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23화 (452/686)

13권 22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15)

“왔군요.”

왕진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장기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각 내부를 둥그렇게 둘러싼 촛불들이 안을 어스름하게 밝히고 있었다.

특히 왕진의 앞에 놓인 화로에서는 작은 숯들이 발갛게 타올랐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면……. 그때의 그 약속 말인가요? 약조를 지키지 않으면, 그때와 다른 모습의 ‘장기린’을 보여 주겠다던?”

장기린은 침묵을 지킨 채 과거 무산학관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몰래 소호와 접촉했던 왕진.

그는 장기린을 만났을 때 뻔뻔할 정도로 당당히 약조했었다.

“경고하겠다. 나와 내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때는 네가 어디에 숨든 지금과 다른 모습의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명심하죠. 그리고 약조합니다. 난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어요.”

장기린은 가슴속의 분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껏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해 왔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다 부수며 이곳까지 온 건 그저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을 뿐.

화를 내는 건, 지금부터였다.

“나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

“무엇을 후회하나요?”

“그때 너를 죽였어야 하는 것을. 주변에 휘둘려서 그때 내 예감을 무시해 버렸어.”

고오오-.

어스름한 방 안.

장기린의 두 눈이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마력을 발했다.

“섭섭한 말이군요. 난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어요. 약조는 지켰습니다.”

“헛소리.”

장기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너는 내 아들을 건드렸다.”

“건드렸다니요? 글쎄요. 만나서 대화는 몇 번 했습니다만.”

“넌 소호를 꾀어내서 신수가 되도록 집혼기를 건네주었지. 결국 그 때문에 내 아들이 귀기(鬼氣)에 잡아먹혔다. 그게 해를 끼친 것이 아니란 말인가?”

“후훗, 몇 가지 지적하자면 말이죠.”

왕진은 장기린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모닥불처럼 탁탁- 불꽃을 튀기는 화로 앞에서 태연하게 웃음을 지었다.

“첫째, 집혼기는 당신과 약조하기 전에 주었어요. 내가 무산학관에 갔던 그날, 하나의 신분패와 함께 건네주었죠. 쓸지 안 쓸지는 본인의 선택에 맡겼던 건데 결국 썼네요. 소호의 판단이었다고요.”

왕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소호가 천무공자라고 불리는 것도 사실은 내 덕이 오 할 이상이죠. 그날 내가 주었던 은룡패를 활용해서 황실의 비처(秘處)들을 헤집고 다녔거든요. 그뿐인가? 집혼기를 이용해서 무시무시하게 강해지더니, 이젠 흑시군도 집어삼켰어요. 낼름. 어때요. 효웅이 따로 없죠?”

왕진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나 같은 호구가 어디에 있나요. 그토록 방해받고 두드려 맞고 빼앗겨도 단 한 번도 반격하지 못했어요. 아아, 내 사흉의 짐승들. 도철과 도올을 모두 잃다니. 이 얼마나 큰 타격이!”

왕진은 경극 배우처럼 과장된 어투로 팔을 뻗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토록 큰 타격을 받는 와중에도 반격을 안 했으니, 당신은 오히려 날 칭찬해야 합니다. 기린.”

“후.”

장기린은 북방의 만년설보다도 더 차가운 눈빛으로 왕진을 노려보았다.

“그런 헛소리를…….”

“당신이 화를 내야 할 것은!”

왕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섬뜩한 웃음.

광기 어린 눈빛으로 깔깔대며 웃는다.

“아비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무산학관에 방치한 당신 대신에, 내가 소호를 천무공자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명제국 황제 폐하의 스승이자, 사례감 태감인 바로 나 왕진이! 소호를 완성시켰어요!”

왕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복마전 같은 황실의 실세로 등극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일들을 처리하며 얼마나 많은 자들을 만났던가.

능구렁이 같은 고관대작들.

조금의 틈만 보여도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유림의 젊은 학자들.

그런 자들에 비하면 장기린은 맑디맑은 개울물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지경이다.

“둘째, 소호가 가장 쓰러뜨리고, 짓밟고 일어서고 싶어 한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바로 그대예요. 기린. 소호가 생각하는 가장 큰 대적은 바로 당신이랍니다.”

“…….”

“후훗, 날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싶다고 말해요. 다만 부모 노릇을 제대로 못한 걸 괜히 나에게 덮어씌우지 말아요. 난 소호가 바라는 대로 당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했을 뿐. 약조를 깨고 해를 끼친 적은 없으니까.”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왕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어 하는 아들을 도와줬을 뿐이다?

