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8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8)
“떠날 거냐?”
장기린은 소호가 매고 있는 작은 봇짐을 응시했다.
아직 해도 뜨기 전의 어스름한 새벽녘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소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네.”
소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나?”
“네.”
소호는 이제 알고 있었다.
드문드문 기억이 끊기긴 했으나, 객잔에 왔을 때 장기린과 어떻게 싸웠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이제는 다 기억할 수 있었다.
서인이 덕분이다.
서인이에게 살수를 쓸 뻔했던 경험이 아니었다면……. 소호는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저는 아버지를 이겨 보고 싶었어요.”
소호는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진실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세상에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가는 곳마다 무쌍귀, 무쌍귀……. 그래서 빨리 크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인정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좀 조급했나 봐요.”
소호는 허리춤을 매만졌다.
원래는 무산학관의 증표인 철 요대가 있던 자리다.
그리고 철 요대의 비밀 공간에 ‘집혼기’가 있던 자리이기도 했다.
“이제 마음이 가라앉으니까 알겠어요. 내가 내가 아니게 되다니.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요. 집혼기……. 정말로 불행의 씨앗이네요.”
“…….”
“힘을 얻는 수단일 뿐이라고 했던 게 부끄럽습니다.”
장기린은 무거운 눈빛으로 소호를 바라보았다.
부모와 자식.
그것만으로도 천륜인데, 똑같이 집혼기로 강해진 사람들이라는 인연까지 더해졌다.
“살기는 정신을 좀 먹는다. 피는 피를 부르고, 더욱 큰 힘을 얻겠다는 면죄부 하나로 살육이 쉬워진다. 사람의 목숨이 너무 가벼워지지.”
“맞……아요.”
“이미 너도 느낀 일일 거다.”
소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소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장기린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난 괜찮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스물여덟. 항주에서 객잔을 열면서부터 괜찮아졌지.”
“……!”
소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뜻밖의 이야기였다.
“많은 일이 있었다. 이제껏 살던 것과는 달랐어. 전장에선 사람의 목숨이 너무 가벼웠는데, 객잔 안에서는 너무나 무겁더군.”
“아…….”
“그때 가족을 얻었다. 평범한 삶의 가치를 깨달았지. 만약에 네가 그 사실을 스물여덟 전에 깨닫게 된다면……. 나보다 빠르게 철이 들 것이겠지.”
무력의 강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범한 삶의 가치를 언제 깨닫는지,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한 법이라고, 장기린은 말하고 있었다.
“아…….”
장기린은 소호가 당장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은 힘들 거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지금 억지로 잡아 둬 봐야 또 예전처럼 바위 위에서 멍하니 누워 있기만 하겠지.”
장기린은 몸을 돌려 삼산 중 영산을 바라봤다.
흑산과 백산 사이.
푸르른 정기를 품고 하얀 구름을 치마처럼 두른 신령한 산이었다.
그러다가 품 안에서 책자를 하나 꺼내 소호에게 던져 주었다.
“어어?”
소호는 얼떨결에 받아 든 책자의 제목을 보았다.
청명경(晴明經).
“검선께서 내게 전하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죽이려 들던 내게 살기를 씻으라며 가르쳐 주신 내용이지.”
소호는 멍하니 장기린을 바라봤다.
“청명경 일만 자(字). 네 마음을 씻는 데 도움을 줄 거다. 집혼기는 부수긴 했으나, 이미 네 영(靈)은 그 귀물과 엮여 버렸다. 언젠가는 결론을 지어야 할 테지. 그때 도움이 될 거다.”
장기린의 담담한 목소리가 소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버지…….”
소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울컥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남사스러워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가슴속이 따스한 감정으로 가득 찼다.
소호는 소중한 보물을 받들 듯 조심스럽게 청명경 책자를 품 안에 넣었다.
“장소호.”
“예.”
“네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해라. 많이 고민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
“……예.”
“다만…….”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예, 아버지.”
“텐차이는 잘 있던가?”
텐차이.
한때 북천의 영웅이자, 장기린의 호적수였던 자를 말함이다.
사실 소호가 북천도를 쓸 때부터 언젠가는 날아올 질문이었다.
소호는 잠시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순순히 답했다.
“스님이 되어 불법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아버지 저도 궁금한 게…….”
“뭐지?”
“왕진은 죽었나요?”
소호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기절해 있는 사이에 장기린이 나갔다 온 일.
흉신악살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의 피로 범벅이 되어 돌아온 이유가 소호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근거?
장기린이 피의 복수를 할 만한 인물이라면 생각나는 건 왕진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 죽었다.”
“아…….”
소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왕진.
황실의 실세이자, 무림을 지금 이 꼴로 만든 원흉.
그에게 집혼기를 건네준 인물이 죽었다니.
충격적이다 못해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왕진을 쓰러뜨리기 위해 그렇게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렇게 간단하게……. 사람의 목숨은 정말로 덧없구나. 아! 그런데, 그렇다면 왕진의 호위무사인 유준은……?’
소호는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
왕진이 죽었다.
그렇다면 왕진을 소중하게 지키던 유준이 어찌 되었을지는 뻔한 일 아니겠는가.
“저는…… 달라질게요, 아버지.”
소호는 이를 악물었다.
강한 다짐.
앞으로의 맹세였다.
“내가 조금 도와주마.”
장기린은 소호에게 다가와 검지와 중지를 세워 가슴과 어깨의 혈도 일곱 개를 찔렀다.
파바바밧!
“흡?”
따끔한 감촉과 함께 순식간에 온몸이 무거워졌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점혈법에 의해 기의 흐름이 끊겼다.
