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29화 (458/686)

14권 3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3)

‘서인이?’

소호는 더덕밭에 쭈그려 앉은 또래 청년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무산학관에서 육 년이 넘게 동고동락한 절친한 친우인데.

멀리서 머리끝자락만 봐도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서인이가 왜……? 아 맞다, 여기에 있었지. 그런데 서인이가 더덕을 캐? 손님으로 와 있는 거 아니었어?’

소호는 이 마을에서 아무나 더덕을 캘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장강용왕 추묵환이 애정을 다해 기르는 더덕밭이다. 감히 아무나 손을 댈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실제로 소호가 어렸을 때 먹성 좋은 적왕이 더덕밭에 뛰어들어 더덕밭을 헤집어 놓은 일이 있었다.

파헤쳐진 더덕밭을 본 추묵환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곧바로 범인을 찾아갔고, 괴물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소와 초가집 세 채를 박살 내는 격투 끝에 적왕을 때려눕혔다.

그때의 격렬한 싸움은 소호에게도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근육질 거구의 노인과 괴물처럼 커다란 소의 대결이라니.

결국 적왕은 뿔이 반쯤 잘려 너덜거리는 상태로 외양간에 열흘간 가둬졌다. 추묵환은 만수노사랑 대판 싸워서 무려 육 개월간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형! 이, 이쪽이 남았, 어요!”

“그래? 내가 마저 할게! 그냥 둬!”

“내, 내가 할게요.”

“어어? 왜 속도를 올려?”

“히힛.”

“왜 그래. 내가 한다니까?”

말을 더듬는 꼬마가 땅속에 손을 퍽퍽 찔러 넣으며 점점 속도를 올리자, 조서인은 승부욕을 느꼈는지 더욱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조서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

왜일까.

그 모습을 보던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기척을 감췄다.

조서인이 뭔가를 느낀듯 힐끔 돌아보았지만, 이미 소호는 커다란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소호는 숨을 골랐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너 지금 이상해. 너무 흥분한 것 같아. 아버님께 예의가 아니잖아.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건 우리 가족 일이야. 끼어들지 마.”

화풀이하듯 조서인에게 모질게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탁- 소리가 나게 조서인의 손을 쳐 냈을 때, 그 순박한 얼굴에 드러나던 상처 입은 표정이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아, 정말…….’

소호는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했다!”

“그럼 이제 적왕 밥 주러 가자!”

“혀, 형, 깜돌이도…….”

“아! 오늘 깜돌이랑 노는 날이구나!”

“나, 나 혼자 갈까요?”

“……에이, 무슨 소리야! 내가 할게! 걱정 마!”

조서인은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데도 불구하고 강한 척을 했다.

열정이 넘치는 이인조는 다음 일을 하겠다며 온 마을을 뛰어다녔다.

햇빛에 바싹 마른 풀을 외양간에 가져다주고, 커다란 곰과 씨름-목숨을 건 사투-을 하면서 놀아 주고.

온 마을의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원래는 은자촌의 노인들이 하던 일을 군소리 하나 없이 도맡아 했다.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해가 떠 있을 때는 늘 소일거리를 하는 노인들로 북적였을 텐데.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는 건 조서인과 꼬마 소년 두 사람뿐이었다.

‘할아버지들. 정말로 하산했구나.’

지켜보던 소호는 복잡한 심정을 느꼈다.

일을 다 끝낸 조서인은 눈 밑이 퀭하니 급격히 피곤해 보였다.

“집에 데려다줄게, 대철아.”

“아, 아니에요, 형.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아.”

나이답지 않게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한 뒤, 폴짝폴짝 뛰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조서인은 대철이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아아. 대철이는 진짜 힘도 좋아. 난 내공 안 쓰고 하려니까 너무 힘든데.”

조서인은 그제야 약한 모습을 드러내며 신음했다.

“아우우.”