일부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소호가 장기린을 넘어서고 싶었던 건 정말일 것이다.

다만.

“그 뒤에 네 속셈이 없었다면 말이겠지.”

왕진을 징죄하겠다는 장기린의 결심은 확고했다.

한 걸음 내딛는 장기린.

그 안에 그림자처럼 깔려 있는 냉철한 살기가 섬뜩하게 드러났다.

“후훗.”

왕진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으나, 여전히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안 되는군요. 말로 설득하긴 힘들겠어요.”

왕진이 갑자기 화로 앞의 무언가를 발로 밟는 순간이었다.

촤르르륵-.

“……!”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에서도 끝에 철추가 달린 쇠사슬이 튀어나왔다.

‘기관?’

놀람은 잠시.

장기린은 과거에도 똑같은 형태의 기관을 겪었던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과연.”

비 온 뒤의 풀잎 냄새처럼, 쇠사슬에 대해 무심코 떠오른 기억이 과거의 일들을 줄줄이 끄집어냈다.

촤르르륵-.

쇠사슬은 장기린의 양팔과 몸통을 칭칭 감아 왔다.

순식간에 장기린의 몸을 칭칭 휘감더니 서로 간에 엉키면서 한층 더 견고하게 그를 구속했다.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장기린은 쇠사슬에 칭칭 감겼음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신수 계획을 하면서 다른 것도 들은 모양이군.”

“후훗, 맞아요.”

“이런 걸로…….”

장기린은 한 걸음을 내디디며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일렁거리며 치솟는 기파.

그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쇠사슬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날 구속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뇨.”

왕진은 눈을 빛냈다.

그는 장기린이 쇠사슬에 묶였던 그 틈에 소매에서 꺼낸 향낭을 화로에 던져 넣은 상태였다.

치이익-.

비단 향낭이 타면서 묘한 향기를 피워 올렸다.

양귀비꽃을 진액이 나올 만큼 졸인 다음에 향으로 만들면 이런 냄새지 않을까 싶었다.

장기린은 미간을 좁히며 숨을 잠시 멈췄다.

콧속으로 들어와 머릿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끈적끈적하고 향긋한 향기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주변이 갑자기 훤해졌다.

창밖으로 횃불을 든 일단의 무리가 머리를 내밀었다.

-옴마니반메흠.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천축에서 넘어온 듯한 범어(梵語)와 기묘한 주술어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화르륵-.

향낭을 태우고 난 화로에서 갑자기 불길이 더욱 강해졌다.

우우웅-.

발밑이 떨린다.

장기린은 그가 발을 딛고 있던 나무 바닥이 온통 기묘한 글자들로 음각되어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대명제국의 지존이신 황제 폐하를 대신해 명령을 내리겠다. 신수 기린이여. 이 옥새를 보고 내 명에 따르라!”

왕진이 황금과 옥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을 발밑에서 들어 올렸다.

성인 남성이 양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묵직한 크기의 도장이었다.

위에 조각된 황금으로 된 용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살아서 날아오를 것처럼 섬세했다.

“명을 따르라! 황실의 신수 기린이여! 당장 무릎을 꿇고 명을 따르라! 내 너를 황실을 위해 쓸 것이다!”

왕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의 두 눈이 기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부릅뜬 두 눈에서 광기와 절박함이 공존했다.

“무릎을! 꿇어라!”

창룡 같은 외침에는 강렬한 기백이 담겨 있다.

과연 왕진이라는 감탄이 나왔다.

사람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항상 보이는 경극 배우같이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화장이 다인 사람은 아닌 것이다.

‘과연, 너도 사활을 건 것인가.’

황실의 옥새를 들고 오다니.

아무리 왕진이라도 해도 이 일이 드러난다면 역적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을 과감한 행위다.

“으음.”

장기린은 고통을 느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커다란 말벌 한 마리가 머릿속으로 들어와 헤집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슴 속에 박혀 있던 집혼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묘하게 웅웅대며 떨리더니 그가 이십 년간 익혀 온 청명경 진기들을 모조리 흩어 놓았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핏물을 애써 삼킨다.

장기린은 근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목숨의 위기를 느꼈다.

심신(心身)을 모두 공격하는 한 수.

놀랍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어라!

―황실의 신수 기린! 명을 받들라!

머릿속에서 기이한 말이 들렸다.

선택이 아닌 강제.

그의 몸이 저절로 무릎을 꿇으려 하는 것을 강한 의지로 막아 세웠다.

명령을 거스른 대가는 참혹했다.

전신에 몰아치는 고통은 범인이 견뎌 낼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초월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다르다.’

