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33화 (462/686)

14권 7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7)

패배.

소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아버지 장기린과의 대결은 논외니 빼 놓더라도. 유준과 무림맹주인 백연과의 대결에서 졌을 때에도 소호는 패배감을 느끼진 않았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뿐 전력을 다한다면 다음번엔 이길 수 있는 상대.

그 정도의 느낌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다르다.

소호는 살아오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심정적으로 큰 충격과 자괴감을 느꼈다.

조서인이 무신(武神)이라서?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조서인.

무산학관의 둔재라고 불리며 언제나 소호를 우러러 보던 순수한 소년.

소호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대로 된 무인이 되지도 못했을 아이.

그런데 그런 아이가 자신을 쓰러뜨렸다.

그것도 소호가 만든 거나 다름없는 ‘조가창법’을 이용해서!

으득-.

소호는 가슴속에서 넘쳐흐르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조가창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했구나. 내 거리감을 비틀고, 속도를 더 빠르게 했어. 서인아, 서인아. 정말 대단하구나.’

조서인의 노림수가 이제야 훤히 보였다.

왜 그걸 보지 못했을까.

아마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눈앞에 있는 걸 보지 못했다.

“승리……라고?”

소호는 큰 타격을 받아 울렁거리는 내공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몰아쉬었다.

‘안 돼, 진정이 안 된다.’

후우. 후우. 후우.

소호의 숨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숨소리뿐만이 아니라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

손끝이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혈류가 빨라지고 나자 눈앞이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뚝.

머릿속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드는 순간, 온몸이 홀가분해졌다.

“흐으으으!”

우득-.

소호는 부러진 어깨뼈를 제자리로 맞췄다.

고통이 컸지만 잔뜩 흥분한 덕분인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는 아니었다.

쿵.

소호는 오른쪽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바닥이 물결치듯 일렁이면서 조서인의 발을 붙잡듯이 흙이 솟구쳐 올랐다.

“어엇!”

조서인이 깜짝 놀라서 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소호는 그 틈에 몸을 일으켰다.

목덜미를 겨누고 있던 창은 멀쩡한 오른손 장타로 옆으로 후려쳤다.

쩌어엉!

“……!”

깜짝 놀란 조서인이 눈을 크게 떴다.

소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박도를 발로 살짝 걷어차서 위로 띄웠다.

찌릿-.

“윽.”

원래는 왼손으로 잡으려 했지만 통증이 느껴져서 오른손으로 잡았다.

‘한 손이라도 상관없어.’

소호는 곧바로 칼을 내려쳤다.

북천도.

강맹한 기파를 뿜어내는 도격을 전혀 자제하지 않고 내리그었다.

푸화아아악-.

애꿎은 땅이 잘려 나간다.

조서인은 이미 옆으로 훌쩍 물러나서 공격을 피한 상태였다.

공격을 보고 피한 게 아니다.

소호가 칼을 쥐는 순간, 그다음엔 어떤 행동을 할지 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단 말이지.’

소호는 자신의 공격 방식을 바꿔 보았다.

툭, 툭.

발끝으로 땅을 두 번 두드린 뒤, 곧바로 몸을 띄웠다.

후우웅-.

조서인은 피한다.

공격은 빗나갔다.

아까 전과 동일한 모습.

이전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소호가 비스듬히 올려 벤 칼을 그대로 허공에 집어 던졌다는 점이다.

“……!”

깜짝 놀라는 조서인의 얼굴에서 작은 만족감을 느끼면서 소호는 그대로 소림오권 중에 호권을 전개했다.

쿠웅!

강한 진각과 함께 뻗어 내는 일권.

크게 팔을 돌려 가슴을 내리찍는 일타에 강맹한 힘이 실려 있었다.

거리는 가깝다.

조서인은 회피하지 못하고 창대를 들어 올려 소호의 일권을 받아 냈다.

투우웅-.

창대의 유연한 탄력이 소호의 권격을 완화시켜 주었다.

소호는 앞발을 쭉 뻗는 전질보로 다가가 턱을 노리고 등각을 올려 찼다.

