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4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4)
마부는 쌍두마차 안에 있는 사람을 황실의 귀빈처럼 정중하게 대했다.
그가 서둘러 내려와 문을 여는 모습이 마치 황실을 귀빈을 대하듯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냄새가……!”
소호는 손가락으로 코끝을 매만졌다.
마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 훅- 하고 풍겨 나오는 혈향은 범상치 않았다.
코끝이 저릴 정도였다.
본능적으로 불쾌해지는 비린내가 나는데도 마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쿵. 쿵.
붉은색의 번쩍번쩍한 옷을 입은 사람이 마차에서 내려섰다.
마부는 작은 실수도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귀빈의 옷을 들어 주기 위해 정중하게 손을 뻗었으나 거절당하자 지체 없이 물러섰다.
“이만 돌아가도 좋소.”
“예, 대인.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황급히 달려왔던 소호와 조서인은 그가 마부와 인사하는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익숙한 말투, 오랫동안 들어온 목소리였다.
쌍두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장기린이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과 하나뿐인 제자가 둘 다 장기린을 못 알아볼 정도로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피투성이……?”
새빨갛고 화려한 비단 장포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모습이 강렬했다.
머리는 산발.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까만 가루는 온몸에 뒤집어쓴 피가 굳어진 흔적이다.
그뿐인가.
자세히 보면 소맷자락에도, 가슴팍에도, 입고 있는 옷에 전투의 흔적이 안 남아 있는 부분이 없다.
심지어 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피가 굳은 듯한 검은색 덩어리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악전고투.
보보마다 혈로를 만들며 지나치는 그런 싸움을 했어야 저런 몰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전투를 치르셨기에……?”
조서인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소호도 조서인도 강호행을 해 본 몸.
이 정도로 피 냄새가 배려면 일반적인 싸움은 아니었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온몸이 피에 젖을 정도의 혈투.
밖에선 살겁이라 불릴 만한 그런 싸움을 밤새워서 지속해야 저 정도 피를 뒤집어쓰게 된다.
장기린은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라앉은 눈빛이 무저갱처럼 차갑다.
전신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도가 소호와 조서인 두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들었다.
“아버지.”
소호는 어색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오셨…….”
“서인, 마을은 별일 없었나?”
장기린이 바라보는 곳.
그곳엔 조서인이 서 있었다.
장기린은 소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예? 아, 네. 큰일은 없었어요. 그…….”
조서인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소호를 보면서 당황했지만, 고개를 몇 번 붕붕 저은 뒤 정중하게 대답했다.
“하산하신 어르신들께서 아직 돌아오진 않으셨습니다.”
“그런가. 어르신들께 폐를 끼쳤어.”
장기린은 씁쓸하게 중얼거린 뒤 성큼성큼 걸어서 지나갔다.
여전히 소호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다.
내재된 분노.
맹수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억눌린 위압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으득-.
소호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잘못한 건 안다.
왕진에게 집혼기를 받은 것.
아버지에게 못된 소리를 하며 대들었던 것.
다 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로 무시받는 것.
참기는 힘들었다.
“난 왕진을 적으로 생각했어요.”
우뚝.
장기린의 걸음이 멈췄다.
“그 사람이 준 은룡패를 이용해서 신수비처를 무너뜨렸어요. 거기서 집혼기가 어떤 건지, 왕진이 그걸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을 없앴는지도 알았어요.”
소호는 말을 하면서 점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힘은 힘일 뿐이에요. 은룡패도 힘이죠.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을 거예요. 그 힘이 옳은지 그른지는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고요.”
소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흑시군 중에 민초들을 괴롭히는 도올을 죽였어요. 도철도 죽이진 못했지만 쓰러뜨렸고요. 흑시군은 내 말을 순순히 듣고 따르겠다는 자들만 남기고 다 벌을 주거나 쫓아냈어요! 이 모든 건 대의를 위해서! 그런데!”
소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된 거잖아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왜 날 그렇게 미워하냐고요!”
평생 넘치는 사랑과 애정을 받으면서 자라왔다.
장기린의 매정한 태도를 묵묵히 받아들이기엔 소호의 자존감이 너무 컸다.
“…….”
장기린은 잠시 말없이 소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은 새카맣다.
손톱 밑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새어 들어가 검게 굳어진 탓이다.
이건 흔적이다.
장기린이, 소호의 복수라는 기치를 내걸고 황실을 향해 진격했던 의지의 증명이다.
“전부 다.”
눈빛을 깊게 가라앉힌 장기린은 한겨울의 쇳덩이처럼 차가웠다.
소호는 목이 메는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도대체 뭐가……!”
“힘이 옳은지 그른지는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고? 우습구나.”
장기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남이었다면 대화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난 너와 똑같은 말을 하는 자를 보았다. 그는 당시에 꼬마에 불과했던 나를 동굴에 가두고 또래 아이들 수백 명과 서로 죽이게 만들었다. 거기선 단 한 명만 살아남았지. 그게 바로 나다.”
소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옆에 서 있던 조서인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숨을 멈추었다.
장기린이 처음으로 꺼낸 이야기.
아이들에게는 처음으로 말하는 과거의 비사다.
“그자가 그러더군. 어떤 방식으로 얻었든 힘은 힘에 불과하다. 그걸 네가 나라를 위해서 쓰면 충신이 되는 거라고……. 그렇게 말했다.”
