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27화 (456/686)

14권 1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1)

북경 자금성.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모두 모여 나라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황제에게 간언하는 회의는 한 나절이 지나도록 끝나지를 않고 있었다.

오군도독부의 도독들과 도찰원의 관료들은 미묘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을 살폈다.

안 그래도 길어지는 회의.

진작 끝이 났어야 하건만, 강직한 중년의 관료 한 명이 마치 국운이 경각에 달한 것처럼 열변을 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복을 입은 무관은 두 눈이 맑았고 정기가 강한 사내였다.

코는 크고 뭉툭하였고, 진한 눈썹에서 그의 완고한 성격이 느껴졌다.

관료의 뜨거운 눈빛과 낭랑한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회의장에 모여 있던 고관들 사이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으음…….”

정통제 주기진이 어떤 사람이던가.

그는 평소에 놀기를 좋아하고 정무에 취미가 없는 사내였다. 그런 그가 장시간의 회의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유비 현덕 같은 성군이 되고 싶어서 꾹 참고는 있지만, 주기진이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리는 횟수는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점점 늘어났다.

“그래……. 그렇구려…….”

용상에 삐딱하니 기대앉은 모습.

지루한 듯 가늘게 뜬 눈에서는 열변을 토하는 관료를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중년의 무관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말에 신념을 담아 최선을 다했다.

“……하여, 채담자들이 알아온 정보에 의하면 북원의 잔당 중에 오이라트라 불리는 자들이 세를 불리는 중이고, 또 한편으로는 마시(馬市)를 이용하여 수시로 국경을 정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폐하, 부디 청컨대 국경을 정비하여 성을 다시 튼튼하게 메꾸고, 성벽에 군사를 늘려서 미리 그들의 기세를 꺾어 둘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마침내 열변이 끝났다.

깊숙이 허리를 굽히는 모습에선 무관다운 절도가 강하게 느껴졌다.

“병부시랑의 뜻은 잘 알겠소.”

정통제 주기진은 손으로 용상의 손잡이를 탁탁 두드리면서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바로 곁에 서있는 사례감 태감 왕진을 휙 돌아보았다.

“태감의 생각은 어떻지? 북원의 오랑캐들은 경계할 필요가 있나?”

“그들은…….”

환관 왕진.

아니, 호북 유씨 출신의 선이 연기하는 가짜 왕진은 지금 간언한 사내와 왕진의 관계를 되짚어 보았다.

‘병부시랑 우겸은 강직하고 청렴하지만, 융통성이 없고 말이 통하질 않아서 대인께서 직접 감옥에 넣은 적도 있다. 여기서는 찬성해서는 안 돼.’

왕진은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주기진에게 간언했다.

“병부시랑의 말은 모두 받아들이기 어렵나이다, 폐하.”

“호오, 어째서?”

“북원이 한때 강성했다고는 하나, 지금은 수십 개의 갈래로 쪼개져서 자신들끼리 싸우면서 국력을 낭비하고 있답니다. 작금에 와서는 대명제국에 감히 이빨을 드러낼 만한 부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왕진은 미리 읽어 두었던 정보와 자료들을 떠올리며 유려한 말솜씨를 뽐냈다.

“그뿐인가요? 영락제께서 마시(馬市)를 허용하신 이래로, 거기서 거래하던 상인들이 고작 수십 명에 불과했었는데 지금은 무려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수천? 수천 명이 모여 거래를 한다고?”

“예. 그야말로 나라를 먹여 살릴 만큼 큰 시장이 되었지요. 그 덕분에 오랑캐들이 명의 물품들을 마음껏 구하고 먹고 살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이를 경계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이겠지요?”

“흐음, 그렇지, 그렇지.”

“오히려 우리는 대국답게 더욱 거래를 늘리고 규모를 키워 그들에게 명의 은혜를 느끼게 하는 것이 진정 승리하는 길일 것입니다.”

