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25화
제31장 대망망천(大蟒望天) (18)
“이럴 리가…… 없어……!”
믿기지 않는 일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황제 본인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권력의 실세.
동창과 금의위를 양손에 거머쥐고, 온 세상의 관인들 위에서 군림하던 시대의 거인.
그런 그가 죽었다고?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선의 두 눈은 공허했다.
그는 부정하고 싶었으나, 눈앞의 광경은 그에게 냉혹한 현실을 들이밀었다.
점점 식어 가는 체온.
바닥에 흘러내린 핏물은 어느새 나무 바닥에 스며들어 점점 사라져 갔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왕진의 시선이 마치 그를 원망하는 듯했다.
왕진의 안타까운 듯한 표정.
무언가를 걱정하듯 간절해 보이는 얼굴이 더욱 그런 마음을 부채질했다.
-잘된 것 아닌가?
-드디어 가문의 복수를 했다. 이제 나는 해방이야.
선은 마음의 속삭임을 들었다.
애초에 원한으로 만난 사이.
이왕 이렇게 된 거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면 그뿐 아닌가.
“아니야. 아니야…….”
선은 혼란에 빠져 버렸다.
팔 년간을 살아온 호북 유씨 가문에서의 삶.
그 모든 것을 박살 내고 만난, 원수인 왕진과의 십이 년의 삶.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부모와 왕진.
둘 중 어느 쪽과 함께하던 시절이 진정한 ‘자신’인가.
“이건…… 아니야. 이런 식으로 끝내서는 안 됐어. 대인. 차라리 말을 말지. 왜 나를 살려 뒀어요? 왜 이렇게……. 대체 왜……?”
얼마나 멍하니 있었을까.
무릎을 꿇고 있던 다리에서 감각이 사라지고 바싹 말라붙은 입술이 찢어져 피 맛이 느껴질 때쯤이었다.
선은 그제야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분노였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왕진은 무엇을 계획했고, 모산파 도인들은 벽에 붙어서 무엇을 했으며, 왜 결국 실패해서 가슴을 찔려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가?
‘그 사람!’
선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직전, 금의위에 포위되어 있던 사내가 떠올랐다.
그 뒷모습.
피투성이인 몰골.
커다란 창을 비껴 든 위험천만한 모습.
“찾아야 해……! 찾아서……!”
선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왕진.
그의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이자, 그를 키운…… 아버지.
강렬한 감정이 선을 휘감았다.
“찢어 죽일 것이다……!”
잔뜩 일그러지고 어긋난 감정이 향한 곳은 결국 장기린을 향한 복수심이었다.
일렁거리는 살기.
선이 왕진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저벅저벅.
한 사내가 부서진 벽면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를 찢어죽일 것이지?”
질 좋은 관복을 입고 당당하게 허리를 꼿꼿이 세운 남자였다.
선은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모여 나라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회의 때, 강호를 평정하겠다던 왕진의 의견을 가장 논리적으로 막아 세우던 관료였다.
“광록훈 광록대부 부운화……!”
“나를 기억하는군?”
부운화는 냉랭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날 직접 본 것은 단 한 번뿐일 텐데. 확실히 머리가 좋아. 왕진이 키운 이유가 있군. 대행까지 맡길 만해.”
부운화는 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 사실이 선에게 공포를 줬다.
왕진이 바쁠 때 그를 대신해서 일을 본다는 건 왕진과 선만이 아는 비밀이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광록대부 부운화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안단 말인가.
“대답이 늦었어요. 이 험한 황실에서 살아가려면 좀 더 대담해야 합니다.”
‘대인……!’
선은 왕진과의 마지막 대담을 떠올리며 표정을 무덤덤하게 유지했다.
“너.”
“…….”
“머리가 좋으니 한번 추측해 보아라. 내가 지금 이곳에 왜 들어왔을까?”
부운화는 시험하는 듯한 말투였다.
차가운 눈빛.
차분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그에게서 ‘죽음’이 다가오는 듯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당신은…….”
선은 무너진 벽 너머로 보이는 금의위들이 모두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걸 확인했다.
마치 뒤를 돌아보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경직된 모습이다.
선은 그 모습들을 눈에 새겨 넣었다.
왕진이 살해당하는 대사건이 일어났음에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금의위.
그리고 금의위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부운화.
선은 그 모든 사실들을 조합해서 한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이 일을 덮을 셈인가……?”
“그래.”
