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21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14)
“무쌍귀? 장기린?”
백설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 이름을 되새겼다.
“도대체…….”
그녀는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에 압도되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얼마나 많이 죽인 거야……?”
집혼기를 지니고, 혼백을 모아 신수가 되어 가는 그녀이기에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보이는 게 있다.
지금 이 순간 장기린의 어깨 너머로 넘실거리는 기파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그리고 그의 몸에 숨어 있는 ‘혼백의 힘’이 얼마나 큰지,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곳에는 거대한 악귀가 있었다.
“십만……? 백만……? 얼마나 죽여야 저렇게 되지?”
마치 산골의 자그마한 개울만 보던 산천어가 수평선의 끝이 보이지 않는 황하 대강을 본 것과 같다.
어마어마한 격차는 전의를 꺾어 버린다.
자연에 대한, 신에 대한 무한한 경의만 생길 뿐이다.
북해빙궁의 소공녀 백설지.
그녀는 본디 용감한 성품을 지녔으나, 그녀의 인지적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장기린의 살기와 패력은 그 용기를 꺾어 버렸다.
“하아…… 하아…….”
숨이 가빠진다.
과호흡 증상이 그녀를 옭아맸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린 채 주춤주춤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눈빛이 흔들리고 손끝도 떨렸다.
심마(心魔)다.
의지가 약해지자 북해빙궁의 빙백신공이 야생마처럼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녀는 어린 소녀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피이이잉---!
오십 장 거리 앞.
미처 성벽의 신호를 보지 못한 매복 제일조가 무지하게도 장기린을 향해 활을 쏘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아, 안 돼!”
백설지의 말은 공허했다.
푸화아아악-!
“……!”
그에 대한 장기린의 반응은 단순했다.
그는 달려드는 병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손목을 한 번 뒤집었을 뿐.
그것만으로도 진청룡 창날이 사선으로 치솟았다. 달려들던 병사는 상체가 비스듬히 갈라진 채 멍하니 서 있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이어 따라서 튀어나온 매복조 나머지 두 명도 그와 똑같은 꼴을 당했다.
피가 뿜어지고 육편이 튀어 올랐다.
활을 쏜 자.
그자만큼은 무사했다.
한순간에 벌어진 살육에 넋이 나간 듯 굳어 있으니 장기린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말과 함께 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 태연함에.
그 무심한 잔혹함에.
땅을 적시는 핏물만큼, 모두의 마음속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아아……!”
성벽 위의 모두가 신음만 흘렸다.
지금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흑시군의 정예 병사가 일초지적조차 안 된다.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사람을 죽이며 다가오는 저자는 정녕 살아 있는 사람이 맞는가?
“큰일이다……! 진짜로 못 막았어……!”
곁에 있던 곽도엽이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백설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야. 야.”
“……왜?”
“싸우러 가선 안 된다. 무조건 금의위도 끌어들여서 싸워라. 알았어? 명심해. 넌 상대가 안 돼.”
“금의위?”
백설지는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그걸로 돼?”
대답은 없었다.
궁여지책일 뿐, 금의위를 끌어들여 봤자 안 된다는 것을 곽도엽은 잘 알고 있었다.
터벅, 터벅.
점점 대명문을 향해 다가오던 그는 오 장(丈) 거리를 남겨 놓고 비로소 말에서 내렸다.
이미 대명문의 앞에는 난리가 나 있었다.
대명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금의위들은 정해진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완전 무장을 한 채 창을 세우고 방패를 들어 올렸으며, 성벽 위에 빼곡히 궁병을 배치했다.
마치 대규모 적병이 쳐들어온 듯한 반응이었다.
여기저기서 호각을 불고, 타종을 치면서 순식간에 북경 전체가 시끄러워진 듯했다.
장기린은 대명문을 한 번 힐끔 쳐다본 뒤, 그 다음엔 성벽 위에 있는 백설지를 응시했다.
“……!”
백설지는 숨이 덜컥 멎었다.
그녀는 죽립을 쓰고 있었으나 자그마한 대나무 쪼가리들이 장기린의 시선을 막아 주지 못함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깊고 어두운 감정을 띈, 살육을 숨 쉬듯 쉽게 생각하는 사신과 눈이 마주쳤다.
