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19화 (448/686)

13권 18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11)

살기가 충천(衝天)한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장기린은 깊고 어두운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냈다.

하늘이 어두워진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흑시군들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피하듯 황급히 한 걸음을 물러섰다.

화아아아악-.

허물을 벗어 던지듯 새로운 기파를 뿜어내는 장기린은 그의 별호에 왜 무쌍(無雙)이란 단어가 들어갔는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마치 뜨겁게 달궈진 철에서 나오는 아지랑이 같기도 했고, 개기일식 때 보이는 어스름한 빛 무리 같기도 했다.

어두운 기운을 태양처럼 뿜어내는 자.

그야말로 사신(死神)이다.

장기린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기를 씻기 위해 이십 년을 수련했다. 하지만 헛것이 되는 데는 단 하루로 충분하군.”

스릉-.

진청룡의 창날이 장기린의 마음처럼 울부짖었다.

“평범한 삶이란 어찌 이리 어려운가. 내 자식을 건드린 자를 가만히 두는 게 평범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평범을 거부할 것이다.”

장기린은 창끝으로는 궁기를, 시선은 유준에게로 향하며 두 사람을 본인의 무형기 영향권 아래에 두었다.

“왕진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비켜라. 아니면 베겠다.”

장기린이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짐승처럼 울부짖은 궁기의 온몸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안 그래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는데, 거기에 얼음까지 덕지덕지 달라붙으니 이제는 정말로 사람이 아니라 얼음 인형이 움직이는 듯했다.

게다가 크고 매끈한 양손에선 시퍼런 빙백신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빛났다.

기이한 광경.

천하에 또 없을 무인인 것은 궁기도 마찬가지다.

스릉-.

유준 또한 범상치 않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정면을 겨눈 검에서는 어떠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온몸이 피범벅임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칼끝에선 무려 일 장 가까이 기이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유준이 말했던 신수의 공능.

먼 거리를 제압할 수 있는 공진(共振)이 전개된 것이다.

“그런가.”

장기린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살기를 뿜어내는 장기린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

스스로의 힘을 믿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전의(戰意)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했다.

“알겠다.”

장기린은 창을 뒤로 뺐고, 진청룡의 창날이 천수여래처럼 수십 개로 늘어났다.

“끝을 보지.”

후우우웅-!

수십 개의 창격이 폭풍처럼 궁기와 유준을 덮쳐 갔다.

***

터엉!

유준의 무공은 곤륜의 심법인 옥심귀일기(玉心歸一氣)에서 비롯된다.

예로부터 산지조종(山之祖宗) 곤륜산(崑崙山)이라 하지 않던가.

도문의 종가인 곤륜의 무공은 번뇌가 가득한 유준의 마음을 조화롭게 안정시켰다.

유준이 굳이 곤륜파에서 여성 문도들이 주로 익힌다는 옥심귀일기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한 힘보다는 빠른 속도를.

돌을 부수는 패력보다는 솔잎 사이를 바늘로 뚫는 듯한 정확도를.

무공 성향이 확고한 유준에게 있어 내력을 섬세하게 운용할 수 있는 옥심귀일기는 그야말로 딱 맞는 무공이었다.

무공의 천재는 아니지만, 검술에 있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귀재가 바로 유준이다.

그는 곤륜파의 유룡검(遊龍劍)과 장강용왕 추묵환의 무공인 해왕십삼기를 섞었다.

옥심귀일기와 유룡검의 조화, 거기에 수많은 실전 경험을 압축한 해왕십삼기를 섞었으니 그 검술이 범상할 리가 없을 터.

그게 바로 유준의 독문 무공 백귀검(百鬼劍)이었다.

곤륜 무공의 도학적 깊이에, 장님인데도 불구하고 잘 단련된 육체에서 나오는 빠르고 실전적인 움직임이 섞여 들었다.

유준은 이제 장애가 없는 무인들과 비교해도 몸놀림이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빠르고 정확했다.

유준의 검끝은 눈으로 봐서는 알 수 없는 작은 틈마저 찾아내서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검법, 백귀검의 서늘한 검격에 살기가 짙은 만월귀살(彎月鬼殺) 초식이 섞여 들면 방어하기 어려운 게 바로 그런 이유다.

쩌정!

장기린은 집요하게 파고드는 유준의 검을 창대를 휘둘러 강하게 쳐 냈다.

창대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이 범상치 않다.

유준의 검이 내뿜는 예기는 스치기만 해도 팔이 잘릴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다.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강자와 약자가 뒤바뀌는 일은 싸움에서 흔한 일이다.

‘빠르군.’

유준은 피투성이임에도 즐겁다는 듯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반장 길이의 장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그의 손에서 검끝이 넘실거리는 해왕십삼기가 펼쳐졌다.