부운화는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대답하여, 그게 올바른 일인 듯이 착각할 뻔했을 정도다.
“그게 무슨……!”
선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당신이 죽인 건가? 대인을 죽인 게 당신이야?”
“아니.”
“그럼 왜! 아니지. 꼭 직접 손을 쓸 필요는 없지. 흉수에게 사주한 게 당신이야?”
“그것도 아니군. 사주라……. 굳이 누가 사주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왕진 본인일 테지.”
부운화는 왕진에 대한 존중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왕진의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싸늘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건 또 무슨……? 그럼 흉수는 안 잡고 왜 덮으려는 거지?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대인께서 어떤 분이신데!”
“흐음.”
부운화는 흥미롭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떤 분이지?”
“대명제국의 존귀하신 황제 폐하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충신이자 스승, 동창을 포함해 모든 황실 내의 일들을 총괄하는 사례감의 태감이시며, 나라의 문무백관들이 올리는 상소문들을 모두 관리하는 명 황실의 기둥!”
“흠.”
부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요한 인물이지.”
“그런데 대체 왜……!”
“이유는 간단하다. 왕진은 죽지 않았어.”
선은 숨이 덜컥 멎은 듯이 굳어 버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왕진의 시신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럴 리가……?”
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선은 머릿속이 엉켜 버렸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황실이다.
시신조차 꾸며낸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부터, 한낱 세 치 혀로 내뱉는 망언에 휘둘리고 있다는 자아비판까지.
온갖 생각들이 선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냐, 아냐. 그래도 그럴 리가. 내가 잘못 볼 리가 없어. 이 얼굴, 이 체형. 이분은 분명 대인이 맞아……!”
“그런가? 나는 모르겠군.”
부운화는 왕진의 시신 앞에서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는 선과 눈높이를 맞췄다.
자세를 낮추고 앉아,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시선으로 선을 응시했다.
“내가 보기엔, 왕진은 지금 내 눈앞에 살아 있는데.”
“……!”
스윽-.
선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쿵.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선은 부운화가 방금 한 말을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말은…… 그러니까…….”
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보고 대인의 역할을 대신하라고……?”
“대신? 대신이라는 말도 무색하더군. 이미 너는 왕진 그 자체가 아닌가? 지난번 회의 때도 보아하니 흠잡을 곳이 없던데.”
“……!”
충격과 공포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 선이 숨을 헐떡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대인께선? 그러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대인께서는? 흉수는 잡지도 않고, 이대로 덮어 버리고,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하라고……?”
“흉수는 죽었다.”
“……!”
“이렇게 말하면 네 마음이 좀 편하겠지?”
선은 눈을 부릅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실을 말한 것인가?
부운화는 내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관료답게 철저하게 냉혹한 얼굴로 선을 대할 뿐이었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왕진이 죽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흉수를 찾는 거다. 찾을 수는 없을 거다. 내가 말했듯이 흉수는 이미 죽었으니까. 대신, 그렇게 되면 지금껏 왕진이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 낱낱이 밝혀지겠지. 그가 지금껏 사례감 태감으로 지내면서 얼마나 많은 목숨을 죽이면서 그 자리에 버티고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무고한 ‘가문’들을 역모로 몰아 죽였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
“입단속을 해 둔 자들을 믿고 있다면 포기해라. 사실을 아는 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왕진과 동창의 힘이 두려웠기 때문일 뿐이다.”
화무십일홍.
영원히 피는 꽃은 없듯이, 권력이 지고 나면 남는 것은 시들어 죽은 풀이 되는 길뿐이다.
“만약 왕진이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 비 온 뒤의 죽순처럼 여기저기서 증언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테지. 왕진의 명예는 짓밟히고 시신조차 끌어내서 매질을 당할게 뻔하다. 당연히 너도 무사할 수 없다.”
“그건…….”
다 옳은 말이기에 선은 반박할 수 없었다.
비정하게 권력을 잡았던 자의 몰락은 비참하다.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충분히 아는 일이었다.
뒷짐을 지고 서서 선을 내려다보는 부운화의 눈은 지극히 차가웠다.
“두 번째, 왕진의 죽음을 감춘다. 네가 대신하는 거다. 지금까지 해 왔듯이. 왕진이 할 법한 일들을 하면서 지금까지처럼 지내는 거다.”
“나는…… 그렇게까진 할 수가…….”
“아니, 가능할 거다.”
