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24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17)
공보하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아꼈다.
장기린은 그가 말을 아끼는 것만 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일에 연루되어 있는지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가.”
장기린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공보하의 말은 몹시 의미심장해서 이번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소호를 꾀어내 이용하려 했던 왕진.
그런 왕진에게 죄를 묻기 위해 황실로 온 장기린.
둘만의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엮여 있는 듯하지 않은가.
‘역시 황실은…… 나와 맞지 않는군.’
장기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이용했든, 왕진을 이용했든.
얽히고설키는 여러 가지 의도 속에서 의미 없이 허우적거리는 건 이제 사절이었다.
“……왕진에게 적이 많았다고 받아들이는 게 제일 좋겠군.”
“비슷하오. 그는 모두의 사랑을 받는 관료는 아니었지.”
공보하는 본인도 왕진에 대해 불쾌한 기억이 있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나에 대한 것은 걱정 마시오. 후폭풍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이 일을 은혜로 느낄 필요도 없소. 다만 금의위의 제삼 위장이 아니라 그저 공보하라는 한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공보하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장기린에게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혔다.
“고생하시었소. 황제를 손안에 쥐고 나라를 농락하던 왕진을 처단했으니. 당신은 진정한 협사요.”
“나는…….”
장기린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를 했건만 협사라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움직였을 뿐이오.”
“큰 뜻이 없었다고 한들 마찬가지. 개인의 원한이 모여 대의가 되는 것이오. 그대와 같은 협사들이 많았다면 진작 이 모든 일이 쉽게 끝났을 것을.”
공보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튼튼하고 비싸 보이는 마차 한 대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흑갈색 갈기를 지닌 말 두 마리가 이끄는 쌍두마차였다.
부운화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차의 문을 열고 장기린을 안으로 이끌었다.
“대형, 저는 수습할 일이 있어서 황실에 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삼산현까지는 혼자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운화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으나, 눈 밑의 피곤함은 감출 수 없었다.
장기린은 안타까웠다.
부운화가 고생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순전히 장기린이 즉흥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상담을 하고 진행할 것을.
“운화, 고맙다. 네 덕분에 수월하게 빠져나왔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전 대형이 아니라 황실 금의위들을 구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공보하 위장? 오늘 우리가 중재하지 않았다면 금의위가 얼마나 죽었을까요?”
“…….”
“보셨지요?”
공보하는 대답하지 않고 싫은 티를 냈을 뿐이지만, 그게 오히려 명확한 대답이 되었다.
“운화.”
“예, 대형.”
“내가 정말로 돕지 않아도 괜찮나?”
장기린은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부운화를 바라보았다.
왕진을 죽인 일.
뒤처리가 쉬울 리가 없다.
장기린은 부운화가 필요하다면 어떤 전장에라도 뛰어들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저 돌아가셔서…… 형수님이랑 소호를 보듬어 주세요.”
“……그래. 알겠다.”
사나이끼리의 대화다.
중언부언 다시 묻는 일은 필요 없었다.
부운화는 공보하와 나란히 서서 떠나가는 마차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히히힝-.
마차가 움직인다.
장기린은 여전히 자신의 어깨에 걸려 있는 붉은색 비단 장포를 힐끗 바라본 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왕진이 사라진 대명천하.
어두운 밤하늘에는 땅 밑의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선(善)은 호북성 출신으로 인근 지역에서는 그래도 꽤나 명망이 높던 가문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그의 집은 시야가 닿는 끝까지 펼쳐져 있는 넓은 논밭과 수십 명의 하인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하루 종일 뛰어서도 끝에 다다르지 못했던 기억은 선에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즐거웠던 추억이다.
선의 아버지는 관직에 오른 사람이었다.
단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재질의 관복과, 아버지가 집에 들어올 때면 늘 몸에서 풍기던 땀 냄새와 먹물 냄새를 선은 잊을 수 없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선의 나이가 여덟 살이 되던 해.
한 통의 서찰과 함께, 가문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역모.
선덕제 사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황궁 내에서 모종의 사건이 벌어졌고, 아버지는 그것에 연루되었다고 했다.
명확한 증좌 따위는 필요 없었다.
죄목을 들이밀자마자 즉참.
가문에 살던 하인들을 몰살시키면서 들어온 동창은 선의 가문을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선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하인들.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
아비규환의 소란스러움.
그리고, 선을 쌀가마니 속에 숨기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선, 무엇을 생각하나요?”
눈가에 새겨진 주름을 짙은 분칠로 감춘 남자.
왕진은 특유의 간드러지는 웃음을 터뜨리며 선에게로 다가왔다.
“잠시 예전 일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예전 일이라……. 마침 잘 되었네요.”
“네?”
“선, 말할 것이 있어요.”
왕진은 기품 있는 동작으로 다탁 앞에 앉은 뒤 선에게 손짓을 했다.
쪼르륵-.
최고급 용정차가 찻잔을 채우며 은은한 향기를 내뿜었다.
찻주전자를 기울이는 와중에 왕진은 드물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시지?’
갑작스레 대화라니.
선은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는 왕진이 내미는 찻잔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우선 한 가지 물을게요.”
“네, 대인.”
“…….”
“대인?”
“선은 왜 내게 복수를 하지 않았죠?”
툭.
선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입가에서 놓칠 뻔한 찻잔을 간신히 다시 붙잡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복수라뇨?”
“대답이 늦었어요. 이 험한 황실에서 살아가려면 좀 더 대담해야 합니다.”
“그건 상대가 대인이라서……, 아니, 그보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더듬더듬.