“어?”
그 순간, 시야에서 장기린이 사라졌다.
“어어……?”
의아함은 잠시.
곧이어 벼락을 맞은 듯한 전율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죽립이 흔들리고 그녀의 무복이 펄럭- 움직였다.
텅.
뭔가가 성벽을 두드린 듯 발밑이 가볍게 한 번 흔들렸다.
“아……!”
황급히 몸을 돌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움츠린 어깨.
살짝 드러난 뽀얀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에 ‘그’가 있다.
피투성이 베옷을 입고 한 자루 창을 비스듬히 옆으로 비껴 든 남자.
머리는 아무렇게나 하나로 질끈 묶었고 그리 길지 않은 수염 위에는 피가 굳은 것인지 때가 뭉친 것인지 모를 검은색 가루가 잔뜩 묻어 있다.
폐인 같은 몰골이다.
하지만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든 본능적으로 안다.
눈앞에 있는 자가 그의 먹잇감인지, 아니면 그를 잡아먹을 포식자인지 말이다.
터벅, 터벅.
멈춰 있던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앞.
정면이다.
백설지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놀랐다는 말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녀를 포함해 성벽 위에 있던 전원, 곽도엽과 흑시군 삼십 명은 그야말로 심장이 멎어 버린 것처럼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굳어 있었다.
“어어…….”
‘어떻게 여기로 올라왔지?’
백설지는 따져서 묻고 싶었으나 혀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
산공독을 먹고 마비 풀까지 씹으면 이런 느낌일까?
그녀는 붕어처럼 입술만 벙긋거렸다.
궁금한 건 많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고, 그 후에 성벽에 도달할 때까지 그녀는 장기린의 움직임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아무리 그가 강한 무인이라도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 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신선처럼 축지법이라도 사용한 것일까?
“흡…….”
백설지는 결국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헛바람을 들이키면서 주춤 뒤로 물러났다.
덜덜 떨리는 손은 그녀의 의지를 배반했다.
‘왜 이래? 싸워야지. 내가 아니면 누가 막아? 그런데 어째서 힘이…… 들어가질 않는 거야……?’
조금 전 곽도엽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명심해. 넌 상대가 안 돼.”
그렇다. 상대가 안 된다.
사흉 중 일익인 도철한테도.
북해빙궁 역사상 최고의 기재이자, 이제는 신수의 힘을 얻어 막강한 능력을 지닌 궁기에게도 느껴 본 적 없었던 짙은 패배감이 그녀를 덮쳤다.
공황상태에 빠진 그녀는 장기린과 눈이 마주쳤다.
살육과 냉철함을 한데 뭉쳐 사람으로 만든 것 같은 인물이다.
장기린은 눈빛으로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싸울 건가?’
백설지는 이를 악물었다.
“하아…… 하아…… 흐읍!”
또다시 시작된 과호흡을 애써 기합으로 중지시킨다.
장기린의 가슴 한가운데서 이글거리는 악귀의 힘도 최대한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신수의 힘을 끌어 올렸다.
“용……생……!”
움찔.
발악하듯 내뱉은 말에 그녀의 단전과 가슴에 걸고 있던 집혼기가 반응했다.
단번에 치솟는 빙백신기.
그녀가 내뱉는 숨결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가슴 가득 호연지기가 차오르고, 그녀의 양손에 붉은색 강기가 용의 비늘처럼 유형화된다.
그녀는 손에 끼고 있던 수투를 벗어 던졌다.
그녀의 온 신경이 오로지 눈앞에 있는 장기린에게 집중했다.
스윽-.
돌아가는 시선.
장기린의 두 눈이 차가워졌다.
싸움을 직전에 둔 순간.
백설지는 자신의 한쪽 팔이 갑자기 뒤로 확- 쏠리는 것을 느꼈다.
“어?”
확- 하고 불길이 타오르듯 거센 기세로 뛰쳐나온 곽도엽이 백설지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성벽 밖으로 뛰어내렸다.
“멈춰!”
백설지는 무인이다.