강맹한 기세.

날카로우면서 은밀한 살기가 턱 끝까지 파고든다.

‘고통을 못 느끼는 건가.’

장기린은 유준의 가슴에서 이제는 말라붙어 버린 것처럼 출혈량이 줄어든 것을 확인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피를 보고 광기에 빠져서 스스로의 고통을 못 느끼는 자들.

그런 자들은 싸움이 끝난 후에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죽거나, 아니면 지옥을 맛보게 된다.

그동안 무시했던 고통들이 한꺼번에 돌아오는 탓이다.

피슉-!

장기린의 발 언저리에서 땅바닥이 길게 팼다.

치르릉-.

푸확!

창대를 타고 오른 검기가 장기린의 머리카락 일부를 잘라 내며 어깨 너머로 지나갔다.

장기린은 몸을 비스듬히 돌리면서 회전력을 살려 창날이 아닌 손잡이 쪽을 유준에게로 찔렀다.

“흠!”

후우우우웅-!

쩌엉!

유준의 안색이 굳었다. 검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휘청거렸지만, 그래도 끝까지 버텨 냈다.

하지만 진청룡에 담긴 것은 일연적룡무의 무리(武理)다.

스치듯 지나간 여파만으로도 유준의 어깨 언저리에 길게 줄이 그어지며 핏물이 터져 나왔다.

쩌저저정!

푸확!

검과 창의 격돌음이 어지럽게 교차되었다.

상승의 경지에 접어들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회색빛으로 변한 세계에서 두 사람의 검과 창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들의 움직임이 두 사람에게는 느리게 느껴졌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전혀 달랐다.

흑시군들이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두 사람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검을 뒤집고 반원을 그리며 유준의 검이 백귀검의 검강을 멀리서 뿌려 대면, 장기린의 창이 일연적룡무의 무용을 가감 없이 뽐냈다.

공격하고, 공격하고, 공격한다.

맹공을 맹공으로 막는 치열한 공방이 숨 쉴 틈도 없이 이루어졌다.

후우우웅-!

콰드드드득!

게다가 적은 유준뿐이 아니었다.

유준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인물이 강맹한 동작으로 장기린을 밀어붙였다.

후웅-.

장기린의 창이 커다란 곡선을 그렸다.

궁기는 한 마리의 곰처럼 사납게 달려들었다.

두꺼운 팔과 커다란 두 손으로 덤벼드는 동작은 야성적이지만 민첩하기 이를 데 없다.

극성의 빙설보는 땅을 미끄러지듯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왔고, 양손을 수투처럼 덮은 빙백신기는 천하의 장기린조차 닿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공격을 피하게 만들었다.

키이잉-.

섬전처럼 내찌른 진청룡이 궁기의 오른쪽 가슴에 격중했다.

쩌저정!

“……!”

그런데 창날이 옆으로 비껴 나간다.

궁기의 몸을 뒤덮은 새하얀 서리는 강철 갑옷 같았다.

게다가 미끄럽기 그지없어서 공격을 맞아도 옆으로 미끄러지게 만들었다.

쒸이이익-!

“흠.”

장기린은 몸을 뒤로 젖혔다.

유준에게 시선을 뺏긴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밑에서 솟구친 검이 그의 턱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파바밧!

유준의 검강이 베어 낸 땅에서 바위가 쩍- 하고 갈라졌다.

궁기와 유준의 연계다.

한 명을 상대하면, 다른 한 명이 틈을 노려 위험한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둘의 연계를 끊어야겠군.’

장기린은 생각을 정하자마자 곧바로 행동했다.

쿠웅!

강하게 진각을 내딛었다.

바닥에 있던 돌조각이 위로 튀어 오르자, 창끝으로 돌조각을 쳐서 유준에게로 날려 보냈다.

따앙!

유준은 강맹한 진기가 실린 돌멩이를 피하지는 못하고 검으로 비스듬히 비껴 내듯 쳐 냈다.

장기린은 그 틈에 자신의 얼굴을 붙잡으려 드는 궁기의 손을 아래에서 위로 후려쳤다.

손목에 창대를 걸고, 몸을 낮추면서 궁기의 발목을 걷어찼다.

빙설보의 중간에 끼어들어 신법을 꼬아 놓은 것이다.

달리는 마차의 바퀴에 창대를 꽂아 넣은 것과 같다.

궁기의 거구가 아무런 저항 없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

졸지에 포탄처럼 날아온 거구의 육신을 정면으로 맞이한 유준은 잠시 망설였으나, 검으로 베지는 않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드드득-.

궁기 또한 잠시 균형을 잃었을 뿐 양손을 바닥에 꽂아 넣어 곧바로 신체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 큰 타격은 아니었다.

