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20화 (449/686)

13권 19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12)

사람의 신체는 나약하다.

금강불괴 수준의 외공을 익히지 않는 한, 일평생 몸을 단련해도 쇠붙이 하나를 막지 못하는 게 현실이지 않던가.

궁기는 피부와 근육이 완전히 갈라져서 몸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궁기가 다급한 움직임을 보였다.

공격을 거두고 양손으로 가슴을 붙잡는 동작이 거칠었다.

파스슥-.

극성의 빙백신기가 궁기의 상처를 바느질하듯 붙여 나갔다.

울컥 치솟던 피가 까맣게 죽어 가며 얼어붙는다. 새하얀 서리가 궁기의 상체를 덮어 나갔다.

임시변통이긴 하나, 그래도 상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다.

‘끝이군.’

상처를 수습한다고 한들, 그 사이에 빈틈이 생긴 것은 막지 못하는 법.

후우우웅-.

장기린은 그대로 몸을 반 바퀴 돌려 수평의 참격을 날렸다.

노리는 건 궁기의 목.

일격에 머리를 날리기 위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창을 휘둘렀다.

쒜에에엑-!

그 순간, 옆에서 유준이 제비처럼 날아들어 장기린의 참격을 가로막았다.

운룡대구식.

곤륜 최고의 신법이 모습을 드러냈다.

쩌어어엉!

“커헉.”

울컥. 유준이 피를 토해 냈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왼팔이 부러졌는지 덜렁거리고 있었다.

장기린은 눈썹을 찡그린 채 미간을 좁혔다.

이미 황금 검은 완전히 박살 났을 터.

대체 무엇으로 그의 창을 막았나 싶어 봤더니, 아까 바닥에 던졌던 황금 검집이 아닌가.

그나마도 이제는 반으로 쪼개져서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검도 아닌 검집으로 그의 일격을 막다니.

경이로울 지경이다.

‘집요하군.’

장기린이 창을 거둬 다음 일격을 준비하는 사이, 유준은 반만 남은 검집에 ‘혼돈’으로서 사흉의 능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채찍처럼 길게 늘어난 검기가 장기린의 목을 노리는 듯하다가 아래로 내려와 허벅지를 찔러 왔다.

장기린이 창을 돌려 막으려고 하자, 이번에는 다시 올라와 상처를 노려 온다.

‘거궐혈?’

유준의 검기가 혈도를 찔러 왔다.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검의 운용으로 신체 각 부위의 요혈들만 노려는 것이다.

찌르려고 하다가도 기린이 무기를 쳐 내려 하면 물러서는데 그 거리감이 기가 막혔다.

피슛-.

치열한 거리감 싸움 끝에 결국 장기린의 허벅지에 상처가 생겨났다.

찌릿한 아픔이 장기린의 등골을 타고 오른다.

게다가 솟구쳐 오른 검광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반월(半月)의 잔영을 남기며 날아든 붉은색 검기가 장기린의 하나뿐인 귀 옆에서 창대를 두드렸다.

까아앙!

공격은 막았으나, 거기서 생긴 굉음까지는 막지 못했다.

음파가 고막을 넘어 머리를 그대로 두드리니 일순 정신이 아찔해진다.

눈앞이 흔들렸다.

뇌가 진탕된 듯했다.

전신에 진기가 융통무애하게 흐르는 장기린조차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충격이다.

보통의 무인이 당했다면 기절했을 만한 충격.

쒜에에엑-!

유준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검을 돌려 장기린의 가슴을 찔러 왔다.

장기린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빈틈이 있다?

아니다.

빈틈처럼 보였을 뿐.

수많은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장기린은 한 박자 더 빠르게 창을 아래로 내리 그었다.

번뜩이는 섬광.

진청룡 창날이 유준을 반 토막 낼 기세로 상단에서 떨어져 내렸다.

푸화악!

피가 튀어 올랐다.

“으음.”

침묵이 흐른다.

두 사람과 한 사람의 고요한 대치 속에서 장기린은 처음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와 유준 사이에 궁기가 끼어들어 있었다.

내리친 창날은 유준이 아니라 궁기가 대신 받았다.

진청룡의 창날이 궁기의 왼쪽 어깨를 가르고 갈비뼈에 닿아 있었다.

단지 육신의 상처로 끝나는가?

아니다.