파앙!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조서인은 목을 옆으로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 각법을 피했다.

‘이걸 피해?’

소호는 제자리에서 몸을 띄웠다.

돌아가는 허리.

허공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회전한 소호의 오른쪽 발이, 원앙각의 화려한 한 수로 조서인의 목덜미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터어엉!

“하?”

조서인은 그것조차 막아 냈다.

도법만이 아니라 권법.

소호의 모든 공격을 알고 있는 듯 동요하지 않고 차분한 눈빛이었다.

휘리릭-.

조서인은 자연스럽게 창을 회전시키면서 뒤로 물러섰다.

창끝으로 고요하게 중단을 겨눠 오는 자세에선 일말의 허점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깨를 많이 다쳤어, 소호야.”

조서인은 축 늘어뜨린 소호의 왼팔을 힐끗 바라봤다.

“포기해.”

“……난 아직 안 졌어.”

소호는 이제야 떨어져 내리는 박도를 쳐다보지도 않고 오른손으로 받아 냈다.

그런데 곧바로 내리치는 도격과 교차하듯, 찌르기 일섬(一閃)이 소호의 가슴을 노렸다.

쩌엉!

“……!”

한 걸음 크게 물러서는 소호를 두 개의 빛살이 추격해 왔다.

조서인의 창이 두 개로 늘어나 있었다.

좌와 우.

창이 양쪽으로 동시에 날아왔다.

소호는 오른쪽은 칼로, 왼쪽은 장타로 막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로 왼팔을 못 쓰게 된 건 뼈아팠다.

대응할 방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소호는 한쪽 공격을 막는 것과 동시에, 허리를 뒤로 젖히는 철판교의 수법으로 공격을 피했다.

쒜에에에엑-!

“흡.”

소호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조서인의 창술을 간신히 옆으로 비껴 냈다.

텅!

창에 얻어맞은 땅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뿌연 먼지를 뚫고 날아오는 찌르기 일섬.

드드드드-.

칼날의 넓은 부분으로 막기는 했으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튕겨 나가 바닥에 길게 족적을 남겼다.

조서인의 기세는 견고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소호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었다.

뻐억! 빠악! 퍽!

“큭.”

소호는 그 후로 어깨, 허벅지, 팔목을 연이어 수십 번이나 얻어맞았다.

그나마 정타로 얻어맞지 않도록 공격을 흘리는 게 한계였다.

계속해서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노리지만 한 팔로 공격을 막아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무인 대 무인의 대결이다.

소호가 전의를 잃지 않은 이상 조서인은 절대로 무공을 대충 전개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호가 접근할 수 없도록 창대를 이용해 두들기는 모습이 얄미울 정도로 철저했다.

‘참아야 해. 한 대만, 단 일 격만 넣으면……!’

소호는 안 그래도 성치 않은 몸으로 이를 악물고 참으며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생전 처음 겪는 굴욕의 시간이었다.

그나마 소호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자존심이다.

질 수 없다.

특히 조서인에게는 질 수 없다.

수없이 매를 맞으면서도 소호는 오직 그 생각만으로 버텨 냈다.

‘한 대만. 한 대……만……!’

뻐억!

그러다 좌측 머리를 얻어맞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기이이이잉-.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소호는 두 눈이 풀렸다.

이제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마무리를 짓기 위해 달려드는 조서인의 모습이 뚝뚝 끊겨서 보였다.

그 순간.

꿈틀-.

소호의 배 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번쩍.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소호가 칼을 내리친 것은 순전히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생각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다.

잠시 머릿속이 아찔했다가 정신이 돌아오니, 소호는 어느새 전력으로 강기를 내뿜으며 조서인을 향해 내리치고 있었다.

“……!”

소호가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잠겼을 때는 이미 늦었다.

소호가 들고 있던 박도는 완벽한 투로를 그리며 조서인의 가슴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안 돼. 멈춰!’

내면의 외침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시뻘건 강기에 휩싸인 박도가 조서인의 창날을 두부처럼 잘라 냈다.

