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23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16)
“흡……!”
왕진은 크게 눈을 뜨며 헛숨을 들이켰다.
살짝 벌린 입.
멍하니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창을 바라보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왕진은 죽어 가는 와중에도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괜찮다……. 시대는…… 변했으니……. 신수는…… 이미…….”
쿨럭.
호흡 대신 피를 토해 내는 왕진이 마지막으로 보는 광경은 무엇이었을까.
슥-.
장기린은 창을 뽑았다.
울컥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장기린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나의 은원은 이걸로 끝내겠다.”
“후후훗…….”
왕진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늘은…… 어디에 있는가?”
왕진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황실의 대망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하늘을 열망하였다.
“혈향이 나는군……. 폐하, 성군이 되셔야 합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하얗게 분칠한 얼굴이 생기를 잃고 딱딱하게 굳어 간다.
눈가에 감춰져 있던 세월의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환관으로서의 한 많은 삶.
모든 역경을 이겨 내고 황실의 실세 자리를 손에 넣은 자.
왕진.
그가 장기린을 손에 넣으려 하지만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
그는 황실의 편에서 강호 무림을 재편한 영웅으로 평가될까.
아니면 황제를 쥐락펴락하며 국정을 농단한 간신이라 평가될 것인가.
쿵.
왕진의 몸이 힘을 잃더니 무릎을 꿇고 비스듬히 쓰러졌다.
호흡을 멈춘 육신.
멍하니 초점을 잃은 두 눈이 공허하게 천장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장기린은 과거에 들은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정체성.
신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너는 기린(麒麟)이다. 앞으로 명 제국의 국운을 좌우할 길조(吉兆)이자 흉조(凶兆)가 되리라.”
“……삼백육십 종 모든 짐승들의 왕. 천년의 세월을 살고, 너를 보면 길조, 너의 시체를 보면 흉조다. 모든 신수들 중에 유일하게 제 짝이 있어 한 쌍이 하나가 되는 자.”
“네 말이 맞다, 왕진. 황실의 신수가 사슬을 풀어냈다고 했지.”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직접 보지 못해 아쉽겠군. 나는 명 제국의 길조도 흉조도 아니다. 이제 나는 남이 채워 놓은 사슬 아래에서 살지 않는다. 내 아들도…… 그리 될 것이다.”
죽어 혼백이 된 왕진에게 하는 선언이자 장기린 스스로에게 말하는 다짐이었다.
장기린은 창날에 남은 피를 털어낸 뒤 냉철하게 몸을 돌렸다.
아버지로서의 복수는 끝났다.
이제는, 뒷수습만이 남아 있을 뿐.
박살 낸 벽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몸의 일부가 사라진 모산파 도인들의 시신이 다섯 구나 널브러져 있었다.
진한 피 냄새와 주술에 쓰이는 향 냄새가 독하게 코를 자극했다.
장기린은 시신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서진 나무 파편들을 밟으며 움직였다.
“끄으…….”
억눌린 신음이 들려온다.
시신이라 생각했던 자들 중에 목숨이 남아 있는 자도 있는 모양이었다.
장기린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모산파 도사들의 시신을 넘어 건물 밖으로 나서자 이미 자금성 내부는 난리가 나 있었다.
데엥- 데엥- 데엥-.
시끄럽게 울리는 경종.
호각 소리가 정신없이 들려오고, 발걸음을 맞춘 병사들이 일제히 열을 맞춰 장기린에게로 다가왔다.
“여기다!”
“무기를 들고 있다! 일단 무릎 꿇려!”
“거기 너! 무기를 내려놓아라!”
장기린은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싸는 금의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사람의 몸만큼 커다란 사각 방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대도를 들고 있었다.
쿵! 쿵!
금의위들은 오만했으나 홀로 자금성에 쳐들어온 침입자를 경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패를 땅에 세워서 하나의 벽을 만들어 냈다.
뒷줄에 있던 금의위들이 창을 겨누고, 일부는 검을 뽑은 채 장기린을 겨누었다.
‘죽여야 하나?’
장기린이 진청룡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관복을 갖춰 입은 한 사내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무엄하다! 길을 비켜라!”
관료들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보다 높은 관료의 추궁이지 않던가.
금의위들 사이에 소요가 생겨났다.
위엄에 가득 찬 목소리.
귀족처럼 또박또박 정갈한 한어(漢語)를 구사하는 자가 평범한 사람일 리 없었다.
“광록훈 광록대부(光祿勳 光祿大夫) 부운화다. 길을 비키지 못할까!”
웅성거리는 소요가 더욱 커졌다.
부운화는 자신의 관직이 적혀 있는 호패를 당당하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광록훈이라 함은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곳이고, 광록대부라고 하면 그중에서도 종 이품에 달하는 최고위 직책 중의 하나였다.
비록 실권이 아니라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황제와 직접 대면하여 간언할 수도 있는 중요 직책임은 분명했다.
금의위들은 모두 의문에 빠졌다.
그 정도 직위를 지닌 이름을 황실을 지키는 금의위들이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부운화라는 자가 대체 누구기에?
이제껏 이름을 들어 보지도 못한 자가 그런 높은 직위의 관직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물러서라.”
우물쭈물하는 금의위들을 해결해 준 것은 부운화의 뒤를 따라온 한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그들과 똑같은 금의위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비단 무복. 가슴에 새겨져 있는 황금용 문양은 다른 평범한 금의위 위관들의 것보다 훨씬 크게 수놓아져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하나 없이 깔끔하게 뒤로 넘겨서 묶은 머리와 먼지 한 톨 없는 금의위 제복이 그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황실을 지키는 금의위 중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 장군을 뵙습니다!”
“뵙습니다!”
