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9화
제32장 귀곡천계(貴鵠賤鷄) (9)
찐득한 피에 젖은 집혼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혼기를 뽑자마자 온몸의 진기가 흩어진다.
시시각각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궁기는 단호한 손놀림으로 유준의 몸에 집혼기를 박아 넣었다.
콰직!
집혼기가 육신을 뚫고 박히는 소리는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육신 내부, 장기를 손상시키지 않는 부분에 궁기는 정확히 자신의 집혼기를 집어넣었다.
이제 유준의 몸에는 두 개의 다른 집혼기가 있다.
궁기가 박아 넣은 집혼기가 한 개.
이미 유준이 갖고 있던 집혼기가 한 개.
한 사람의 몸에 도합 두 개의 집혼기가 들어간다면?
모른다.
신수비처에서 수백 번이 넘게 도전했으나 그나마 하나의 집혼기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이제껏 전례가 없는 일이고 결과는 어찌될지 모른다. 하지만 궁기에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최선의 방법을 시도할 뿐.
우우웅-.
궁기는 유준의 몸에 박아 넣은 집혼기에 모든 힘을 끌어 모았다.
가지고 있던 집혼기의 영력, 그가 생전에 지니고 있던 극한의 빙백신기.
그리고 궁기 자신의 영혼까지도 모조리 끌어다 넣었다.
드드드드-.
땅이 울린다.
궁기가 사용하는 막강한 힘의 파편이 주변을 새하얗게 얼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까맣게 보일 만큼 몰려든 까마귀 떼가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돈다.
“흐…….”
모든 것을 밀어 넣은 궁기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금발벽안.
탁한 시선이 무엇을 바라보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껍데기만 남은 시신은 살이 서서히 쪼그라들더니 해골처럼 말라붙어 버렸다.
“카학.”
궁기의 육신이 스러진 순간, 마치 궁기의 생명력이 유준에게 옮겨 간 듯 숨이 멎어 있던 유준의 시신이 몸을 꿈틀거렸다.
입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멈춰 있던 호흡.
폐부에서 꽉 막혀 굳어지던 핏덩이가 다시 생명을 얻어 튀어나온 것이다.
유준은 폐병 환자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가 싶더니 등을 활처럼 휘며 몸을 비틀었다.
“그크그드크.”
유준은 이를 악문 채 기묘한 신음을 내뱉었다.
이미 죽어 버렸던 육신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증이 유준의 몸을 뒤틀었다.
까악- 까악-.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유준의 주변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창백하게 굳어 있던 피부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개울가에 이끼가 끼듯, 가슴을 갈라놓았던 상처에 하얗게 서리가 끼더니 어느 순간 상처가 급격하게 아물었다.
“카학!”
상처가 아물자 그 다음은 내력이다.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유준의 가슴에 있던 집혼기 두 개가 서로 싸움을 시작했다.
붉은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주변에 얼어붙은 땅바닥이 누군가 칼로 내리치기라도 한 것처럼 촤악- 갈라졌다.
하얀 서리가 온몸을 뒤덮는 순간에는 땅바닥은 물론이고 유준의 전신이 서리로 뒤덮였다.
엎치락뒤치락.
두 개의 기운이 정신없이 서로 주도권을 두고 싸우던 도중, 유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자 정신없이 싸우던 두 개의 기운이 서로를 받아들인 것처럼 한데 뭉쳐서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
주변을 꽁꽁 얼렸던 한기가 유준의 코와 입속으로 연기처럼 빨려들어 갔다.
콰드득-.
유준이 강하게 손을 움켜쥐자, 꽁꽁 얼어붙은 땅덩어리가 유준의 손가락 모양대로 날카롭게 갈라졌다.
“스하아…….”
길게 숨을 내쉬는 유준의 몸에서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서리조각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유준의 모습은 특별했다.
본래 새까맣게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이 푸석거리는 새하얀 백발로 변해 버렸다.
머리카락뿐인가?
아니다. 유준의 두 눈은 여전히 탁했으나, 궁기의 두 눈처럼 푸른빛 안광이 때때로 번뜩이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유준의 양손이다.
스스스스-.