부운화는 품 안에서 서책을 하나 꺼내 던져 주었다.
툭.
정갈하고 튼튼한 표지 위에, 감탄할 만큼 깨끗한 필체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왕가지선(王家之善).
“이건……!”
선은 울컥 치솟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왕씨 가문의 선.
얼핏 보면 왕가의 선행이나 미담을 담아 놓은 책 같지만, 그 내용은 선을 위한 것들이었다.
선은 순식간에 책자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선은 책자를 속독으로 빠르게 읽어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비상한 기억력으로 모든 글자를 그림처럼 단번에 외웠다.
책자 안에는 왕진이 앞으로 하려고 했던 일들이 적혀 있었다.
매년 있는 황실의 행사 때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크게 벌여 놓은 사업들은 어떻게 조율하는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단어로 상세히 나열되어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좇지 마라. 무림에 대한 일도 이제 불허한다. 흑시군에 대한 권한도 차차 사라질 거다. 그 외에는 너와 왕진이 지금껏 해 오던 대로, 네 마음껏 일해도 좋다.”
“정말로…… 마음껏……?”
“그래. 왕진이 늘 말하던 ‘대의’를 이뤄 내야지.”
선은 책자에 집중했다.
지금껏 왕진의 업무를 보좌해 오던 선은 쉽게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대망……망천……!”
책자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네 글자가 선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대망망천(大蟒望天).
황실의 이무기는 하늘을 바란다.
하늘, 순리.
천자.
그리고 대의(大義).
“왕진의 집무실에 꺼내져 있었다. 그는 네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대인……!”
“네가 왕진의 역할을 계속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왕진이 되는 거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네가 말했던 황실의 기둥인 사례감 태감 왕진은 오늘 죽지 않았고, 어떠한 일도 겪지 않은 거다. 왕진의 명예도 죽는 날까지 지켜질 테지.”
“나는…… 나는…….”
“어떻게 할 거냐? 첫 번째인가? 두 번째인가?”
“……”
“어서 선택해라.”
부운화는 선을 향해 한 치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았다.
냉혹한 북풍 같은 말로 쉴 틈을 주지 않고 선의 마음을 날카롭게 깎아 냈다.
“하겠……습니다.”
결국 무너져 내린 선은, 왕진의 시신을 붙잡고 흐느꼈다.
***
“그자는 믿을 수 있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보하는 부운화가 나오자마자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금의위들은 공보하와는 꽤나 떨어진 곳에서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대화 내용이 들리지는 않을 거리였다. 공보하가 일부러 멀리 보내 둔 듯했다.
“아니. 믿을 수 없습니다. 머리는 뛰어나지만, 감정이 불안정하고 신념이 없더군요. 왕진에게 생각보다 더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어진 자는 사소한 것에도 불안해하는 법. 그런 자가 높은 자리에 있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지.”
“머리는 좋지만 왕진보다 그릇이 작은 자입니다. 이 일이 복이 될지, 해가 될지는 지켜봐야 알겠군요.”
“…….”
“앞으로 신경을 많이 기울여야 할 겁니다. 아마 귀찮을 일도 많겠지요.”
“으음…….”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적어도 오늘 있었던 일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공보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자금성 안에서 사례감 태감이 성안으로 쳐들어온 살수에게 당했다?
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물론이고, 이 일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관료들까지.
그 일로 목이 날아갈 자들이 대체 몇 명일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이 일이 알려지는 것에 비하면, 잠깐의 수고는……. 비교할 가치도 없군.”
“그렇습니다.”
부운화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장기린이 은자촌에서 빠져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공보하와 함께 고민하고 준비하던 내용이었다.
결정은 빨랐다.
두 사람은 뜻이 같았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대형과 은자촌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겁니다. 당신이 영군도위 배진화와 ‘그분’을 은자촌으로 보냈으니 저와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그곳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최후의 보루니까 말입니다.”
“……그렇군.”
공보하는 떠나기 전에 금의위들에게 지시를 내려 건물 안의 상황이 수습될 때까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시켰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왕진의 시대는 저물고, 황실과 무림이 분리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대망망천이라. 헛소리.”
부운화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싸늘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곳을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알았던가. 감히.”
대형 장기린.
풍운객잔.
그리고 은자촌.
그곳을 건드린 자는 부운화가 용서치 않는다.
부운화가 떠나간 자리엔 왕진의 잔재를 떨쳐내듯 싸늘한 바람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