장기린은 이를 악물었다.

삼십 년.

삼십 년이다.

지금의 그는 막 신수가 되어 어설프던 홍안의 소년이 아니며, 힘을 쓸 줄 몰라 살기만 뿜어 대던 전장의 붉은 악귀도 아니었다.

은자촌의 촌장.

그리고.

풍운객잔의 주인.

검선의 가르침을 받아 청명경 일만 자(字)를 심결에 새겨 넣은 선도(仙道)에 발을 디딘 자.

백회혈에 찔러 넣은 장침 따위에 극복할 성싶은가.

“이런 게……. 남아 있었군.”

장기린은 잠시 휘청거렸으나, 곧바로 균형을 되찾았다.

눈, 코, 입, 귀.

장기린의 몸에 난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우우웅-.

그의 온몸에서 막강한 기파가 일렁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울컥 토해 낸 피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장기린의 어깨가 떨렸다.

“그런가…….”

장기린은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눈에서조차 피를 흘리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꿈에 나올까 무서운 붉은 악귀의 모습이다.

“무슨……?”

그렇지만 왕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허망하게 되물었다.

그의 눈빛이 떨렸다.

당황.

공포.

절망.

그 모든 감정이 왕진의 두 눈에서 섞여서 휘몰아쳤다.

“고맙다고 해야겠군.”

장기린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백회혈에서 튀어나온 우모(牛毛)만 한 금침을 손으로 잡고 뽑아냈다.

“쿨럭.”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그런데 피를 토할수록 장기린의 눈빛은 점점 맑아졌다.

“늘 신경이 쓰였었다. 무공이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내 몸에 남은 과거의 잔재가 선명히 느껴져 그것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찾을 방도가 없었다.”

장기린은 소맷자락으로 자신의 얼굴에 남은 핏자국을 훔쳤다.

“그런데 오늘 찾아서 뽑아내는군.”

무려 삼십 년 가까이 꽂혀 있던 침을 드디어 뽑아낸 것이다.

장기린은 맑고 강렬한 기파를 뿜으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진청룡을 벽면을 향해 내던졌다.

꽈아아아앙!

“끄아악!”

벽이 터져 나가고 선혈이 튀어 올랐다.

이기어검에 강기가 조합된 일격이었다.

횃불을 든 채 귀에 거슬리는 주문을 외워 대던 모산파의 술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우우웅-.

장기린이 손을 뻗자 자신의 의무를 마친 진청룡이 다시 그의 손으로 날아서 돌아왔다.

꽈아아앙-!

장기린은 다시 한 번 창을 던졌고, 이번엔 반대쪽 벽면이 터져 나가면서 또 한 번 선혈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럴 수가……. 주술과 세뇌조차 이겨 낸 것인가……? 놀랍군요. 정말로. 놀라워…….”

왕진은 분칠로도 감출 수 없을 만큼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훅-.

화로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갑자기 물을 끼얹은 것처럼 꺼져 버렸다.

주술은 끝났다.

그의 안배는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후훗, 후후후훗.”

갑자기 왕진은 웃기 시작했다.

장기린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손만 뻗으면 왕진의 목이 닿는 거리다.

장기린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왕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처마 위에 깃발을 걸어 두었더군. 은자지종(隱者之終)이라고.”

“……명필이지요? 제가 직접 썼답니다.”

“나는 네가 도망갈 줄 알았다.”

“후후훗, 황실 사례감의 태감인 나 왕진은 도망치지 않아요.”

“그런가. 각오를 하고 나왔던가.”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뎅- 뎅- 뎅-.

북경 전체.

그리고 황실의 성벽 근처에서 계속해서 비상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남길 말은?”

“신수가 마지막 남은 주인의 사슬마저 풀었으니……. 그 끝은 자유일지, 아니면 사냥당해 죽는 비참한 말로일지……. 궁금하군요. 직접 보고 가지 못하는 것이 한입니다.”

“…….”

“제가 깃발에 쓴 대로입니다. 은자지종! 당신은 결국 밖으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황실로 돌아오세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주기진 폐하의 신수로서 무림 강호를 재편하고 명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도록 도우세요. 그렇지 않으면…….”

“않으면?”

“당신의 아들. 소호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에요.”

은자지종.

은자로서 살던 삶의 끝.

“그런가.”

왕진은 절박했으나 당당했다.

끝까지 소호를 인질 삼아서라도 살고자 하는 마음을 높이 평해야 할는지.

“잘 알겠다.”

장기린은 창을 휘둘렀다.

푹.

왕진의 가슴을 파고든 창날이 심장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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