새하얗게 얼어붙었다가 녹는 것을 반복하더니, 어린아이처럼 매끈하고 하얀 피부로 변했다.
“후우우…….”
유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삐걱거리는 목을 좌우로 비틀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손가락을 몇 번이나 쥐었다 펴기도 했다.
유준은 손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몸을 차근차근 확인한 뒤 자신의 양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살아난 건가?”
유준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싸움…… 결과…….”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황금 갑주와 황금 검의 파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박살 난 갑주처럼 그의 기억도 파편이 되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쓰러져 있는 처참한 모습의 시신.
금발, 벽안의 흔적만을 남긴 채, 완전히 살점이 말라 버려 해골처럼 변한 시신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다.
“기억이……. 혼란스럽다.”
유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악- 까악-.
까마귀 떼가 빙글빙글 돌다가 유준의 주변에 내려앉아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추묵환…… 황실…… 북해빙궁……. 설지…….”
유준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은 채 혼란스럽게 숨을 헐떡였다.
“나는 궁기……. 아니, 금장…… 유준…….”
유준인가 궁기인가.
겉모습은 유준이었으나 그 내면에는 궁기의 영혼이 함께 있었다.
장강 인근 어촌에서 구박받던 꼬마 맹인 유준의 기억을 다 가지고 있는 만큼, 궁기의 어린 시절 새하얀 설원에서 자란 기억도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궁기이기도 했고 혼돈이기도 했다.
이름 같은 건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왕진……. 우선 황실로…….”
그는 혼란스러운 기억보다는 미래에 해야 할 일을 택했다.
궁기와 유준은 둘 다 사흉의 짐승이다.
왕진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싸웠건만 처참하게 패배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황실은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 자신의 직위와 위치는 어떠한지.
그걸 확인하는 게 그들이 해야 할 최우선적인 일 아니겠는가.
후드득-.
유준은 손잡이만 남은 황금 검을 집어 들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 몸이 완전히 유연해지지 않아서 걸음을 옮기는 자세가 뻣뻣했다.
마치 허리를 크게 다친 노인처럼 뻣뻣한 걸음걸이였다.
그렇게 어색하게 걸어가길 잠시, 성채에서 벗어날 때쯤 그는 전면의 관도에 뿌옇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한 떼의 인물들과 마주쳤다.
“워워!”
십여 명의 말을 탄 사내들.
그들은 시산혈해에서 쓸 만한 물건을 줍기 위해 다가오는 마적 떼였다.
“거기 영감! 어느 마을에서 왔어? 여기서 주운 건 다 우리 것……. 엉? 뭐야. 얼굴은 젊잖아?”
유준의 새하얗게 새어 버린 머리카락과 엉거주춤한 걸음걸이 때문일까.
마적 떼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왔다가 정작 유준의 얼굴이 젊어 보이니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모두 건장한 마적들이었다.
두목이 타고 있는 황색 말은 힘이 좋아 보이고 말발굽이 두꺼운 게 특이했다.
“…….”
유준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그런 마적들을 잠시 보다가 관심이 없다는 듯이 계속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지이익- 턱.
지이이익- 턱.
한쪽 다리를 질질 끌 듯이 걸어가는 모습이다.
처음보다는 많이 유연해졌으나 아직도 병자 같은 걸음걸이였다.
“뭐, 뭐야?”
“미친놈인가? 두목 말을 들은 척도 안 해?”
“두목, 저거 가만히 둘 겁니까?”
졸지에 무시당한 마적들은 그 황당한 모습에 당황하다가, 한 놈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두목! 저놈이 들고 있는 저거, 황금 아닙니까?”
“어엉?”
“까맣게 때가 타긴 했는데 반짝거리는 것 같습니다!”
눈썰미 좋은 한 도적의 말에 마적들 모두가 눈이 돌아갔다.
“진짜다!”
“값비싸 보이는데!”
“크흠, 조용. 조용.”
마적 떼의 두목은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유준의 걸음걸이가 여전히 뻣뻣하자 마음을 놓고 다가왔다.
히히힝-.
말을 탄 채로 유준의 앞을 가로막은 마적 떼의 두목은 음산하게 외쳤다.