한 호흡도 안 되는 짧은 찰나의 순간.

그러나 장기린에게 필요로 한 건 바로 그 찰나였다.

‘일연적룡무. 제일식.’

긴 호흡과 함께 내뻗은 섬광 같은 찌르기 일격.

창이 지나간 뒤에야 폭음이 터져 나오는 막강한 일격이 궁기의 중단을 정확히 꿰뚫었다.

“궁기!”

유준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쩌어엉!

궁기가 덜컥 움직임을 멈추었다.

온몸을 덮고 있던 얼음 갑주가 방사형으로 금이 가며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중심을 맞추니 되는군.”

장기린의 서늘한 눈빛이 궁기를 압도했다.

“질 수. 없다.”

궁기는 하얀 입김을 불어 내며 진청룡의 창날을 잡으려 했으나, 장기린은 창을 거두고 머리 위에서 크게 회전시켰다.

그는 천지를 아우를 듯한 원을 그렸다.

청천(晴天)의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유성처럼.

진청룡의 창날이 궁기의 가슴으로 쏘아져 나갔다.

푸욱!

진흙 속에 막대를 박아 넣는 것 같은, 지금까지의 격돌음과는 다른 둔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다급하게 달려온 유준의 검이 장기린의 미간을 노리고 찔러 왔다.

장기린은 철판교의 수법으로 하체를 그대로 둔 채 상체를 뒤로 젖혔다.

진청룡의 창날은 우측 가슴을 찔렀다.

폐부가 잘려 나갈 것은 분명하고, 운이 나쁘다면 위장까지 상했을 위치였다.

그러나.

사흉의 짐승.

궁기는 일반적인 무인이 아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움직였다.

빙백신기가 잔뜩 실린 양손으로 장기린의 머리를 붙잡으려 장타를 날려 온다.

붙잡히는 즉시 얼음이 되어 깨져 나간다.

궁기의 공격은 여전히 위험했다.

터엉!

후우웅-.

장기린은 창 손잡이를 손바닥을 이용해 위로 쳐 올리고, 몸을 다시 한 번 뒤로 젖혔다가 곧바로 일으켜 세웠다.

창날은 궁기의 가슴에 박힌 채다.

지이잉-.

창날이 떨리고, 궁기의 가슴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창이 꺼떡거리면서 내부를 헤집어 놓았을 텐데도, 궁기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점점 더 사나워지면서, 붕대 너머로 시뻘건 눈빛이 점점 불타올랐다.

쒜에에엑-!

다시 한 번 유준의 검을 피하면서 장기린은 침중하게 두 사람을 살폈다.

가슴이 쪼개졌는데도 멀쩡히 덤벼 오는 궁기.

온몸에 핏줄이 돋아난 채,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인데도 검격을 날려 오는 유준.

따다다당!

장기린은 일연적룡무 제이식을 이용한 연환격으로 덤벼드는 공격들을 몰아냈다. 궁기와 유준은 아픔을 모르는 사람처럼 분투했다.

몸을 날리는 신법은 장쾌하기 이를 데 없고, 이어지는 백귀검과 빙백신장은 하나의 진법처럼 서로의 빈틈을 보완해 주며 정교하게 맞물렸다.

쩌저정!

푸확!

창을 잡은 팔이 조금이지만 피로했다.

푸욱!

콰드드득!

궁기가 땅에 빙백신장을 때리자, 꽁꽁 얼어붙은 얼음 덩어리들이 우박처럼 장기린에게로 날아들었다.

쒜에엑-!

그 틈을 노리고 덤벼든 유준은 그림자에서 솟구치듯 장기린의 발목을 베어 왔다.

‘과연, 이름을 떨칠 만하군.’

아무리 둘이서 힘을 합쳤다고 한들 장기린과 백중세를 유지하며 싸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삼십 합에서 끝날 줄 알았던 싸움이 백 합, 이백 합까지 넘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실낱같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궁기의 빙백신장은 장기린의 옆구리를 얼렸다.

유준의 백귀검은 왼쪽 어깨에 깊은 자상을 새겨 넣었다.

‘끝낸다.’

무공이란 본래 자기 자신을 얼마나 믿는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법.

장기린은 스스로를 믿고, 강한 마음을 유지하며 두 사람을 묵묵히 밀어붙였다.

쩌어엉!

마침내 유준의 반쪽짜리 황금 검 검날이 완전히 부서져 파편이 되었다.

막강한 살기가 궁기와 유준 두 사람을 짓눌렀다.

격렬했던 싸움은 결국 장기린의 막강한 일격으로 마무리되었다.

푸화악-!

궁기의 빙백신기를 깨부순 진청룡 창날이 그의 오른쪽 어깨에서 좌측 옆구리까지, 상체의 절반을 쪼개듯 갈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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