어깨를 주무르고 허리를 두드리는 조서인의 행동은 팔순 노인 같았다.

소호는 귀식대법을 풀고 조서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천천히.

다가가면 갈수록, 긴장이 되고 입이 바싹 말라 왔다.

“쟤가 대철이였구나. 신기하다. 내 기억 속에는 걷지도 못하는 애기였는데, 벌써 저렇게 컸네?”

“……!”

조서인은 한 손으로는 허리를 두드리고, 한 손으로는 어깨를 주무르던 자세 그대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조서인은 두 눈을 부릅뜬 표정 그대로 석상처럼 굳었다.

소호는 빙긋 웃어 주었다.

“소, 소호?”

“잘 있었어, 서인아?”

조서인은 놀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길 잠시.

“소호야!”

조서인은 벌떡 일어나서 소호에게로 달려들었다.

“우왓, 왜, 왜 그래?”

“왜 일어나 있어! 몸은 괜찮은 거야? 우 어르신은? 일어나면 우 어르신부터 찾아뵈어야지!”

“어어. 그래?”

“당연하지!”

조서인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상처는? 내공은? 혈맥은?”

계속해서 온몸을 더듬는 손길에선, 혹시 다친 곳이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은 기백이 느껴졌다.

반가움과 걱정.

거기에 진심 어린 우정이 전해져 온다.

소호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숨어서 지켜보던 내가 부끄러워지네. 그렇게 대했었는데, 서인이는 화나지 않았구나…….’

소호는 민망해져서 볼을 긁적였다.

“왜, 왜 이래? 괜찮아. 난 멀쩡해.”

“그럴 리가 없어! 너 사부님한테 얻어맞고 날아갔을 때 내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고!”

“어?”

소호는 귀를 의심했다.

“사부……님?”

“어…….”

“사부님이 누구야?”

소호의 어색한 물음에 조서인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그게. 그러고 보니 내가 제대로 말 안 했구나.”

조서인은 쑥스러워하면서 이야기했다.

“크흠, 그게.......”

“.......”

“소호 아버님께서 진짜진짜 감사하게도, 날 좋게 봐주셔서……. 무공에 가르침을 주시기로 했어. 그분께선 구배지례니 사승(師承)의 예니 그런 거 하지 말라고는 했는데, 그래도 내겐 존경하는 사부님이셔.”

“아…….”

“알면 알수록 정말 대단한 분이셔서, 내가 배우면서 그 발끝이나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를 믿어 주셨으니 기대에 부흥해야 하는데 솔직히 걱정이야.”

“어, 그래……?”

들떴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소호는 당황했지만 표정을 굳히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어, 거기다가 태사부께서 내공도 다듬어 주셨어.”

“태사부? 태사부는 또 누구야?”

소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점입가경이랄까.

행복한 얼굴로 배시시 웃는 조서인의 말들은 모두가 소호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 것들이었다.

“태사부님은 태사부님이지. 사부님의 사부님 계시잖아?”

“아버지의 사부님?”

“영산에 계신 그분 말이야.”

“영산이면, 구양 할아버지?”

“어! 네가 예전에 무공을 익혔나 궁금해서 그분의 다리를 걸었다며?”

“내가 그랬나……? 근데 구양 할아버지가 아버지 스승이셨어?”

조서인은 소호의 반문에 되레 당황한 듯 보였다.

소호가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었다.

“어, 그게…….”

조서인은 당황하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 들었어. 예전에 무공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에 태사부님을 만났대. 첫 만남은 별로 안 좋았지만, 그때 크게 깨달은 점이 있어서 가르침을 받으셨다더라.”

“그래……?”

소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묘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약관의 나이면 적지 않은 나이다.

무산학관을 다니고, 무림행을 하면서 온갖 경험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기분은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 기분은 뭐지?’

뱃속이 느글거리는 것 같았다.

울컥 치솟는 알 수 없는 감정.

심장이 빠르게 뛰고 폐부는 싸늘하게 식어 갔다.