왕진은 자신만만하게 소리 내어 웃으면서, 병부시랑 우겸에게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후후, 병부시랑께선 싸움이 나길 바라시나요? 평화롭게 조공을 받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도 있답니다. 동쪽의 조선처럼요. 병부에 있다고 해서 너무 편협한 생각을 가지면 나랏일을 처리하기 힘들어요.”

“……나는 폐하의 결정에 따를 뿐이오.”

과거의 은원이 있는 우겸은 왕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주기진에게 예를 표하면서 그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주기진은 나른한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태감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나랏돈은 아낄 수 있으면 아끼는 것이 좋으니. 국경에서는 낭비하지 않도록 하시오.”

“……소신, 폐하의 명에 따르겠나이다.”

우겸은 두말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으나, 주기진과 왕진을 보면서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저것 봐라?’

왕진은 우겸의 태도가 못마땅했으나 직접 타박하기에는 명분이 없었다.

우겸뿐만이 아니다.

실망을 드러내며 수군거리는 관료들은 많이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면전인 데다, 왕진의 눈치를 보느라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는 눈빛은 황실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 보였다.

우겸이 물러나자 회의는 금방 마무리되었다.

“태감. 난 이제 돌아갈게. 우리 후궁들 만나러 가야지.”

“예, 폐하. 뭣들 하느냐? 어서 폐하를 후궁전으로 뫼셔라.”

왕진은 회의장을 떠나는 주기진을 배웅한 뒤 조용히 뒤를 따라오는 환관에게 말을 걸었다.

“길상.”

“예, 태감.”

환관 조길상은 왕진이 아끼는 자였다.

눈치도 빠르고 일 처리도 정확했다. 특히 권력의 시류를 읽는 눈은 탁월했다.

“요즘 대소신료들이 나에 대해 달리 말하는 게 있던가요?”

“……!”

“길상?”

조길상은 놀란 얼굴로 굳어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태감. 제게 그런 걸 물어보신 적이 없어서. 잠시 당황했나이다.”

“……그랬군요. 길상을 믿으니 묻는 겁니다.”

“저를 믿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반드시 그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태감.”

조길상은 깊이 읍하느라 왕진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크게 떠드는 자는 없으나, 최근에 태감께서는 행보가 조심스러우시다고…… 그렇게들 말하고 있습니다.”

“행보가 조심스럽다?”

“예에, 예전에는 누가 반대를 하든 강철 같은 의지로 일을 진행시켰다면, 요즘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를 만든 뒤에 일을 하시지요?”

“……그게 평이 나쁜가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 그저 조금 달라지셨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그 덕분에 태감께서 더 오랫동안 황실을 안정시킬 수 있을 거라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흐음.”

“오늘도 보셨다시피, 폐하께서 회의를 주관하는 내각대학사에게 묻지 않고 태감께 의중을 물으셨지요? 항상 그리 명확하게 일을 처리하시니 폐하께서도 태감을 가장 신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왕진은 안색이 굳어졌으나 그의 뒷모습만 보고 있는 조길상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조길상의 말은 그를 칭송하고 있었으나, 왕진에게는 조금의 변화라도 가슴이 철렁하는 이야기였다.

‘조길상이 저리 느낀다는 것은 대부분의 고관들도 그리 느낀다는 것일 터. 위험해. 앞으로는 더 과감하게 행동해야겠어.’

이날의 작은 결심이 앞으로의 많은 일들을 바꿔 놓는다는 것을, 이때의 선은 알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다탁에 앉았다.

그는 소매의 실을 뜯어서 옷감 안에 숨겨 둔 작은 서책을 꺼냈다.

생사지선(生死之善).

전에 부운화가 발견해 건네준 황실지선이 왕진이 죽은 후에 해야 할 업무들이었다면.

선이 왕진의 옷소매에서 발견한 생사지선이라는 서책에는 앞으로 펼쳐야 할 음모와 귀계들이 적혀 있었다.

“황실인명록. 공보하 제삼위장…… 필사(必死). 부운화 광록대부…… 필사.”