온몸에 융통무애하게 흐르던 진기가 갑자기 뚝 끊겨서 힘을 잃고 말았다.
‘단전……. 아냐, 중단전과 하단전 사이인데.’
정확히 말하면 심장과 아랫배 사이의 흐름이 끊겼다.
답답했다.
윗배가 꽉 막힌 것처럼 온몸의 기의 흐름을 막고 있었다.
한겨울에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머리는 맑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소호는 잠시 두 눈을 끔뻑거리며 몸 상태를 점검하다가 문제점을 깨달았다.
“어……. 아버지.”
소호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금제, 풀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장기린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소호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네?”
“칠점법(七點法). 풀고 싶다면 내가 누른 혈도를 역순으로 누르기만 하면 풀린다.”
“아…… 그런데 왜……?”
“네가 푸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의미가 있다.”
장기린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묵묵히 길을 비켜 주었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따스한 눈빛이 함께했다.
“아……!”
소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장기린이 점혈을 하고 보내 주는 이유는 간단했다.
점혈은 계기일 뿐.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 믿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저는…….”
소호는 백 마디 말을 해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저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 장기린에게 절을 올렸다.
저벅저벅.
떠나가는 소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장기린은 소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객잔 앞을 떠나지 않았다.
***
천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하동부(河同府) 인근의 성채.
하늘에선 시체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빙빙 돌고 있었다.
오랜만의 포식을 기대한 들개들이 컹컹거리며 사방을 뛰어다니고, 불과 한나절 만에 부패하기 시작한 시신들은 악취를 내뿜으면서 파리 떼에 뒤덮였다.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그곳에는 짐승들 말고는 그 누구도 살아남은 자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까악- 까악-.
그 순간, 시신의 눈알을 파먹으려던 까마귀 한 마리가 깜짝 놀라 퍼덕거리며 하늘로 날아갔다.
꿈틀-.
거대한 육신 하나가 바닥에서 움직임을 보였다.
살아 있는 자가 있었는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생명을 잃은 시신이었다.
눈동자는 탁했고, 사지육신은 망가졌다. 양팔이 다 부러졌고, 다리는 들개가 뜯어 가기라도 한 듯 한쪽이 없었다.
가장 큰 특징은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몸통이 잘려 나갔다는 사실이다.
잔인한 비유지만 도마 위에서 칼을 맞은 생선과 같았다.
내부의 뼈와 내장이 통째로 잘려 나갔으니, 신의(神醫)가 아니라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되살리지 못할 즉사의 상처였다.
피범벅이 된 노란색 머리.
탁한 푸른빛 눈동자를 지닌 사내는 그런 상태로도 움직였다.
그야말로 기사(奇事) 중의 기사.
보통 사람이 봤다면 사흘 밤낮을 벌벌 떨면서 잠들지 못할 광경이, 이곳 하동군 성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크륵…….”
사흉 중 최강의 짐승.
궁기는 부러져서 덜렁거리는 양팔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일어서고 싶었으나, 상체 중의 절반만을 조금 위로 기울이는 것에 그쳤다.
몸통을 사선으로 그어 놓은 상처 때문이었다.
완전히 분리된 육신.
그나마 옆구리 근처의 가죽과 근육만 조금 이어져 있을 뿐, 이미 그의 하체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카악, 크르륵.”
궁기는 목구멍에서 끈적끈적하게 굳은 핏덩이를 토해 냈다.
그는 탁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존자는 없었다.
그는 진흙이 잔뜩 묻은 마차 바퀴처럼 삐걱댈 뿐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회전시켰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가 상대했던 자를 떠올렸다.
죽음을 관장하는 자.
그야말로 사신(死神)이라 불리기에 마땅한 자였다.
막강하기 이를 데 없는 힘과, 완벽에 가까운 무공을 지닌 자였다.
지는 것도 당연하다.
수백 명이 덤빈다 한들 감히 어찌 사신을 쓰러뜨릴까. 참상만을 남길 뿐 몰살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남…….”
궁기는 억지로 뼈를 끼워 맞춘 뒤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더듬거렸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심장의 바로 윗부분.
가슴에 박아 넣은 집혼기는 다행히 그대로 있었지만 그의 육신은 집혼기의 힘을 사용할 한계를 넘어서고 말았다.
궁기는 자신의 몸 상태를 냉철하게 관찰했다.
그는 사실 죽음을 한 번 극복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죽음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새로운 세대의 집혼기.
신수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험하던 과정에서 생강시에 박아 넣어 성공한 유일한 사례가 궁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몸통이 반으로 잘렸으니 아무리 강시라도 이대로 죽어 가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책임져야 할 동생이란 존재가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 동생.
머나먼 고향, 지금은 볼 수 없는 어머니와 똑같은 얼굴을 지닌 소녀.
우드득-.
궁기는 척추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비스듬히 몸을 비틀었다.
그와 겹쳐 있던 다른 시신은 하늘을 보고 누운 모습이었다.
창백한 안색의 청년.
약관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완숙한 검술을 뽐내던 희대의 무인.
궁기와 똑같이 사흉이라 불렸던 청년, 유준이다.
가슴을 십자 모양으로 쪼갠 상처를 입고도, 감탄이 나올 정도의 분투하던 청년이다.
유준은 핏발이 선 탁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숨은 멎어 있었다.
비록 마지막에 창날에 가슴을 관통당해 죽기는 했으나, 사지육신은 멀쩡했다.
궁기는 그 모습에 마음을 결정했다.
“크륵…….”
그는 자신의 가슴에 박혀 있던 집혼기를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