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28화 (457/686)

14권 2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2)

“어엇? 왜?”

진휘연은 소호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따끔한 감촉에 소호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왜, 왜 그래?”

“왜 그랬어?”

“……뭐를?”

“왜 아버지한테 대들었어?”

“…….”

“못된 말 하고 덤벼들었다면서? 장소호.”

소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진휘연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의 눈초리였다.

소호는 억울함에 손을 내저었다.

“내가 그랬어? 언제?”

진휘연은 한참 동안 소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말없이 소호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 주었다.

“어?”

소호는 당황했다.

이마에 닿는 손길은 따뜻했다.

이상했다.

언제 이렇게 작아진 걸까.

오랜만에 느껴 보는 어머니의 손은 생각보다 훨씬 가늘고 작고 햇살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만큼 자랐구나. 시간이 흘렀어.’

“어…… 그러니까…….”

소호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니까, 난 아버지가 백검회에 집혼기를 준 게 화가 나서 은자촌으로 왔고. 도착하면서 돌에 구멍 뚫려 있는 걸 보고……. 객잔에 들어와서……. 그다음에…… 그러니까…….’

소호는 눈을 끔뻑거렸다.

갑자기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드문드문,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 몇 개는 선명한데 그 외의 것들은 뿌옇게 흐려져서 이어지질 않았다.

‘아냐, 하나씩 떠올려 보자.’

소호는 조각난 기억의 파편에 하나씩, 하나씩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도망간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과 같다.

바닥에 남은 흔적들.

자그마한 단서들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서 그 실체를 점점 명확하게 떠올리는 것이다.

화가 난 아버지.

소리를 지르는 소호.

전력을 다해 내려쳤던 북천도.

잘려 나가던 지붕.

격렬한 싸움.

그리고 코앞으로 날아들던 무시무시한 창날.

“내가 이랬다고……?”

장님이 길을 나아가듯 더듬더듬 기억을 짚어 나간 소호는 마침내 올바른 결론에 도달했다.

소호는 자신의 상체를 만져 보았다.

얇은 옷감 너머로 단단하게 단련된 근육이 만져졌다.

피가 흐르는 상처는 없으나 명치 부근, 복부, 허리 근처에는 아직까지도 저릿저릿한 감각이 있었다.

소호가 아버지의 창에 격타당한 후유증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의 소호는 온몸에 융통무애한 호신강기가 흐르고 있던 상황.

그런데 장기린의 일격은 소호의 호신강기를 무자비할 정도로 쉽게 박살 내 버린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에 그 창.’

놀라운 것은 또 있다.

그만한 무공을 직접 몸으로 받았는데도 내공만 흩어졌을 뿐 육신에는 생채기 하나 없다는 점이 소호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그거 심검이었지? 그런데 상처 하나 없어……? 대체 얼마나 힘 조절을 잘 하는 거야? 휴우, 미쳤네. 미쳤어. 내가 왜 그랬지? 게다가 덤볐으면 제대로 좀 싸워 보지……. 또 졌네. 아버지한테는 대체 언제 이길 수 있는 거야? 아니, 시간이 지나면 이길 수는 있는 걸까?’

소호는 상상해 보았다.

원래 천하 영웅도 세월은 못 이긴다고들 하지 않던가.

십 년이 지나면?

이십 년이 지나면?

생각만이라도 좋으니까 한번 상상해 보려고 해도 도무지 소호가 이길 수 있는 모양새가 떠오르질 않는다.

환갑의 장기린?

호호백발이 된 풍운객잔의 주인?

말도 안 된다.

상상만으로도 강력하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약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뭔가 신비하잖아. 몸은 노쇠해도 엄청 강할 것 같은데? 이기어창을 숨 쉬듯이 날려 오는 것 아냐? 막, 창을 타고 날아다니고?’

소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헛웃음이 나온다.

아버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

얼핏 우스운 고민 같지만, 그런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소호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지금껏 소호가 만나 온 사람들 중에 아버지 장기린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한목소리로 소호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으면 아버지를 넘어서라고.