쩌렁쩌렁한 인사와 함께 금의위들이 일제히 예를 갖추었다.
오만하기로 소문난 금의위였으나 그들은 눈앞의 사내에게는 거만을 떨지 못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채 식은땀을 흘리기까지 했다.
금의위 제삼(三)위장 공보하.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금의위의 장수가 된 건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그 후로도 단 한 번도 일을 허투루 처리하지 않아 차세대 금의위 지휘사라고 불리는 장군이다.
나이는 사십 대 중반.
단정하게 다듬은 수염 위로 오뚝한 코와 얇고 긴 눈매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한 손을 허리에 찬 협도 위에 올린 채 서릿발처럼 냉랭한 모습으로 금의위들을 쏘아보자 감히 고개를 드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길을 열어라.”
“옛!”
철컹!
방패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길이 열렸다.
길이 열리자마자 부운화가 먼저 장기린을 향해 뛰어갔다.
그는 장기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미리 준비해 온 적색의 비단 장포를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운화?”
장기린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부운화가 나타난 것은 그야말로 장기린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충격적인 일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형. 잠시 제가 이끄는 대로 따라 주십시오.”
옷차림은 그 사람의 인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서는 그것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부운화는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피투성이에 참혹한 살수 같았던 장기린이 비단 장포를 하나 걸쳤을 뿐인데, 사납고 포악한 귀족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당황하는 금의위.
그들의 놀람은 공보하 부장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황사(皇師)를 뵙습니다.”
짧고 간결하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명 존경의 감정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황사라니.
황제의 스승.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의 눈앞에 있는 피투성이 사내는 국구(國舅: 왕의 장인)에 준하는 고관대작, 혹은 황족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런 그에게 무릎을 꿇리라거나, 무기를 내리라며 윽박지르던 금의위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황궁은 복마전이다.
사소한 한마디 실수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으며, 언제든 구족이 멸살당해도 할 말이 없는 위험한 곳이 바로 황실이다.
그들은 그럴 경우 이어질 최악의 결과들을 상상하며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오랜만이군.”
장기린은 공손히 예를 취하는 공보하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이십 년 만입니다.”
“……그런가.”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공보하는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사내였다.
그는 냉철한 얼굴이었으나, 장기린을 고관으로 대우하며 공손하게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리고.”
공보하는 어색하게 서 있는 금의위들을 지나치다가 지금 막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오늘 당직이 모 백호(百戶)이던가?”
“예! 백호(百戶) 모길상입니다!”
금의위들 중에 유난히 키가 큰 사내가 재빨리 튀어나와 공보하에게 예를 표했다.
“황사께서 오늘 큰일을 겪으셨다. 밖으로 말이 새어 나가선 안 되는 일이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주변을 봉쇄하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게.”
“조치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게. 금의위조차도 말이야.”
“……예!”
모길상은 잠시 망설였으나, 공보하의 냉랭한 눈길을 받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받아들였다.
황실에서 상명하복은 당연한 상식이다.
제삼위장인 공보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천자(天子) 본인이거나, 금의위의 총책임자인 지휘사뿐.
어느 쪽도 모길상과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공보하는 왕진이 머물던 건물을 바라보았다.
외벽이 박살 난 것 빼고 눈에 띄는 것은 단 하나다.
“모 백호.”
“예!”
“저 위에 깃발 보이나?”
“예. 보입니다. 은자지종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저거 떼도록 하게. 불필요하게 눈에 띄는군. 성벽의 시끄러운 타종도 이제 중단하라 전하게. 계속하면 폐하께서 놀라실 것이야.”
“예!”
모길상은 휘하의 금의위들에게 지시를 내려 깃발을 내린 후, 주변을 봉쇄하였다.
이제 이곳은 철벽이 되었다.
공보하가 명을 내린 대로, 그가 다시 돌아와 사태를 수습할 때까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공보하와 부운화가 앞장서자 그들을 막아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동창과 비등한 금의위의 이름값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환관들과 병사들은 공보하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장기린은 북경의 남문인 대명문을 그대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북경의 성벽을 넘어서자, 긴장이 탁 풀리면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일이 쉽게 풀렸다.
또 한 번 피바람이 부는 것을 각오하고 있던 장기린으로서는 허탈할 정도였다.
‘운화, 네가 다 준비하고 있었구나.’
장기린은 옆에 서 있는 부운화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부운화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은은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그의 둘째 동생의 능력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장기린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피바람이 부는 사고를 저질렀는데도, 그에게는 예전처럼 보좌해 주는 동생이 있다.
한편으로는 미안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명.
감사를 표해야 마땅한 인물이 있었다.
“공 위장.”
공보하는 무심한 얼굴로 장기린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떠한 감정도 표출하지 않았다. 냉랭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냉철한 이성뿐이었다.
“은혜를 입었다. 인사를 해야 할 것 같군. 오늘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인사는 필요 없소. 나는 황실의 법도대로 직위에 따른 예를 취했을 뿐. 그대는 영락제께서 본래 황사로 임명한 인물이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을 뿐이오.”
말투조차 냉랭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서는 지극한 의리와 정이 느껴지니 호감이 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럴 리가.”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한 일이 무엇이던가.
북경과 자금성에 단신으로 침투해 사례감 태감인 왕진을 죽였다.
사태가 그리 가벼울 리 없지 않은가.
“공 위장에게 황실에서 책임을 묻지 않겠나.”
“……그런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오.”
공보하는 부운화에게 시선을 주었다.
부운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보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쪽의 광록대부가 계획한 대로. 이 일은 모두의 협의하에 이루어졌소.”
“뭐……?”
“큰 계획은 아니오. 그저, 만약의 경우. 그 ‘인물’이 죽더라도 좋아할 사람이 더 많다는 정도로만 말해 두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