕대로 칭칭 감아 놓은 얼굴임에도 궁기가 미미하게 눈썹을 꿈틀거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방법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왜?”
“알고 싶으면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렇군.”
궁기는 곧바로 손을 들어 공격을 취할 준비를 했다.
파스슥-.
새하얗고 커다란 손에 맺히는 빙백신기.
거대한 자연의 힘에 가까운 극한의 진기가 살얼음을 뿜으며 주변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스릉-.
유준의 반응도 눈부시게 빨랐다.
어느새 황금 검집에서 반쯤 검을 빼며 선연한 예기(銳氣)를 뿜어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싸우려고요?”
“필요하다면.”
“진정하십쇼. 제 말은 그냥은 알려 드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유준은 빙긋 웃었다.
궁기는 그 웃음이 유준과 매우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 이지?”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조만간 강적을 만날 것 같아요. 이기고 싶고 최선을 다할 건데 그래도 솔직히 불안합니다. 궁기가 도와줬으면 좋겠네요.”
“…….”
“사흉의 혼돈은 싸움에서 져도 별로 상관없었지만 황실의 황금 장수는 져서는 안 됩니다. 그건 곧 왕진 태감님의 패배거든요.”
“왕 태감?”
“예. 그쪽, 궁기의 패배이기도 하고요.”
궁기는 손을 조금 내렸으나, 빙백신기를 거두지는 않았다.
“나. 너. 위해서. 안 싸운다.”
“그렇겠죠. 그래서 ‘거래’입니다. 저를 위해 싸우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제가 위험해지면 도와주세요.”
“…….”
“이렇게 하죠. 우선 제가 싸우겠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차고 있던 검집을 던진다면. 도와주세요. 아니, 살려 주십시오.”
유준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 보였다.
패배할 싸움을 대비하는 듯한, 그런 결연하고 절박한 분위기가 흘렀다.
“알겠다.”
궁기는 낮고 어두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 검집. 던지면. 돕는다. 대신…….”
“그 대가로 백설지 소저가 사흉이 되지 않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흉이 되지 않게 직접 도와도 드리죠.”
“……좋다.”
궁기는 붕대를 살짝 걷어 두 눈으로 직접 유준을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그런 게 필요하다면 말이지만요.”
씁쓸한 유준의 중얼거림은 궁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
검집이 날아간다.
땅바닥에 나뒹굴며 반짝이는 황금색 검집은 어두운 밤을 밝히는 하나의 효시(嚆矢)와 같았다.
토담 위의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궁기는 곧바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웬만한 성벽만큼 높은 토담은 그에게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강인한 양손으로 퍽퍽 토담에 손을 찔러 넣으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갔다.
유준은 위기였다.
피투성이에 가슴이 십자로 갈린 상처는 아무리 집혼기를 몸에 박아 넣은 신수라도 버티기 힘든 상세였다.
피를 토하는 모습.
백태가 잔뜩 낀 눈을 부릅뜨고 있는 광경은 지금껏 여유롭게 웃기만 하면서 유들유들 빠져나가던 유준의 평소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고오오오---.
달려갈수록 고조되는 기세.
궁기의 전신을 극한의 빙백신기가 감싸 안았다.
유준을 압도하던 ‘그자’는 몸을 돌려 궁기에게로 창끝을 겨누었다.
훅- 하고 마치 주변의 공기가 그를 향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한순간 온 세상의 중심이 그로 변한 것 같았다.
극도로 모여든 기세가 창끝에 집중되었다.
그러다 찌르기 일격.
한순간에 공간을 격하고 날아드는 첨격이 궁기의 심장을 노리고 쏘아졌다.
‘강하다.’
궁기는 백택을 상대하면서 느낀 것과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그는 전력을 다해 힘을 끌어 올리면서 박수를 치듯 가슴으로 쏘아지는 창날을 붙잡았다.
쩌어어엉!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궁기의 양팔을 칭칭 감고 있던 붕대가 손목 부근에서부터 산산이 터져 나갔다.