다름 아닌 무쌍귀 장기린의 일격이다.

창날도 창날이지만, 거기에 실려 있는 일연적룡무의 진경은 또 어떠한가.

보통 사람이라면 내장이 곤죽이 되어 죽음에 이르렀을 상세건만, 궁기는 왼손바닥으로 창대를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창을 휘두르는 장기린의 오른손목을 붙잡았다.

얼굴을 칭칭 감은 붕대 너머로 붉은색 안광이 불길처럼 솟구쳤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맹한 빙백신기를 뿜어 댔다.

파스스슥-.

입김이 하얗게 변한다.

지독한 빙백신기가 장기린의 오른손을 얼렸다.

‘목숨까지 태우는가?’

궁기의 움직임은 동귀어진의 한 수였다.

그뿐인가?

유준의 검기가 궁기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장기린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다.

장기린은 투명한 물속에 피 한 방울이 떨어지듯.

따끔한 고통이 서서히 넓게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피부를 뚫고 근육도 갈랐다.

심장을 뚫지 않은 것이 그나마 천운이다.

“놀랍군.”

장기린은 진한 고통 속에서, 분노보다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이 이뤄 낸 성과다.

삼십 합이면 제압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이, 오랜 시간 싸움을 버텨 내더니 결국 장기린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 아닌가.

“하지만…….”

장기린은 안색이 조금 하얗게 질렸지만, 아픈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전신에 힘을 더했다.

파아아앗!

오른손을 뒤덮었던 서리가 터져 나가고, 한층 강력해진 힘으로 궁기의 몸을 내리눌렀다.

“으음!”

궁기가 처음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는 공격을 그만두고 창날을 두 손으로 잡아 버티려 했다.

끼기긱-.

허나 역부족이다.

장기린의 어깨 위로 넘실거리는 살기가 세상천지를 어둡게 물들인다.

장기린의 오른쪽 어깨 근육이 부풀었다.

팔목과 손등에 힘줄이 돋아나며 무시무시한 힘으로 궁기를 내리눌렀다.

우둑!

푸화악!

“……!”

결국 터져 나가는 상처.

궁기의 양팔이 부러졌다.

임시변통으로 막아 두었던 가슴의 상처와, 새롭게 난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쿠웅!

궁기가 무릎 꿇는다.

그뿐인가?

장기린의 참격이 낳은 여파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유준의 내부도 진탕되었다.

“쿠아악.”

유준은 다시 한 번 토혈하며 내력의 통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옥심귀일기가 흩어지면서 간신히 모양만 유지하고 있던 검기가 뚝 끊어졌다.

장기린은 상처를 왼손으로 틀어막은 채 창을 비틀었다.

쿵.

내딛는 진각.

그리고 그 상태로 뻗어 내는 일섬(一閃)!

궁기의 상체를 반쯤 잘라 낸 창날을 그대로 유준에게로 찔러 넣었다.

푸욱!

“흐읍!”

유준의 옆구리에 창날이 파고든다.

눈, 코, 입.

칠공에서 피를 토해 낸 유준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이겼군.’

장기린을 비로소 두 사람과의 대결이 끝났음을 알았다.

“막아라아아아!”

백 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절규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범인은 평범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그가 바로 유준을 보좌하는 부장 등종무였으나 장기린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슴에 새겨진 황금 문양으로 그가 간부의 직위에 있다는 것만큼을 알아챘다.

움직이기 시작한 건 등종무뿐이 아니었다.

뿌우우우---!

삐익!

유준의 부장은 또 한 사람이 있다.

뿔피리와 호각을 이리저리 불면서 깃발을 흔들어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사내.

마치 장익덕처럼 밤송이 같은 수염을 지닌 또 한 명의 흑시군 부장 두용갑이다.

“싸워라! 이곳을 벗어나게 해선 안 된다아!”

우오오오!

흑시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덤벼라아아!”

“잘 봐! 상처를 입었다! 금장께서 찌른 걸 기억해라! 약점을 파고 들어! 모조리 덤벼랏!”

우아아아-!

광기 어린 함성과 함께 수백의 흑시군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

장기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옆구리를 찔린 일이 저들에게 불필요한 용기를 준 듯했다.

‘다 베야 하나?’

몸을 돌리려는데 그의 바지 자락을 붙잡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꾸욱-.

“못…… 간다…….”

