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21화 (450/686)

13권 20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13)

심지어 그 자리에는 사흉 중 최강인 궁기.

그리고 황실에서 아끼는 황금 장수 유준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강호는 열광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화려하게 빛나던 왕진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흑시군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다.

때는 왔다.

사람들은 길었던 왕진 태감의 압제가 끝나고, 드디어 강호 무림이 자유를 찾는 대변혁의 시작이라 여겼다.

객잔에 삼삼오오 모이는 사람들마다 흑시군과 장기린의 대결에 대해 떠들어 댔다.

황실이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때부터였다.

아무리 장기린의 명성이 높다 한들, 그래 봐야 일개 무인 한 사람의 움직임이다.

그 한 사람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나라를 지키는 군을 대대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는 일.

대신 왕진은 전국 각지에 퍼져 있던 흑시군의 정예를 모조리 불러 모아 천진에 주둔시켜 길목을 가로막는 강수를 두었다.

통행이 가로막히니 사람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으나 아무도 반발하지 못했다.

그렇게 벌어진 천진의 싸움.

장기린을 포위한 흑시군 정예 병력은 오백여 명.

그중에는 구파일방을 돌면서 승승장구했던 정예 갑(甲)병 일백오십 명이 모조리 포함되었다.

그뿐인가?

비록 실전 경험은 일천하지만 팔파일방에서 빼앗은 무공을 익힌 병(丙)군의 정예도 오십 명이나 있었다.

그 정도면 흑시군의 전력.

무려 강호 무림 전체를 상대하는 각오로, 황실은 장기린 한 사람을 대비해 모든 힘을 끌어모은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천진에서 벌어진 격전이 마무리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단 하루.

오시(午時) 경에 시작해 달이 지고 해가 뜰 때까지 지속된 싸움은 불과 하룻밤 만에 마무리되었다.

흑시군의 갑병 일백오십 중에 일백 명이 죽었다.

병군 오십 명은 자신들의 무공을 믿고 덤볐다가 모두 팔이 하나 잘리는 것 이상의 중상을 입었다.

천진에서 흐르는 강을 붉게 물들일 정도의 격전이었다.

그나마 전멸이 아닌 것은, 도중에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는 판단이 들어 대부분이 도주한 덕분이었다.

전장에서 절세 고수의 위력이란 그와 같다.

숫자가 아무리 많아 봐야 절세 고수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없는 일.

궁기와 유준이 쓰러진 지금, 장기린을 상대할 자는 황실에 아무도 없었다.

묵묵히 행보를 이어 가는 장기린이다.

바로 다음 날.

마침내 북경의 성벽에 장기린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북경이 북경이라 불린 것은 기실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원나라가 있을 때는 연경이라 불렸고, 영락제 주체가 집권할 때쯤에야 비로소 북경이라 불리며 대명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북경은 구조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구국의 영웅인 서달이 북경 북부의 문 두 개를 폐쇄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계속해서 남쪽에 성벽을 더 쌓고 있기도 했다.

어디로 보나 새로 지은 티가 나는 북경의 남쪽 성벽 위.

검은 옷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성벽 너머 남쪽 평야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해가 되질 않아.”

백설지는 검은색 무복에 검은색 장포를 입고 검은색 수투를 손에 낀 채 검은색 죽립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는 감춰지지 않았으나, 그래도 키가 큰 편이라 주변에서 여자라고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백설지는 단단한 성벽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린 채 지평선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왕진이 직접 건네준 황금색 용 문양 장식이 어스름한 노을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또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냐?”

그녀의 곁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서 있던 남자.

백설지와 똑같은 옷차림이었으나 키가 작고 허리가 구부정한 탓에 옷태가 나질 않는 사람이다.

옛 도철의 부관.

곽도엽은 백설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불쾌한 말투로 되물었다.

“뭐가 이해가 안 되는데?”

“몰라?”

“그러니까 뭐를?”

곽도엽은 백설지와 똑같은 모양의 죽립을 제대로 쓰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마가 넓고 툭 튀어나온 탓일까.

죽립의 중심이 도무지 맞지를 않는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해?”

백설지는 검지를 들어 자신이 밟고 있는 성벽을 가리켰다.

“여기? 성벽? 우리가 왜 성벽에 있어야 하냐고?”

“그래. 성벽.”

“그야 위험천만한 고수가 태감을 노리고 오고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냐.”

“그 말이 이상하지 않냐는 말이야. 자꾸 모르는 척할 거야?”

백설지가 곽도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죽립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곽도엽은 그녀의 서늘한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북방에서 와서 중원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말투나 억양도 거세지만……. 머리가 둔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관습에 길들여지지 않은 만큼 더욱 냉철하게 상황을 직시할 때도 많았다.

“……이상하긴 하지.”

곽도엽은 결국 혀를 차면서 인정했다.

“그럴 줄 알았어.”

백설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상한 거 맞지?”

“태감께선 요즘 조금…… 어……. 그러니까…….”

“미친 걸까?”

백설지의 말은 과할 정도로 직설적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천자(天子)가 있고, 황족이 있으며, 고관대작들이 즐비한 황실 근처에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말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미친 계집애가……!”

곽도엽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쌍욕을 내뱉었다.

“너야말로 미친 거 아니냐? 북경에서 자꾸 그딴 말투로 말할 거야? 거열(車裂)형에 당해서 죽고 싶어?”

“사실이잖아. 그리고 왕 태감은 이런 걸로 날 죽이지 않아.”

백설지는 이제 황실에 몇 명 남지 않은 신수가 될 존재다.

그녀는 왕진에게 있어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여우 같은 계집 같으니. 순진한 척 다 하면서 약삭빠르긴. 이래서 북방 오랑캐 년은 안 되는 거다.”