“…….”
“널 왜 미워하냐고? 천만에. 난 널 미워하지 않는다. 그저 실망했을 뿐이다. 소호. 장소호. 내 하나뿐인 아들아.”
울컥.
소호의 눈빛이 활활 타오른다.
차라리 미워하는 게 더 나았다.
그건 이유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하지만 실망이란다.
소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머리로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은 없고 대의에 대한 변명만 한다. 왕진의 말이 맞았군. 내가 아비 노릇을 잘못했어.”
“……!”
심지어 장기린의 자책은 소호를 상처 입혔다.
항상 강했던 아버지.
도저히 이기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던 강직한 사람이 처음으로 잘못을 인정한 게 소호를 잘못 키웠다는 말이었다.
“너는 스스로 아귀 같은 삶에 뛰어들었다. 조급해하고 초조해하면서 더 큰 힘을 바라며 집혼기에 손을 벌렸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장기린은 손으로 풍운객잔과 그 너머에 있는 은자촌을 가리켰다.
“이곳엔 모든 것이 있었다. 네가 지루하다면서 버리고 나간 이곳에, 네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단 말이다.”
아마 소호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장기린은 알고는 있었으나,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말했다.
“너는 굳이 아귀 같은 힘에 손을 뻗었다. 피를 보고, 다른 사람의 혼백을 빼앗아 묶어 두어야만 강해지는 집혼기, 그걸 굳이 선택했다. 내가 반대할 걸 뻔히 알았기에 나에게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휘연에게도 말하지 않았지. 내가 너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지금 얻은 것은 무엇인가? 알량한 명성인가? 또래 중에 조금 빨리 두각을 나타낸 힘? 우습다. 서인이를 보아라.”
장기린은 이글이글 불타는 듯한 눈으로 조서인을 바라봤다.
“저 아이는 이곳의 가치를 알아본다. 그리고 성실히 노력하고, 모두와 어울려 살아간다. 두고 보아라. 그 아이가 너를 넘어서게 될 거다. 이 마을에 있기 때문에. 서인이는 훨씬 더 강해질 거다.”
조서인은 당황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지극히 높게 평가하는 말에 감동을 받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반면에 소호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나를 넘어선다고?”
소호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부글부글 끓던 솥에서 물이 넘치듯, 치솟아 오른 감정이 결국 뚜껑을 열고 폭발해 버렸다.
조서인은 절친한 친우다.
하지만 그가 마을에 있기 때문에 소호를 넘어선다?
납득할 수 없다.
인정할 수도 없다.
무산학관에서 소호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뭘 모르는 아이들은 늘 말했다.
재능 덕분이라고.
장소호처럼 놀고먹는 데 타고난 재능 덕분에 강해지는 건 억울하다고.
소호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치고 싶었다.
다들 모르니까 하는 말이다.
소호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잠을 줄여 가며 새벽에 일어나, 항상 안 보이는 곳에서 수련하지 않았다면 소호는 지금처럼 강해지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아버지가?’
마치 모든 노력을 부정당한 것 같았다.
게다가 하나뿐인 아버지의 입에서, 절대로 소호를 인정해 주지 않는 완고한 아버지가 서인이는 칭찬한다는 사실이 소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으득-.
소호는 이를 갈았다.
평소에는 할 수 없을 모진 말들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서 서인이를 받아들였어요? 나에 대한 대체품으로?”
“서인이는 누구의 대체품도 아니다.”
“거짓말. 그리고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건 나예요. 서인이가 아니고.”
“오만하군.”
“아버지야말로. 이런 산골에서 풀이나 뜯고, 오지도 않는 손님 바라보면서 객잔이나 청소하는 삶? 여기에 모든 게 있다고요? 아니에요. 천금을 준다 해도 사절이에요. 내가 싫다고요! 난 무림에서 강호의 영웅이 되어서 사람들을 구할 거예요!”
장기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관심한 듯한 얼굴.
차갑고 위압적인 얼굴로 그저 소호를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너는 틀렸다.”
“아뇨. 틀린 건 아버지예요. 제발 인정 좀 해 주면 안 돼요? 난 해낼 거예요. 아버지 못지않게 큰 인물이 되고 말 거라고요. 어떻게 하면 믿어 줄 거예요?”
소호는 장기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적광이 번뜩이는 두 눈에선 뜨거운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믿음이라.”
장기린은 그 짧은 새에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진중한 얼굴로 냉랭하게 제안을 건넸다.
“네가 그리 자신이 있다면 증명해라.”
“뭐를요?”
장기린은 조서인을 가리켰다.
“네가 재능이 있고 강하다는 걸. 마을에서 조금 머무른 서인이와 겨뤄 보면 답이 나오겠지.”
“……!”
소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조서인을 힐끔 쳐다봤다.
서인이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소호가 조금 전에 한 말.
그 안에 숨어 있는 행간의 의미.
그 모든 것들이 조서인을 혼란시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장기린은 한술 더 뜨는 제안까지 한 탓이다.
“내가 소호랑……?”
조서인은 크게 당황했다.
반면에 소호는 호승심을 자극당한 듯 곧바로 답했다.
“알겠어요. 지금 바로 붙을까요?”
소호는 자신만만했다.
그에 반해 조서인은 입을 멍하니 벌리고 굳어 있었다.
장기린은 그런 조서인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 한번 겨뤄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