칭칭 감아 둔 붕대 너머로 푸른색 벽안(碧眼)이 보였다.

피투성이.

이미 생기는 사라져 있는 눈이다.

장기린은 궁기의 손을 냉철하게 쳐 내고 창대로 가슴을 밀었다.

기우뚱 쓰러지는 몸.

옆에선 이미 이지(理智)가 느껴지지 않는 멍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는 유준이 있었다.

궁기는 그런 유준과 몸을 겹치듯 쓰러졌다.

계속해서 꿈틀대며 움직이려 했으나, 그는 더 이상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지 못했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장기린은 잠시 숨통을 끊을지 고민했으나, 그토록 처절하게 싸웠던 그들의 모습이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장렬한 싸움.

무인의 의지를 보여 줬던 두 사람이다.

어찌 그런 자들이 쓰러져 있는데 굳이 창을 꽂을 수 있을까.

“하늘이여.”

장기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조차 구름에 가려진 새카만 하늘은 아무런 답도 해 주지 않았다.

처절하기까지 했던 두 사람의 분투는 무엇을 위해서였나.

지금 목숨을 걸고 덤벼 오는 저 흑시군은 또한 무엇을 위해 그에게 덤벼드는가.

“내가 악인이 된 것 같군.”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

전쟁터에 종군할 때부터 늘 고민하던 화두가 다시 한 번 장기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알 수 없지. 나는 내 의지를 관철할 뿐.”

장기린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근육으로 상처를 조이고, 진기를 집중해 상처의 회복을 돕는다.

차분하게 고르는 숨결.

양손으로 잡은 진청룡의 창날은 여전히 날카롭다.

번뜩이는 눈빛.

넘실거리는 살기가 천지를 가를 듯 무쌍하게 치솟는다.

장기린은 넘쳐흐르는 호연지기를 담아 큰소리로 외쳤다.

“오라. 내가 바로 붉은 악귀. 장기린이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함께 이백여 명의 병사들과 장기린의 격전은 그 순간 시작되었다.

***

강호 무림은 충격에 휩싸여 술렁였다.

단 한 사람.

무쌍귀 장기린의 출현이 천하를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으로 이어졌던 탓이다.

호사가들에게 지난 십 년 내에 무림에서 벌어졌던 가장 큰일을 뽑으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입을 모아 왕진 태감이 이끄는 흑시군의 강호행을 말할 터였다.

흑시군이 구파일방 중의 하나를 멸문시키면서 무림을 재편한 일은 그야말로 천하를 떨쳐 울리는 큰일이었으며, 황실이 강호의 일에 참견해 그곳까지 지배하려 는 야욕을 보인 첫 사건이었던 탓이다.

흑시군의 강호행 이후로 강호 무림은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각 지역에는 흑시군의 지부가 세워졌고, 사흉이라는 짐승이 풀려 나와 중요 거점들을 지배하며 무림 문파들에게 마수를 뻗쳤다.

난폭하고 부패한 세리(稅吏)가 상회를 괴롭히는 것과 같다.

툭하면 찾아와 괴롭히고, 더 많은 무공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것이다.

그런 세월이 무려 팔 년.

그 팔 년의 세월 동안 본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 불리던 명문들은 가진바 영향력을 절반 이상 잃고, 사실상 봉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들은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료를 보고도 대놓고 협행(俠行)을 할 수 없었으며, 예전처럼 대대적으로 제자를 받거나 세력을 늘리는 일 또한 할 수 없었다.

그저 무공이 좀 강한 문파.

황실에선 팔파일방과 오대세가를 그 정도의 단체로만 남겨 놓고 싶어 했던 탓이다.

흑시군은 관가에서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무소불위의 무력 집단이 되었으며, 그건 황실의 실세인 왕진 태감과 동창의 힘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그렇게 무시무시했던 흑시군이다.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귀족처럼 굴던 그들이 올해 천무공자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조금 들려오더니,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무쌍귀 장기린은 아예 대대적으로 흑시군을 격파해 버렸다.

일대 파격.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쌍귀 장기린이 예전에 몽고의 잔당들이 날뛰던 북천(北天)의 난 때에 활약한 영웅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가 대명부에서 천진으로 가는 길에 수백 명의 흑시군에 포위당했음에도, 단신으로 그들을 몰살시켰다는 소문이 퍼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