잔뜩 부풀어 오른 양팔의 근육이 드러났으나, 상대방은 상처하나 없다.
궁기 자신보다 훨씬 작은 몸.
상대는 평범한 체구였으나,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함을 궁기는 여실히 느꼈다.
“넌 누구냐.”
궁기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뭔지 파악하기도 힘들었던 주술로 그를 제압했던 백택과는 전혀 다른 상대다.
분명히 무공 대 무공으로 겨루고 있는데, 상대방 실력의 끝을 알 수가 없다.
“궁기. 사흉……의. 짐승.”
궁기는 전력을 끌어 올렸다.
파스슥-.
차갑고 단단한 창날 끝에 하얗게 서리가 끼면서 얼어붙었다.
***
“사흉이었군.”
장기린은 사흉에 대해서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도철, 도올, 혼돈, 궁기.
왕진이 키우고 있다는 사흉의 짐승들의 이름이다.
도철은 봤고, 도올은 소호가 쓰러뜨렸으며, 혼돈은 유준이라고 했다.
그 마지막이 궁기.
하오문이 말하길 궁기야말로 사흉의 핵심이며, 왕진이 가진 가장 강한 무력이라고 했다.
장기린이 직접 보니 과연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날 막을 건가?”
궁기는 행동으로 답했다.
쩌저적-.
진청룡의 창날을 덮던 서리가 이제는 꽁꽁 얼어붙은 단단한 얼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창을 넘어 장기린에게까지 한기가 넘어올 기세였다.
파창!
그는 창날을 옆으로 비스듬히 꺾으면서 옆으로 휘둘렀다.
부서진 얼음이 허공에 새하얗고 반짝거리는 빛 무리를 만들었다.
궁기는 즉시 창날을 놓아 버리면서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우우웅-.
공기가 떨렸다.
궁기의 움직임은 멧돼지처럼 저돌적이면서 호랑이처럼 날렵했다.
양손.
커다랗고 하얀 손바닥 위로 도깨비불처럼 시퍼런 한기가 유형화되어 모여들고 있었다.
입김이 나왔다.
궁기가 힘을 쓰자 주변의 날씨 자체가 변해 버린 듯했다.
궁기의 무형기와 장기린의 무형기가 만나 거센 싸움을 일으켰다.
터엉!
궁기는 양손을 뻗었다.
시퍼렇게 빛나는 양손이 장기린의 창대와 부딪쳐 폭음을 터뜨렸다.
장기린은 서로간의 강대한 힘을 버티지 못하고 자신의 발밑이 터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궁기의 손이, 창대를 후려친 자세에서 기묘한 변화를 선보였다.
빙글-.
손바닥은 여전히 창대에 댄 채로, 손의 방향만 돌려 장저(掌低)와 장저를 맞닿게 만들었다.
별거 아닌 동작이었으나, 강기처럼 유형화된 빙백신기가 손동작에 따라 묘한 흐름을 일으켰다.
푸른빛이 점점 강해졌다.
입김이 나올 만큼 서늘했던 공기가 이제는 입술이 꽁꽁 얼어붙을 만큼 차갑게 변했다.
“빙, 백, 신, 장.”
궁기는 뚝뚝 끊어지는 어색한 목소리로 무공의 이름을 말했다.
쩌저적-!
빙백신장.
머나먼 북쪽의 땅.
북해빙궁의 절공이 극성의 힘을 품고 장렬하게 펼쳐졌다.
푸화아아악-!
장기린은 눈앞에서 새하얀 설원이 펼쳐지는 듯한 환상을 목격했다.
놀라운 한기였다.
자연기와 닮아 있는 차가운 빙백신기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장기린을 덮치고 있었다.
피해야 마땅하건만.
장기린은 그 순간 창을 놓고 피할 수 없었다.
창을 놓는 순간 궁기의 장력은 창대가 아니라 장기린의 가슴을 후려칠 게 분명했던 탓이다.