조용히 서책을 읽는 선의 두 눈이 위험하게 타올랐다. 북경과 황실을 휩쓸, 거센 태풍의 시작이었다.

***

호랑이라는 생물은 강인하다.

유연한 몸, 민첩한 반사 신경만으로도 위협적인데 발 하나로 아름드리나무를 부수는 강인한 근력까지 지녔다.

커다란 근육과 두꺼운 가죽을 꿈틀거리면서 걷는 호랑이와 마주친다면 평소에 힘깨나 쓰던 거한이라도 그 샛노란 안광에 기가 질려 주저앉을 정도다.

샛노란 털 사이로 나이테처럼 그려진 얼룩무늬와 미간에 새겨진 왕(王)자는 그가 한 산의 왕임을 증명하는 신분패나 다름없다.

소호는 전율했다.

거대한 호랑이.

사람 따위는 한입에 삼켜 버릴 것 같은 집채만 한 거호(巨虎)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땅이 울리는 듯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거호의 코끝이 다가왔다.

까칠하면서 뻣뻣해 보이는 털 아래, 날카로운 송곳니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뜨거운 숨결이 훅- 끼쳐 든다.

소호는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호의 두 눈에선 지성이 느껴졌다. 그 위압적인 산신(山神)은 뜨겁게 타오르는 눈길로 소호를 평가하는 듯이 보였다.

“왜……?”

무심코 입을 열면서 놀라고, 목소리가 나왔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소호가 손을 들어 올렸다.

호랑이의 코끝에 손이 닿으려는 순간, 호랑이는 머리를 높게 들어 소호의 손길을 피했다.

-아직, 때가 안 됐다.

호랑이의 모습이 멀어진다.

아니, 소호의 몸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머릿속이 핑 돌면서 정신이 아찔했다. 깜빡깜빡 시야가 점멸한다.

소호는 헛숨을 들이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허억, 헉.”

가쁘게 숨을 쉬느라 가슴이 들썩거렸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혈류가 급속도로 빠르게 전신을 누비는 게 예민하게 모두 느껴졌다.

소호는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깜빡거리며 익숙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호흡이 가라앉자 몸 상태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뻐근한 등 근육.

손끝을 움직이는 감각이 어색했고, 눈가와 눈물샘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눈곱이 잔뜩 끼어 있었다.

“어…… 크흠! 콜록!”

소호는 뭔가 말해 보려다가 헛기침을 토해 냈다.

목이 심하게 말라 있었다.

“소호야?”

소호는 뻑뻑한 두 눈을 깜빡거리면서 초점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눈에는 초점이 금방 돌아왔다.

익숙한 목소리.

샛노란 경장을 입은 여인이 소호를 보고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

“장소호!”

소호의 어머니, 진휘연의 모습은 소호가 마지막에 봤을 때와 똑같아 보였다.

샛노란 경장에 하얀 얼굴, 뒤로 자연스럽게 내린 머리.

소호가 닮은 동그란 두 눈에는 소호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이제는 사십 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삼십 대처럼 보이는 여인이다.

진휘연은 다급하게 소호의 손을 붙잡고 이마를 짚으면서 소호의 몸을 챙겼다.

“정신이 들어? 몸은 어때? 아픈 데는? 열은 없어?”

소호는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난…… 괜…… 콜록. 콜록.”

“목이 마르구나. 여기. 여기 이거 마셔.”

소호는 진휘연이 건네주는 찻잔을 잡는 손이 자신의 손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감각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붙잡고 입술에 가져가자 미지근하면서 살짝 차가운 찻물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후우.”

목이 촉촉해지자 비로소 숨을 쉬기 편해졌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도대체 왜 기절해 있었는지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난, 왜 여기에……? 무슨 일 있었어?”

“너 정말.”

그 말이 무언가를 건드린 것일까.

진휘연의 미간이 좁혀지면서 눈썹 끝이 위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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