넌 할 수 있다고.

어서 아버지를 넘어서야 너는 네 맘대로 살 수 있지 않겠냐고.

‘헛소리야. 웃기지도 않네.’

소호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 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 했다.

그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건지, 그들은 정말로 알고나 있을까?

소호의 아버지를 이긴다고?

무쌍귀 장기린을?

“후우.”

소호는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애써 힘을 내서 기분을 바꿔 보았다.

“나 여기 얼마나 누워 있었어, 엄마?”

진휘연은 여전히 냉랭한 분위기였지만, 소호의 표정을 한 번 보더니 더 이상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소호를 바라볼 뿐이다.

“나 오래 누워 있었어? 얼굴 이상한가?”

소호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너 쓰러지고 열흘이 지났어.”

“열흘!”

“신의 어르신을 믿지만 솔직히 슬슬 걱정하던 차였어. 그래도 이렇게 일어나서 다행이네.”

소호는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눈길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랬구나. 열흘……. 오래도 누워 있었네. 와아, 이런 건 처음인데.”

“…….”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눈도 뻑뻑하고 목도 바싹 말랐지. 엄마, 너무한 거 아냐? 아들 간병 좀 해 주지! 아까 눈뜨면서 죽는 줄 알았어.”

소호는 눈이랑 목을 만지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분명 농담이었는데, 반응이 좋지를 않았다.

“정말, 내 아들이지만 넌 진짜…….”

진휘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네 입에 물을 얼마나 넣어 줬는 줄 아니?”

“어? 그랬어?”

“그래. 기절한 상태로도 물을 많이 먹더라.”

“하핫, 그랬구나. 고마워, 엄마. 덕분에 빨리 나았나 보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소호야.”

“괜찮아. 뭐든, 잘 해결되겠지.”

소호는 빙긋 웃었다.

어린 시절과 똑같은 장난꾸러기의 모습이다.

소호는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우울하고 침울한 얼굴은 은자촌의 악동, 장소호답지 않은 일 아닌가?

어떻게든 힘을 내서 쾌활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읏챠!”

소호는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가 가슴 언저리에서 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으으…….”

“얘는 정말. 함부로 일어나면 안 돼!”

“아냐, 아냐. 난 괜찮아, 엄마. 진짜로.”

소호는 머리가 핑 돌아서 침상을 붙잡고 잠시 균형을 잡았다.

소호는 무인이다.

무인은 자신의 몸과 허리에 찬 병기 하나만 믿고 살아가는 법.

도산검림(刀山劍林), 풍진강호(風塵江湖)의 세계를 오로지 몸 하나로 살아간다는 거다.

소호는 자신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미세한 한 치 범위까지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고 허리를 세웠다.

벽돌을 쌓듯 차츰차츰 힘을 더해 가는 기립근.

목뼈와 머리까지 똑바로 세워지자, 자세는 저절로 꼿꼿한 자연체를 유지했다.

“흐읍.”

소호는 거기서 더 나아가 진기를 끌어 올렸다.

소림비전 역근경.

그 광활하고 무한한 진기가 몸속을 구석구석 휘돌면서 신체의 혈도들을 살폈다.

“어…….”

불과 한 호흡 만에 소주천이 끝났다.

소호는 방금 알게 된 자신의 몸 상태에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근육도, 진기도, 훨씬 약해졌어. 왜지? 이건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가 아냐. 열흘? 그 정도로 이렇게는 안 돼. 이건…… 다른 이유가 있어.’

찌릿-.

약간의 고통을 호소하는 하단전을 만져 본 소호는 눈을 부릅떴다.

하단전.

아랫배.

허리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소호는 자신이 눈을 막 떴을 때부터 왜 그렇게 허전함을 느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집혼기……!”

소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없다.

소호의 힘의 결정.

그 작고 화려한 은 세공품과 반짝이는 호안석에서 흘러나오는 막강한 힘의 흐름이 낡아 빠진 밧줄처럼 뚝뚝 끊어져 있었다.

“엄마. 저기…….”