“백발! 그 병신 같은 걸음걸이를 보니 좀 불쌍하다만, 그래도 그런 귀한 걸 갖고 가게 할 수는 없지! 당장 손에 든 걸 내놔라. 여기서 줍는 건 이제부터 다 우리 황풍단의 것이다.”
“그래! 우리가 바로 이 하동부 근방을 벌벌 떨게 만드는 호걸님들! 황풍단이다!”
“당장 가진 거 다 내려놓고 떠나라! 그럼 살려 주마!”
마적들은 의기양양하게 외치면서 유준의 주변을 둘러쌌다.
푸르륵- 투레질을 하는 말들과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유준을 둘러싸고 위협적으로 몸을 흔들어 댔다.
그들은 모두 비웃음이 가득했다.
약자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무지렁이들.
딱 그 정도의 지능밖에 없는 자들이다.
“…….”
유준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앞을 가로막은 두목을 힐끗 쳐다본 뒤 묵묵히 옆을 지나가려 했는데, 두목은 다시 한 번 말을 움직여서 유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허! 이놈이 또 내 말을 무시해?”
스릉-.
마적 두목은 반달 모양의 칼을 꺼내 유준의 목을 겨누었다.
“좋게 말할 때 그 검병은 내놓고 가거라. 우리 호걸님들이 그걸 팔아서 맛있는 술을…….”
마적 두목은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서걱-.
유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 손잡이를 휘두르는 순간, 보이지 않는 칼날이 일 장을 넘는 거리를 격하고 마적 두목의 허리를 양단해 버린 탓이다.
푸확!
“히히히힝-!”
마적 두목은 위협적인 얼굴을 한 표정 그대로 상체가 비스듬히 미끄러져서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새빨간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깜짝 놀란 두목의 말이 앞다리를 들고 펄쩍펄쩍 뛰면서 공포에 질렸다.
“뭐, 뭣.”
“이게 무슨……?”
상황을 파악하고 곧바로 도망치기엔 마적들은 너무나 둔했다.
유준은 한 번 피를 보자 곧바로 손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촤아아악-!
유준의 두 눈에서 푸른빛 안광이 번뜩였다.
반달 모양의 잔상을 남기는 수평의 일격이다.
백귀검(百鬼劍).
반월귀참(半月鬼斬).
그저 제자리에서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을 뿐인데, 길게 늘어난 검기가 유준을 포위하고 있던 마적들을 일거에 양단하며 시신으로 만들었다.
푸화아아악-!
그뿐인가?
검기에 담긴 빙백신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지며 마적의 시신들을 꽁꽁 얼렸다.
유준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위력이 훨씬 컸던 탓이다.
막강한 힘.
참격과 빙백신기가 결합하자, 정말로 죽음을 내리는 사신처럼 막강한 위력을 뽐낸다.
졸지에 유준의 주변에는 허리가 잘린 채 하얗게 얼어 버린 기묘한 조각상들이 아홉 개나 생겨났다.
히히히힝-!
마적 두목의 말은 등자 위에 하반신만 남은 시신을 실은 채, 미친 듯이 달려서 유준으로부터 도망쳤다.
“…….”
유준은 그런 말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이익- 턱.
지이이익- 턱.
한쪽 다리를 끌고 가는 기묘한 발소리만이 고요한 성채 안에서 공포스럽게 퍼졌다.
***
은자촌에서 하산한 소호는 삼산현 아랫마을에 맡겨 두었던 말을 찾아서 곧바로 안휘성을 향해 움직였다.
조서인과의 충격적인 대결 끝에 하산하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공이 약해지니 마음도 약해지는구나. 내가 이렇게 약했었나?’
소호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 위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휘성으로 가는 길이긴 하지만 걸음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게 허무하다.
왕진을 상대하기 위해 조직하던 천무련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음?”
그러던 중 소호의 뛰어난 안력이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움직이는 일단의 무리를 포착했다.
소호는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면서 안력에 집중했다.
검은색 옷.
새하얀 가면.
숫자는 삼십 명.
“백검회?”
소호의 눈이 가늘어졌다.