균형 감각도 탁월했고, 근력만 쓰더라도 곽도엽 정도는 한 손에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온 신경을 장기린에게 쏟은 대가였다.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그녀는 성벽 너머로 떨어지면서 두 눈에 보이는 모든 광경을 기억 속에 새겨 넣었다.
천천히.
장기린의 모습이 멀어진다.
그는 이채를 띈 눈으로 곽도엽과 백설지를 힐끗 보더니, 그 후로는 곧바로 관심을 끊고 몸을 돌렸다.
그는 이제 왕진에게로 향할 것이다.
주변에 그의 앞을 막아서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성벽.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그녀의 눈에 장기린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퍽.
떡메를 치듯 둔중한 소리와 함께 피가 튀어 오른다.
왕진은 자신의 입술 근처에 묻은 핏방울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항상 그랬듯 웃는 얼굴을 연기하고 있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귀한 도자기인데.”
왕진은 그의 곁에 있던 도자기에 묻은 피도 옷자락으로 닦아 냈다.
황실의 심처.
이곳에 있는 물건 중에 어디 범상한 것이 있던가.
모두 밖에 나가면 부르는 게 값일 귀한 진상품들 천지다.
그런 곳에 피가 묻다니.
천하에 이보다 더 불경한 일이 또 있을까.
“하아. 후우. 천한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의 아들이라 천자라 불리는 자.
대명제국의 지배자.
정통제 주기진은 황궁의 궁녀 한 명을 피투성이로 만들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숨을 씨근거렸다.
들소 같은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폐하, 고정하시지요.”
“태감. 태감도 봤잖아? 얘가 얼마나 무례했는지 말이야. 황궁의 궁녀라는 게 내가 이 시간에 뭘 먹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렇지요. 백 번 천 번 그 궁녀의 잘못이지요.”
“그렇지?”
“황궁의 궁녀라면 폐하에 대해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알아야 하거늘.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교육을 다시 시키도록 하겠나이다.”
“그래. 그렇게 해.”
주기진은 역시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태감뿐이라면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환관이 따라 주는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절한 궁녀는 근처에 있던 환관들이 눈치를 보다 왕진이 손짓을 하자 서둘러 데리고 나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왕진은 문득 그가 황사로서 주기진을 가르치던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주기진이 아직 황태자였던 시절, 자그마한 앵무새를 맨손으로 직접 짓이겨 죽였으면서도 그게 들키자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던 일이다.
그는 잔인했다.
하지만 영민하기도 했다.
호기심으로 앵무새를 죽였지만, 그걸 동생 탓으로 치밀하게 누명을 씌울 만큼 머리가 민활했다.
‘그때 혼을 냈어야 했나?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지만…….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드는군.’
왕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주기진은 특이한 인재였다.
군주로서 좋은 재질을 갖췄냐고 한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홍건적 출신인 태조 주원장과 철혈의 군주였던 영락제의 피는 주기진에게 좋은 것만이 아니라 나쁜 것도 물려주었다.
머리가 민활하고 체격이 건장한 것은 군주의 미덕이었으나, 자비가 없고 잔인한 것은 지금 같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큰 흠이 되었다.
“폐하.”
왕진은 깊이 읍소하며 말했다.
“이제는 덕을 갖추고 예를 보이셔야 합니다. 성군이 되어 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성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황금 장수가 생겼습니다. 유준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는 더 많은 장수가 생길 테니, 이제는 삼국시대의 유비 현덕처럼 만인의 사랑을 받는 성군이 되어 보는 건 어떨런지요?”
“으음, 그래? 그럼 앞으로 사람들에게 좀 더 아량을 베풀까?”
“예. 그러시면 반드시 모든 이가 폐하를 우러러보고 칭송할 것입니다.”
“그것도 좋겠네.”
주기진은 호탕하게 웃었다. 왕진은 그런 주기진의 뒷모습을 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왕진.”
왕진은 그를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인적이 드문 황실의 심처.
과거의 기억을 더듬던 그의 앞에 어느새 한 사람이 나타나 있었다.
허름한 옷.
한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창.
그가 온몸에서 물씬 풍기는 피 냄새는 재밌게도 주기진을 떠올리며 느꼈던 피 냄새와 똑같았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
붉은 악귀.
장기린은 왕진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