장기린은 그저 호흡을 멈추고 충격에 대비했다.
내공을 끌어 올려 극한의 빙백신기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후우우웅-!
파스슥-.
장기린은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새하얀 서리에 덮여 가는 걸 확인했다.
손등을 덮고, 팔목과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얼어붙는다.
스하아-.
장기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이 새하얗게 얼어붙다가 허공에 눈가루를 만들어 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시렸다.
폐부가 얼어붙는다.
장기린은 여기까지가 한계임을 느꼈다.
‘여기서 끊는다!’
“흡!”
장기린은 강하게 진각을 내딛었다.
쿠우웅-!
땅을 울리는 거센 충격이 허리를 타고 올라와 그의 양손까지 전달되었다.
파바바박!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 몸에 달라붙었던 서리가 뿌옇게 터져 나간다.
그의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피가 끓는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이다.
장기린의 두 눈이 불타오르듯 강렬한 빛으로 번뜩였다.
고오오오오오-.
막강한 기파.
전신의 근육이 뜨거운 열기를 발했다.
터엉!
궁기의 몸이 뒤로 밀렸다.
무공의 맥은 끊겼고, 빙백신장은 중단되었다.
궁기는 곧바로 다시 자세를 잡고 이번엔 왼손 장타로만 빙백신장을 날려 왔다.
파라락-.
후웅!
장기린은 비스듬하게 궁기의 장타를 비껴 내면서, 창 손잡이로 궁기의 양 무릎을 안쪽에서 후려쳤다.
뻐벅!
창의 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소리는 한 번처럼 들렸다.
궁기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장기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궁기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왼발을 궁기의 양 다리 사이로 밀어 넣고, 강하게 진각을 밟는다.
회오리바람처럼 돌아간 그의 상체가 좌측 어깨로 궁기의 명치를 거세게 강타했다.
터어엉!
전고(戰鼓)를 울리듯 공기가 떨렸다.
궁기의 몸이 반으로 접히면서 뒤로 날아갔다.
장기린은 좌측 어깨에 하얗게 얼어붙은 얼음 조각을 떼어 냈다. 그 짧은 사이에 궁기도 손으로 장타를 날려 온 것이다.
타격은 적었다.
근육이 조금 욱신거릴 뿐.
장기린은 무심하게 얼음을 털어 내고 곧바로 창을 일직선으로 겨누었다.
고오오오-.
장기린은 뒤로 날아가는 궁기를 추격하듯 곧바로 몸을 날렸다.
모여드는 진기.
진청룡의 창끝에 막강한 힘이 모여들었다.
궁기의 신체 균형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막을 수 없다.
이 일격으로, 심장을 꿰뚫는다.
‘일연적룡무, 제일식.’
강하고 직선적인 공격.
단순하지만,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일기관천의 한 수가 궁기의 심장을 노리고 쏘아져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쒜에엑-!
“……!”
섬뜩한 살기와 함께 밑에서 위로 솟구치는 은빛 광채가 있었다.
마치 발밑의 그림자에서 솟구치듯 장기린의 목을 향해 칼날이 번뜩였다.
이대로 창을 찌르면 장기린은 목이 베인다.
그는 찌르려던 창을 거두고 날아드는 검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채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인영이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폐인이나 다름없는 모습.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고, 온몸에 돋아난 핏줄과 힘줄도 여전했다.
가슴에 십자로 갈라진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해 선혈이 울컥울컥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유준은 전의를 거두지 않았다.
은은하게 살기를 피워 올리며, 검끝으로 여전히 장기린의 요혈을 노려왔다.
“그런가.”
장기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고법에 맞고 튕겨져 나간 궁기도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치명상을 입히고 승부를 볼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좌측엔 유준.
우측엔 궁기.
천하에 손꼽히는 살귀 두 사람을 눈앞에 둔 채, 장기린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둘 다 죽겠다는 거군.”
쿵.
장기린의 발밑에서 생기 넘치던 풀들이 새카맣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