“너 입이 너무 더러워.”

“입이 더러운 건 너야. 할 말 안 할 말 못 가리잖냐.”

“나랑 너는 다르지. 부관하기 싫어? 죽을래?”

“끄응.”

곽도엽은 신음을 흘렸다.

무산학관 때의 자존심 때문에 굽히지 않고 있지만, 백설지가 위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이야 그렇겠지만, 나중에 살생부에 일순위로 올라갈 수는 있겠지.”

그나마 투덜거리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네 말대로라면 왕진 태감은 미친 데다가 소인배인데?”

“내가 언제……!”

곽도엽은 혈압이 올라가 쓰러질 것 같은 심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는 야망이 큰 사내다.

출세를 위해 상사의 험담을 최대한 자제할 줄 아는 사내였다.

“태감께선 우리……와는 생각이 다르시다. 대인이시다. 우리가 간섭할 일이 아니야.”

“충신인 척하는 거야?”

“뭐? 당연히 난 충신이다. 태어날 때부터 충신이었고, 지금도 충신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하하핫!”

곽도엽은 주변에 못 들은 척하면서 묵묵히 서 있는 흑시군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괜히 버럭 소리쳤다.

“나 곽도엽은 천고의 충신이 될 것이야! 남아로 태어나 주군에게 딴 맘을 품겠는가!”

“그래. 너 충신해.”

“나 참…….”

“그래도 이상한 것 맞잖아. 호위를 위해서면 내가 태감 곁에 있어야지. 지금 황실에 태감을 호위할 만한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어? 무서운 사람이 온다며? 유준도 궁기……도 나가 있는데. 아니면 그 사람들을 도로 불러서 곁에 두든가.”

“…….”

“안 그래?”

곽도엽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골똘히 고민에 잠겨 있다.

백설지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어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 전술적인 목적이 있으시겠지.”

“어떤 목적?”

“…….”

“피할 거면 아예 도망치고 훗날을 도모하든가. 아니면 정식으로 일을 공론화시켜서 북경의 모두가 힘을 합쳐서 싸우든가?”

백설지는 답답하다는 듯이 먼 하늘을 바라봤다.

“이해가 안 돼. 북해의 사고방식과 안 맞아.”

“으음…….”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최고의 전력을 굳이 떨어뜨려 놓다니. 게다가 오늘부터 성벽을 지키라고? 이해가 안 가잖아.”

“……너는.”

곽도엽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할 거냐?”

“일이 잘못된다는 게 무슨 소리야?”

“네 목적 말이다. 애초에 무산학관에 들어오고, 왕진 태감께 조력을 부탁하게 만든……. 그 목적이 사라지면 너는…….”

“쉿.”

곽도엽이 드물게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는데 백설지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뭐야, 왜……?”

“조용히 해.”

한순간에 그녀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냉철한 분위기.

농담처럼 가볍게 대화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성벽에서 발을 내렸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입을 꾹 다물고 정면을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잔뜩 예민해져서 사방을 경계하는 살쾡이 같았다.

“적이냐?”

곽도엽 또한 진지한 모습으로 그녀의 곁에서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자금성 남쪽에는 입구가 하나뿐이다.

대명문(大明門).

황제가 다니는 길인 대명문이 있고, 거기서 길게 이어진 협로를 따라가면 신하들이 드나드는 장안좌문(長安左門)과 장안우문(長安右門)이 나온다.

그리고 하늘을 받드는 문, 승천문(承天門)이라는 관문을 지나야 비로소 북경 내부, 자금성에 들어갈 수 있다.

백설지와 흑시군이 있는 곳이 바로 대명문에서 이어지는 지은 지 얼마 안 된 성벽 위였다.

“우리 매복이 어디에 있지?”

“삼십 장 앞. 거기서부터는 오장마다 한 조씩.”

“다 불러들여.”

“뭐?”

“어서!”

곽도엽은 옆에 준비되어 있던 세 가지 색의 깃발 중에 노란색 깃발을 흔들었다.

그 깃발을 본 자들부터 매복을 풀고 성벽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설지의 판단은 옳았다.

다만,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돌아오는 속도는 지금 북경을 향해 다가오는 사신(死神)보다 너무나 느렸다.

“저자다……!”

곽도엽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삐딱하게 기울어진 죽립 너머로 두 눈을 부릅떴다.

시력이 좋은 백설지보다는 늦었지만, 비로소 곽도엽도 ‘그’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곽도엽은 도철의 부관이던 시절, 대천문 혈사 때 장기린을 본 적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장기린의 기파.

기세.

분위기.

그런 것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심지어 세월이 흐르면서 존재감이 더더욱 강해진 바.

한눈에 알아봤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저자는 누구야……?”

백설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냉철하고 꼿꼿했던.

왕진을 향해서도 막말을 내뱉던 배포 큰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그녀의 동요는 조금도 감춰지지 않았다.

손끝이 떨린다.

쭉 펴고 있던 허리가 굽었다. 그녀는 어깨가 움츠려드는 것을 애써 버티고 있었다.

터벅, 터벅.

텅 빈 대로의 끝에서 한 사내가 말을 타고 다가온다.

오른손에 든 거대한 창을 편안하게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은 마치 관운장의 화신 같았다.

본래는 평범했을 삼베옷은 온통 시커먼 피로 얼룩져 있었다.

딱히 이쪽을 쳐다보지도, 살기를 뿜어내지도 않는데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말이 발굽을 땅에 디디며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백설지를 포함한 모두가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무쌍귀…… 장기린……!”

죽립을 벗어 버린 곽도엽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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