선은 자신이 이렇게나 언변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고 있었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는 사자성어가 이렇게나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입은 여는데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된 일이네요. 호북 유씨 가문에는 뛰어난 인재가 많았죠. 그중에도 유장방은 재지가 탁월한 사람이었어요. 문무를 겸비했으며, 특히 유생들과 논쟁할 때 논어를 한 글자, 한 글자 다 외워서 줄줄 읊는 모습은 백미였죠. 그때 진 유생들이 참으로 억울해했었는데. 주기옥이 아니라 주기진 폐하를 따르기만 했어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폐부가 시리다.
선은 움찔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래요. 그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선.”
“언제부터…….”
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처음부터.”
왕진은 조용히 웃으며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차를 한 모금 머금는 모습.
선은 왕진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든 것을 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왕진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차를 입에 잠시 머금었다가 삼키며 논쟁을 한다.
심지어 지금은 얼굴에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저의 집 앞에서 자신을 거둬 달라며, 웬만한 서예가들도 울고 갈 달필로 격문을 써서 들고 있는 소년을 보았을 때부터. 나는 왠지 모르게 인연이 있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
“그 후에 동창을 통해 조금 조사해 보니 알게 되었죠. 그대가 내가 몰살시킨 가문의 후계자라는 것을.”
파르르-.
선이 들고 있던 찻잔이 떨렸다.
고요했던 용정차 찻물에 일렁이는 파문이 퍼져 나갔다.
“그런데…….”
“왜 거뒀냐고요?”
“그, 역적은…… 구족을 멸해야…….”
“나랑 똑같았거든요. 꼬맹이 주제에 절박하면서 복수심에 불타는 얼굴이.”
왕진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드물게 웃지 않는 얼굴.
진지한 눈빛으로 선을 똑바로 응시한다.
“장강용왕 추묵환이 내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는 했죠?”
“네……. 분명히 그렇게 말씀했어요…….”
“그는 원수의 자식을 죽일 용기도, 원수의 자식이 자랐을 때 그에게 복수하러 오는 것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어요. 어쩌면, 분이 안 풀렸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주변에 본보기를 보였을 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그는 내 손가락을 잘랐어요.”
왕진은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너무나 담담하게 이어 나갔다.
“나는 그때 다짐했답니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무림인이라니. 그 따위 것들 하찮고도 하찮다. 힘만 센 파락호나 다름없는 무림인 따위.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겠다.”
“아……!”
“그 마음으로 북경의 왕씨 세가 문을 두드렸어요. 예전부터 안면은 있었던 곳이었죠. 거기서 저를 양자로 받아 줬답니다.”
왕진은 과거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던 내가 대문을 열고 나와 보니,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년을 만난 거예요. 그걸 어찌 안 받아 줄 수 있겠어요.”
선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굳어 있자, 왕진은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과는 하지 않겠어요.”
“네……?”
“선의 아버지 일. 그건 그가 내 앞길을 방해해서 싸운 결과니까요. 내가 졌다면 내가 그리 죽었을 거예요.”
“…….”
“어차피 날 악인이라 부르며 싫어하는 사람들만 모아도 나라 하나는 만들 수 있을 정도예요.”
그러니 네가 날 미워해도 이해한다.
왕진은 직접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았으나, 문맥상 그리 말하고 있는 듯했다.
“복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요. 대의. 오직 대의를 이루기 위한 삶만이 큰일을 해내죠.”
“대인께서 말씀하시는 대의란……?”
“무림 문파들의 힘을 빼앗아 관가에서 통제하는 것.”
혼란에 빠져 있던 선은 서서히 진정되어 갔다.
마음이 가라앉고, 본래의 영리한 두뇌가 맹렬하게 활동했다.
“몰랐어도 되는 일이었어요.”
선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인, 제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왜 저에게 하신 거죠?”
“글쎄요.”
왕진은 창밖의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날이 있죠. 창고에 아무렇게나 넣어 뒀던 짐들을 정리하고 싶은 날이.”
“대인…….”
“선.”
왕진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날 대신해서 일할 때, 폐하는 참, 다루기 힘든 분이죠?”
“그건……. 맞아요.”
“내 몫까지 폐하를 잘 부탁해요.”
어째서일까.
선은 왕진의 그 담백한 목소리에서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
“끄으…….”
선은 신음을 흘렸다.
왕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살아온 지도 십 년이 넘었다.
이상한 행동.
이해가 되지 않는 말.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아서 왕진을 찾으러 왔건만, 왕진이 있는 건물 주변에 모산파의 도사들이 보였다.
이상한 주언들을 내뱉던 도사들.
오싹한 심정에 벽에서 떨어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하던 찰나였다.
섬광이 번뜩이는 듯한 폭발과 함께 갑작스레 벽이 무너져 잔해에 휩쓸리고 말았다.
“으윽, 허억…… 허억.”
다행히 상처는 없었다.
그저 무너지고 부서진 벽면에 깔려 호흡이 힘들었을 뿐이다.
한참을 낑낑거리면서 몸을 비틀어 일어나 보니 이름 모를 사내가 뚫린 벽에서 걸어 나와 금의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대인!’
확인해야 한다.
이 불안감을 해소해야 했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 그는 구르듯이 건물 내부로 몸을 날렸다.
“대인……?”
어스름한 건물 안.
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서히.
익숙한 한 사람이 가까워진다.
양귀비 같은 향과 비릿한 쇠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그럴 리가……!”
선은 무릎을 꿇었다.
축 늘어진 몸.
멍하니 공허하게 뜬 두 눈은 선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손으로 몸을 붙잡고 흔들자, 아직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선의 입이 벌어졌다. 소리 없는 절규가 마음속에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