‘아버지가 서인이는 마음에 들어 했구나? 태사부는 또 뭐야. 구양 할아버지가 아버지 사부였다는 걸…… 왜 난 몰랐던 거지? 이러면 서인이가 나보다 아버지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잖아?’

생각할수록 더욱 기분이 복잡해져 갔다.

그 침묵이 어색했던 걸까.

조서인은 머쓱해졌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러니까…….”

소호는 침묵했다.

“나에게는 꿈만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솔직히 요즘 모든 것들이 믿기지가 않아.”

“……그래?”

“미안해. 내 얘기만 했네. 그래서? 소호야, 넌 몸은 좀 어때? 진짜로 괜찮은 거야? 지금 우 어르신 뵈러 가지 않아도 되겠어?”

“괜찮아. 조금 피곤한 것 말고는. 서인이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조서인은 소호의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면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소호야. 그날의 일은 다 기억하고 있어?”

“……조금은.”

“조금? 기억이 끊어져 있어?”

“사실 그래.”

“그렇구나. 역시 기억이 잘 안 나는구나. 소호야. 솔직히 그날의 넌 너답지 않았어.”

“…….”

“혹시 주화입마 같은 게 왔던 거야?”

조서인은 소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소호는 입을 몇 번이나 달싹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아냐, 그런 거.”

“그래……?”

“그보다 나도 묻고 싶은 게 있어. 서인아.”

소호는 한적하고 조용한 은자촌을 둘러보았다.

원래부터 몇 사람 살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 분위기는 마치 마을 전체에 소호와 조서인 두 사람밖에 없는 듯한 분위기지 않은가.

“더덕도 캐고, 적왕 밥도 주고. 원래 그런 일들을 했던 거야?”

“어? 어어, 맞아. 내가 은자촌에 온 다음 날부터 일손을 좀 돕기 시작했어.”

“……그래? 내가 하던 일들을 네가 다 했구나.”

“그랬어? 역시, 너도 했을 것 같았어. 대단하다, 소호야. 어릴 적부터 일손을 도왔던 거야? 난 지금도 힘든데!”

“그냥, 응. 자연스럽게 했었어.”

“역시!”

조서인은 소호와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에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반가워했다.

반대로 소호의 기분은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아만 갔다.

“다른 할아버지들은? 그리고 아버지는? 다들 어디 가셨어? 왜 하산하신 거야?”

“아…….”

소호는 조서인의 반응에서 당황과 난감함을 느꼈다.

“어어, 그게, 말하기가 좀 어려운데…….”

“……말하기가 어려워?”

“내가 말해도 되는 건가 싶어서.”

조서인은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 소호 네가 다친 거나, 그때 이상했던 것도. 다 누군가의 탓이라고. 약속을 어겼다고……. 말씀하셨어.”

“약속…….”

“사부님이 하산하신 건 그 때문이야. ‘해야 할 일’을 하고 오신다고 말씀하셨어. 다른 어르신들은 거기에 한 팔 보태겠다고 내려가셨고.”

조서인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큰일을 겪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 사실은 마을에 남아 계신 분들도 다 내려가고 싶어 하셨어. 다만, 우 어르신은 소호 너를 간병해야 한다고 남으셨고, 만수노사 어르신이랑 광 어르신은 자기는 마을에 있는 게 돕는 거라면서 남으셨고.”

소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니 진휘연이 한 말이 떠오른다.

왜 어머니가 화를 냈는지.

장소호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다 나 때문이었구나. 내가 자초한 일들이었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절망.

허하게 뻥 뚫린 마음의 빈틈.

소호는 우울하게 바닥으로 침잠했다.

땅 밑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가서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히히힝-.

“어?”

조서인이 깜짝 놀라면서 소호의 등 뒤, 멀리 떨어진 무언가를 보며 경호성을 내뱉었다.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두 마리.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풍운객잔에 쌍두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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