“왜? 걸어 보니 힘들지? 지금이라도 다시 눕고 싶지?”

“아냐, 그게 아니고. 혹시 내가 차고 있던 요대 어디 있는지 알아?”

“요대?”

진휘연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왔을 때는 없었어. 네가 전에 무산학관 출신이라면 차고 다닌다던 그 철 요대 말이지?”

“어, 그거 맞아.”

“못 봤어.”

소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알겠다고 답했다.

‘당장은 없어도…… 어딘가 있겠지. 흐름이 끊긴 건 아냐. 그냥, 좀 흩어져 있는 것 같은데…….’

소호는 그에 대한 생각은 나중으로 미뤄 두었다.

지금은 우선 상황 파악이다.

“와, 그러고 보니 너무하네. 할아버지들은? 나 은자촌 왔는데 아무도 안 오시는 거야? 여기 쓰러져 있는데도?”

“…….”

“할아버지들, 애정이 식었구나? 내가 너무 마을을 오래 떠나 있었나 봐. 섭섭한데?”

소호는 일부러 더 쾌활하게 말하며 걸음을 내딛었다.

“걷는 것 좀 조심해, 소호야. 무리하면 안 된다니까.”

“괜찮아, 괜찮아, 엄마.”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점점 더 확실하게 균형을 잡아 갔다.

진휘연은 그런 소호를 보며 억장이 무너진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들 몇 분만 빼고 다 하산하셨어.”

“어?”

소호는 귀를 의심했다.

“하산? 할아버지들이?”

“그래.”

“왜?”

“왜일 것 같아, 아들?”

진휘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날카로운 가시가 날카롭게 돋아나있었다.

“……혹시 나 때문이야?”

“그래.”

“왜? 내가 와서……. 아버지랑 싸우긴 했지만. 비슷한 일은 예전에도 있었잖아?”

이번엔 감정이 조금 격해졌을 뿐. 예전에 은자촌을 나가고 싶었을 때도 아버지와 내기를 하고, 대련도 하고 그러지 않았던가.

‘그때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일 아닌가?’라고 소호는 생각했다.

“비슷한 일이라고?”

진휘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전혀 달라. 네 아버지는 물론이고 할아버지들도 많이…… 화가 아주 많이 나셨어.”

“그……래?”

소호는 대체 어째서 그런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넌 정말…….”

그런 소호를 답답하게 바라보는 진휘연도, 소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에 항상 소호를 따스하면서도 엄격하게 품어 주던 어머니는, 지금만큼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호를 응시했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

“……!”

“장소호, 오늘 마을을 한 번 돌아봐. 그러고 무엇 때문에 네 아버지와 할아버지들께서 그렇게 화가 난 건지…… 확실히 알아내.”

북풍한설이 따로 없다.

차가운 목소리.

허리에 손을 얹은 그녀의 주변으로 무서운 살기가 넘실거리는 듯했다.

이럴 때는 말대답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아, 알았어.”

천하의 천무공자 장소호도 어머니에겐 당할 수 없는 법.

소호는 당황하면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진휘연은 그런 소호를 부축해 주지 않았다.

***

“엄마가 왜 그러는 거지?”

풍운객잔의 뒷문으로 나온 소호의 눈에 너무나 익숙한 은자촌의 정경이 보였다.

흑산과 백산. 그리고 그 사이에서 푸르고 생기 넘치는 나무로 뒤덮인 영산까지.

삼산에 둘러싸인 분지 속에는 시야가 닿는 끝까지 펼쳐진 논밭이 펼쳐져 있다.

봉긋하게 솟아 있는 언덕은 적왕이 풀을 뜯는 곳이고, 반대쪽에 경사가 가파르게 기울어진 밭은 추묵환이 아끼는 더덕밭이다.

“여긴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라니까? 늘 똑같아.”

이러니까 지루해서 뛰쳐나간 거라 생각하면서 걷는 소호의 눈에 멀찍이서 열심히 더덕을 캐고 있는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한 명은 키가 매우 작은 꼬마 같았고, 다른 한 명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주는 소호 또래의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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