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5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5)
소호가 풍운객잔에 와서 아버지와 대결을 벌였던 날.
장기린은 조서인을 데리고 한적한 공터로 데려가서 다짜고짜 창술의 시연을 보여 주었다.
조서인은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은 채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었다.
생창(生槍).
달인이 손에 든 창 한 자루는 마치 스스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움직였다.
창끝의 움직임이 나비와 같다.
일렁일렁.
넘실넘실.
나비는 날갯짓을 하는 속도는 느린데, 기기묘묘하게 전후좌우로 움직여서 움직임을 예측하기가 힘들지 않던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그러했다.
분명히 정면을 노리던 창끝이, 어느 순간 나풀대며 바람을 타더니 적의 귓가에서 속삭인다.
어린아이처럼 속삭이길 잠시, 그 후에는 갑자기 위로 훌쩍 솟아올라 상대방의 머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와…….”
조서인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일연적룡무의 기본 투로.”
치잉-.
창날이 떨린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정면을 겨누던 창이, 한순간 거리를 좁히며 뻗어 나갔다.
후우우웅-.
바람과 파공음은 그 뒤에 따라온다.
조서인은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자세.
시선.
발의 위치.
창을 쥐고 있는 파지법.
내공의 흐름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외적인 건 다 외워야 무공을 배우는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게 일연적룡무 제일식. 관부에서 가르치는 용의 수염(龍髥) 자세와 비슷하다. 핵심은 속(速), 그리고 관(貫).”
우우웅-.
나비의 움직임이 끝나니 이젠 벌이었다.
벌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하나였던 창이 수십 개로 분열했다.
“……!”
조서인은 헛숨을 들이킬 정도로 크게 놀랐다.
손오공의 분신술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천수여래처럼 늘어난 손.
수십 개의 창날.
그리고 그것들이 일제히 동시에 뻗어 나와 사방을 휩쓰는 압도적인 광경!
“이게 일연적룡무 제이식. 핵심은 환(幻), 그리고 분(分).”
흠잡을 곳이 하나 없는 완벽한 창술 시연은 그 끝을 향해 달려갔다.
환검(幻劍)처럼 화려하던 창술이 갑자기 다시 고요해진다.
중단을 겨누고 있을 뿐인데, 폐부를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온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조서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순속의 쾌공이었던 일연적룡무 제일식과 닮아 있지만, 지금 것은 전혀 다른 무공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장기린에게서 흐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껏 조서인이 보아 온 것들과 전혀 궤를 달리하는 한 차원 높은 경지의 무공이 분명했다.
우우웅-.
천천히.
정면으로 뻗어나가는 창.
그곳에는 기교도 막강한 힘도 없다.
그렇다면 약한가?
아니.
전혀.
그저 우직하게 나아갈 뿐이지만 그 안에는 만변(萬變)의 변화와 심검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파앗!
장기린은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보여 주기 위한 시연에 전력을 다할까.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저 형(形)만 갖췄을 뿐인데 창의 움직임이 끝나는 순간, 창끝에서 일렁이던 무언가가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후우웅-.
조서인은 그때 분명하게 느꼈다.
보이지는 않지만 창끝에서 시작된 일정한 파동이 거대한 공동을 만들어 버렸다.
커다란 삽으로 땅을 한 움큼 파 낸 것과 같다.
사람 열 명 정도는 순식간에 삼킬 것 같은 힘의 흔적.
만약 자신이 저곳에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절로 생각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
조서인은 말을 잊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조차 잊었다.
죽은 듯이 앉아서 방금 눈앞에서 본 차원이 다른 ‘창술’의 진면목을 계속해서 곱씹을 뿐이다.
“이게, 일연적룡무 제삼식. 내가 쓸 수 있는 현재 가장 강한 무공이다. 핵심은 심(心)과 의(意)의 합일.”
장기린은 길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창을 거뒀다.
무공의 시연도 그랬지만, 마지막에 거두는 모습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대단한 무공을 펼친 직후의 버거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아감과 물러섬이 완벽하게 조화된 모습.
융통무애.
조서인은 장기린의 모습에서 완성된 무인이란 어떤 건지 그 이상향을 보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일연적룡무다. 어떻게 생각하지?”
“이건…….”
조서인은 입만 벙긋거릴 뿐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자신이 쓸 수 있는 어휘력 중에 지금 그가 느끼는 감상과 가장 비슷한 말을 골랐다.
“신선이 만든 게 분명합니다.”
장기린은 예상 밖의 평가였는지 눈빛이 흔들렸다.
“뭐라고?”
“이렇게 완벽한 무공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게 아닙니다.”
“하핫.”
장기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입바른 소리하지 말라며 타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한 사람은 조서인이다.
산골 소년처럼 순수하고 속내를 숨길 줄 모르는 청년.
말을 하면서도 방금 본 일연적룡무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된 청년의 말을 어찌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가. 좋아 보인다니 다행이군.”
장기린은 나직하게 웃으면서 조서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
“예?”
“소호의 일. 그 아이의 행동에 당황했을 테지?”
조서인은 당치도 않다는 듯 양손을 내저었다.
“아뇨, 조금 놀라긴 했지만, 소호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믿어요.”
“그런가?”
“네. 저는 그저 제 가장 친한 친구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요.”
조서인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소호를 떠올리자 다시 한 번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겨났다.
소호.
무산학관에서 둔재로 취급받던 자신을 끌어 주고, 응원해 주던 진정한 친구.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자신의 손을 쳐 내던 모습에는 조금 놀랐지만 아마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던 탓이 분명했다.
소호의 행동이 진심일 리가 없었다.
‘사부님이 좀 너무 엄한 것 같긴 한데. 이유가 있으시겠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외인(外人)이 끼어들 일은 아니다.