나아가는 강기.

내리치는 도법은 북천도였다.

살기가 짙은 북방의 도법이 한 마리의 야생동물처럼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조서인은 고개를 뒤로 뺐다.

잘려 나간 창으로라도 다급하게 칼을 쳐 내려 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굴러오는 바위를 나뭇가지로 막으려는 생각이나 다름없었다.

서걱-.

조서인의 옷자락을 잘라 내는 감촉이 손끝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소호는 절망했다.

이대로 친구를 잃게 되는가?

친구의 가슴을 가르고, 피가 뿜어지는 걸 맞아야 하는가?

쒜에에엑-!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옆에서 날아든 까맣고 커다란 창날이 소호의 참격을 정면에서 가로막았다.

쩌어어어어엉!

강기와 강기가 맞부딪친 굉음은 천지사방을 뒤흔들었다.

마을 전체가 들썩이는 듯했다.

소호는 뒤로 튕겨져 나갔다.

박도의 칼날은 강기가 부서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서 사방에 철 조각을 흩뿌렸다.

“컥.”

소호는 땅바닥을 두 바퀴나 구른 뒤에야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한 팔로 몸을 지탱한 채 고개를 들자, 바닥에 쓰러진 조서인과 그 옆에서 조서인의 상세를 살피는 장기린이 보였다.

“아……!”

아버지가 지켜 주었다.

보다 못한 장기린이 끼어든 것이다.

조서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보였다.

울컥.

조서인이 피를 토해 낸다.

내상이라도 입은 것일까?

조서인은 장기린에게 뭐라고 입을 벙긋거리더니, 이내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가벼운 내상이다.”

조서인의 상세를 마저 살핀 장기린이 소호에게 다가왔다.

소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승부는.”

장기린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소호에게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승부는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지?”

소호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졌어요.”

***

소호는 약초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조서인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호의 왼팔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얼굴, 팔, 손등. 밖으로 드러난 모든 피부에 멍이 들어 있었다.

휘감긴 건 그의 팔만이 아니다. 끈끈한 거미줄 같은 감정이 소호의 마음도 휘감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내가 환자인데 말이지…….”

반면에 조서인은 기절해 있기는 하지만 얼굴이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소호는 기절한 조서인을 향해 중얼거렸다.

“미안해, 서인아. 내가 멍청했어. 왜 그렇게 못난 짓을 했지?”

소호는 조서인을 잘 안다.

조서인이 깨어 있었다면 괜찮다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오히려 온몸에 멍이 들게 때려서 자기가 미안하다고 말할 게 분명했다.

“분명히 넌 그렇게 말할 거야. 착한 애니까. 그렇기 때문에…….”

소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지금은 네 얼굴을 못 보겠다, 서인아.”

소호는 흑신의 우문환에게 크게 혼이 났다.

열흘 넘게 기절해 있던 놈이 깨자마자 하는 짓이 이번엔 친구를 기절시키는 거냐고.

조서인의 몸에 장침을 꽂아 넣어 치료하면서, 그로서는 드물게 장기린을 향해 자네는 그걸 보고만 있었냐고 타박도 했다.

소호는 자신의 손에 놓인 고약을 내려다보았다.

혼은 났지만, 소호에게 하루 두 번씩 바르라면서 준 고약에서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흑신의 우문환다운 행동이었다.

혼은 내지만, 소호가 다친 꼴은 못 본다.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왔다.

“엄마한테도 미안해.”

소호의 어머니, 진휘연은 소호의 등짝을 때렸다.

매서운 손맛을 보여 준 그녀는 꼭 화해하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다급하게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상회의 일이었다.

이번에 벌어진 일 때문에 상회에 큰일이 벌어졌다면서 풍운상회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은자촌으로 찾아와 그녀를 모시고 갔다.

소호는 미리 적어 둔 서찰 하나를 조서인의 머리맡에 둔 뒤에 몸을 돌렸다.

객잔 밖으로 나가자 장기린이 묵묵히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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