그는 자중하며 말을 아꼈다.
“난 이제부터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처리하러 간다.”
장기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는 모습에서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앞으로 너는 일연적룡무를 쓰게 될 거다. 아까 신선이 만든 무공이라고 하였나? 맞는 말이다. 검선께서 만드셨고 거기에 내 심득과 경험을 담았다. 지금부터 네게 전수할 청명경 일만자와 함께 수련하면 너는 언젠가 무쌍(無雙)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
검선의 사승을 잇고, 무쌍의 이름을 잇는다는 뜻이다.
장기린이 그 사실을 담담하게 말한다는 점이 조서인에게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엄청난 무게감이 조서인을 짓눌렀다.
“아……!”
“서인.”
“네, 사……부님.”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느냐?”
장기린은 사부라는 호칭을 거절하지 않았다.
조서인은 깊은 감격을 느꼈다.
‘사부께서 인정해 주시는데 무슨 일이든 못할까! 뭐든 해내겠어!’
조서인은 무릎을 꿇은 채 포권을 취하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이건 명령이 아니다. 그저, 부탁이지.”
장기린은 무심한 듯, 나직하게 말했다.
“소호의 친구로서, 언젠가…… 소호가 잘못된 길을 간다면 막아 주었으면 한다.”
“네……?”
조서인은 방금 전의 다짐도 잊고, 너무 놀라서 망연히 장기린을 올려다보았다.
“할 수 있겠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조서인은 알아챘다.
장기린의 고뇌,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깊은 마음의 편린이 느껴졌다.
‘소호야. 너는 사랑받고 있구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
부러움.
조서인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대답했다.
“소호가 잘못된 길로 갈 리는 없지만…….”
장기린의 부탁은 조서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절친한 친구가 잘못된 길을 간다면?
당연히 말려야 하지 않겠는가.
애초에 부탁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서인은 진심을 담아 약속했다.
***
스릉-.
소호가 칼을 뽑아 드는 동작은 여전히 흠잡을 곳 없이 깔끔했다.
시선은 명확했고 땅을 딛고 선 하체는 굳건하고 안정적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서인은 소호의 강함이 저 안정적이고 유서 깊은 기수식에서 나온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소호의 강점.
그건 상대방이 보기에 저 기수식 다음에 어떤 무공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무당의 신법을 이용해 부드럽게 움직이며 사방을 조여 올 수도 있고, 소림사의 무공으로 맹수처럼 뛰쳐나와 단번에 약점을 노릴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예측 불허.
소호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소림이든 무당이든.
어쩌면 세외의 이름 없는 문파의 무공일지라도 필요하다면 자유롭게 갖다 쓴다.
온갖 무공으로 변화무쌍하게 몰아쳐서 상대방을 반드시 쓰러뜨리는 것이야말로 천무공자의 특징 아니던가.
“도대체 어쩌다가…….”
조서인은 난감했지만, 한편으론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그동안 소호의 저 기수식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서로의 습관?
싸움의 흐름?
위급할 때 하는 대처 방식?
모두 알고 있다.
소호가 조서인의 무공을 꿰뚫어 보듯, 조서인은 소호가 공격을 받을 때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는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무산학관에서 하루에 한 번씩은 반드시 대련을 했던 두 사람이다.
물론 결과는 일방적이었지만, 조서인은 소호와 겨루는 것 자체가 영광스럽고 좋았었다.
‘그때는 소호가 많이 봐줬었는데……’
그랬던 소호와 이제는 진심으로 싸우게 되다니.
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다.
‘사부님이 원하시는 일이다. 내가 막아야 해.’
소호의 언동.
감정의 격발.
어느 쪽이든 올바르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막는다. 사부님과의 약속이야.’
조서인은 강하게 마음먹었다.
궁금하기도 했다.
일연적룡무.
이제 막 발을 들인 정도에 불과하지만, 소호를 상대로 그 무공은 얼마나 통할 것인가.
“생각은 다 했어?”
친절한 질문과 달리 소호의 두 눈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다 했어, 소호야.”
쿵.
조서인은 창대를 세워서 땅을 한 번 두드렸다.
옅은 진동이 손을 타고 올라온다.
치이잉-.
기분 좋은 창날의 떨림이 의지를 북돋아 주었다.
비스듬히 세우는 창대.
창날은 소호의 중단과 상단 사이.
목 언저리를 노리고, 창을 붙잡은 오른손은 허리에 붙인 채 언제든 앞으로 찌를 준비를 했다.
발가락으로 땅을 움켜쥐듯 강하게 버티고 선 하체.
내공을 끌어 올려 준비한 허리의 반동.
왼손은 쫙 펼친 채 정면으로 뻗어 화살을 겨누듯 상대방을 조준한다.
“흐음?”
소호의 안색이 바뀌었다.
지금까진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경쟁심만 가득했는데, 지금은 조서인이 못 보던 자세를 취한 것에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너…….”
“간다!”
조서인은 소리쳤다.
이왕 겨루게 된 것.
검선의 사승.
무쌍귀 장기린의 제자가 된 자로서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었다.
키이이잉---.
창날이 울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
장기린의 모습을 눈과 마음에 새기고, 지난 십여 일간 잠을 줄여 가며 연습한 일연적룡무가 지금 이곳에 처음 선을 보였다.
‘꿰뚫는다. 속! 관!’
창끝에서 소호의 가슴 한가운데까지.
조서인은 창을 앞으로 뻗었다.
두 개의 점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해 내찌른 창이 공간을 관통했다.
따아아앙-!
“……!”
다급하게 들어 올린 소호의 칼이 당장이라도 구멍이 뚫릴 듯 휘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